3. 육체의 무가 곧 구원

1) 선물을 가져온 손님

이제 고통은 더 이상 그대의 친구가 아니고 죄책감도 더 이상 그대의 신이 아니니, 그대는 사랑의 결과들을 반겨야 한다. 그대의 손님이 왔다.

그대가 손님을 청했고, 그가 왔다. 그대는 그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그를 온전히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님의 선물들은 그와 함께 왔다. 그는 선물들을 그대의 발치에 내려놓았고, 이제 그대가 선물들을 바라보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청한다.

손님은 자신이 분리되고 홀로라고 믿으며 따로 걷는 모든 이에게 그 선물들을 주는 데 그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대가 자신의 선물들을 받아들이면 따로 걷는 이들도 치유될 것이다. 그대의 손님은 그대가 서 있는 거룩한 땅—그들을 위한 그의 선물들이 놓인 그 땅—에 발을 디딘 모든 이를 반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받은 모든 것 덕분에 이제 얼마나 많이 줄 수 있는지 보지 못한다. 그러나 들어온 손님은 그대가 그를 초대해 있게 한 그곳으로 그대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손님이 주인을 찾을 수 있는 다른 곳도, 주인이 손님을 만날 수 있는 다른 곳도 없다.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평화와 기쁨이라는 그의 선물들과, 그의 임재가 가져오는 모든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선물들은 그것들을 가져온 손님이 있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손님은 그 선물들이 그대의 것이 되게 하려고 가져왔다. 그대는 자신의 손님을 볼 수 없지만, 그가 가져온 선물들은 볼 수 있다.

그리고 선물들을 바라볼 때, 그대는 손님의 임재가 반드시 거기에 있다고 믿게 될 것이다. 그대가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임재가 담고 있는 사랑과 은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러하다—그의 아들이 생명을 갖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그의 일부가 되며,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생명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대가 '생명'이라 부른 것은 살아 있지 않다.

그대가 '생명'이라 부른 것은 다만 그대의 소망을 상징할 뿐이다. 곧 생명과 분리되어 살아 있고자 하는 소망, 죽음 속에서 살아 있고자 하는 소망, 죽음을 생명으로 지각하고 생명을 죽음으로 여기고자 하는 소망이다. 여기서는 혼란이 혼란을 뒤따르니, 이 세상이 혼란 위에 세워졌을 뿐, 혼란 외에는 떠받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토대는 변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변하지 않으면서 변해 보이는 이 모습이 혼란이 실제로 의미하는 상태 외에 무엇이겠는가?

2) 무를 요구하는 질병

혼란에 빠진 이들에게 안정은 무의미하며, 변화와 이동이 그들이 자신의 삶의 근거로 삼는 법칙이 된다. 육체는 변하지 않는다.

육체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더 큰 꿈을 나타낸다. 변한다는 것은 이전에 자신이 처해 있던 상태와는 다른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불멸에는 변화가 없으며, 천국은 변화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육체는 이중의 목적을 지니니, 상반된 것들을 가르치도록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반된 것들은 그것들을 가르치는 스승을 반영한다. 육체는 시간에 따라, 질병이나 건강에 따라, 그리고 자신을 바꾸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마음이 육체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서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질병은 육체가 자신이 아닌 것이 되라는 요구다. 육체의 무(無)는 육체가 병들 수 없다는 보장이다.

육체가 무(無) 이상이 되라는 그대의 요구 안에 질병이라는 관념이 있다. 그 요구는 하나님이 실제로 그러한 존재보다 못한 존재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되는가? 희생을 요구받는 것은 바로 그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부가 더 이상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대의 자아를 희생시켜야 하고, 그 희생 안에서 그대는 더 커지고 그는 그대를 잃음으로써 작아진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사라진 것이 그대의 신이 되어, 그대가 그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부터 그대를 지켜 준다. 신이 되라고 요구받은 육체는 공격받을 것이니, 육체의 무(無)가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는 그 자체로 힘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로서, 육체는 지각될 수 있고 느끼고 행동한다고 여겨질 수 있으며, 그대를 자신의 포로로 붙들 수 있다.

그리고 육체는 그대가 요구한 그것이 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는 그것의 하찮음 때문에 그것을 미워할 것이다.

그대는 그 실패가 육체가 마땅히 되어야 할 것 이상이 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육체가 무(無)임을 지각하지 못한 그대 자신의 실패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육체의 무(無)가 바로 그대의 구원이며, 그대는 그 구원으로부터 달아나려 한다. '무언가'로서 육체는 하나님의 적이 되라고, 하나님의 참모습을 하찮음과 한계와 절망으로 대체하라고 요구받는다.

그대가 육체를 사랑하는 것으로 바라보든 미워하는 것으로 바라보든, 그대가 축하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상실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총합이라면, 하나님 안에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완전함이 곧 육체의 무(無)이기 때문이다.

3) 주는 것이 가짐

그대의 구원자는 죽지 않았고, 죽음에게 바쳐진 성전으로 지어진 것 안에 살지도 않는다.

구원자는 하나님 안에 산다. 바로 이 사실이, 오직 이 사실만이 그를 그대에게 구원자가 되게 한다.

구원자의 육체의 무(無)가 그대의 육체를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풀어 준다. 그대의 것은 그의 것보다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구원자를 그가 자신을 육체라고 여긴다는 이유로 정죄하지 말라. 그의 꿈 너머에 그의 실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자는 자신이 무엇인지 기억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구원자임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구원받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구원해야 한다.

구원자의 행복은 그대를 구원하는 데 달려 있다. 구원을 주는 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구원자이겠는가?

그렇게 구원자는 구원이 반드시 자신이 주어야 할 것임을 배운다. 주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가졌음을 알지 못할 것이니, 주는 것이 가짐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강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이들만이 이것이 반드시 그러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가지지 않고서야 누가 줄 수 있겠으며, 줌으로써 오히려 늘어나야 할 것을 줌으로써 누가 잃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가 그대를 창조했을 때 자신을 잃었다고 그대는 생각하는가? 그가 자신의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에 약해졌는가?

아버지가 그대의 완전함으로 인해 불완전해졌는가? 아니면 그대가 아버지가 완전하고 온전하다는 증거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실재보다 좋아하는 그 꿈 속에서도, 하나님에게 그 증인을 주기를 거부하지 말라. 구원자는 자신이 만든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꿈으로부터의 구원자가 되어야 한다.

구원자는 다른 누군가를 육체가 아닌 존재로, 곧 세상이 세운 벽 없이 자신과 하나인 존재로 보아야 한다. 그 벽은 살아 있음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을 갈라놓으려고 세워진 것이다. 육체와 죽음의 꿈 안에도 진리의 한 가닥이 있으니, 아마도 그저 작은 불꽃 하나, 어둠 속에 만들어진 한 조각의 빛—하나님이 여전히 빛나는 그곳—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