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너머
1) 배신자로 보는 사랑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평화가 반드시 건너가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나머지는 지나갔지만, 이 하나는 여전히 남아 그대의 길을 가로막고, 빛으로 가는 길을 어둡고 두렵고 위태롭고 삭막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대는 형제가 자신의 적이라고 결정했다. 때로는 친구일 수도 있었으나, 그 우정은 서로 분리된 이해관계가 잠시 우정을 가능하게 해 주었을 때뿐이었다.
그러나 그와 그대 사이에 틈이 지각될 때에만 그러했으니, 그가 다시 적으로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그대에게 가까이 오면 그대는 뒤로 물러섰고, 그대가 다가가면 그도 즉시 물러났다.
범위가 제한되고 양이 신중하게 제한된, 조심스러운 우정이 그대가 그와 맺은 조약이 되었다. 그렇게 그대와 형제는 조건부 협정을 공유했을 뿐이며, 그 안에서 분리 조항은 둘 다 그대로 지키기로 합의한 항목이었다. 이를 위반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조약 파기로 여겨졌다.
그대와 형제 사이의 틈은 두 개의 분리된 육체 사이의 공간이 아니다. 그리고 그 틈은 단지 그대들의 분리된 마음을 갈라놓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 틈은 그대가 원할 때 만나고, 그대와 그가 다시 만나기로 선택할 때까지 떨어져 있기로 한 약속의 상징이다. 그러면 그대들의 육체가 접촉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로써 서로 만나 합치는 자리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대와 그가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분리할 '권리'가 조건으로 붙어야만 그대와 그는 때때로 만나기로 합의한다. 그리고 사랑의 '희생'으로부터 그대를 지켜 주는 분리의 간격 동안에는 떨어져 있는다.
육체는 그대를 구해 준다. 육체가 완전한 희생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그대가 형제와 만날 때마다 줄어든다고 진심으로 믿는 그 분리된 자아를 다시 세울 시간을 그대에게 주기 때문이다. 그대가 육체를 원인으로 삼아 그대와 형제 사이에 분리와 거리를 만들려 하지 않는 한, 육체는 그대의 마음을 형제의 마음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그렇게 그대는 육체에 그 자체에는 없는 힘을 부여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육체가 그대를 지배하는 힘이 있다.
이제 그대는 육체가 그대와 형제가 언제 만날지를 결정하고, 형제의 마음과 교감할 그대의 능력을 제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육체는 그대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말해 준다.
육체는 자신의 건강이 견딜 수 있는 것과, 자신을 지치게 하고 병들게 할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그것의 '타고난' 약점들이 그대가 하려는 일에 제한을 설정하고, 그대의 목적을 제한되고 약하게 유지한다.
그대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육체는 이에 맞춰 순응할 것이다. 그것은 오직 제한된 '사랑'의 탐닉만을 허용하고, 그 사이사이에 미움의 간격을 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 '사랑'할지, 언제 더 안전하게 두려움 속으로 움츠러들지를 지휘할 것이다. 그대가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육체는 병들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마주치는 모든 상황과 모든 사람을 오용해야 하고, 그들에게서 자신의 것이 아닌 목적을 보아야 한다.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사랑의 희생을 요구하니,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미움이 유지되려면 사랑이 두려운 것이어야 하고, 오직 때로는 있다가 때로는 사라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사랑은 배신자로 여겨지니, 불확실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대에게 안정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의 충성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약한지 보지 못한다. 사랑에게 떠나 달라고, 그대를 조용히 홀로 '평화' 속에 남겨 두라고 얼마나 자주 요구했는지도 보지 못한다. 목표에 대해 무죄한 육체는, 그대가 지니고 있으면서 육체에게 강제로 유지시키는 가변적인 목표들에 대한 그대의 핑계다.
2) 숨을 틈이 없음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은 육체의 약함이 아니라, 강함도 약함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대와 형제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싶은가?
그대가 숨을 수 있는 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싶은가? 자신의 구원자가 더는 자신의 적이 아님을 알게 된 이들에게는 충격이 찾아온다.
육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경계심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기쁜 소식 주위에는 두려움처럼 보이는 기색이 감돈다.
그러나 그 틈이 사라질 때 일어나는 일은 오직 영원한 평화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그를 버리게 만들 수 있겠는가? 그 틈 속의 어떤 장난감이나 하찮은 물건이 그대를 그의 사랑으로부터 단 한순간이라도 붙들어 둘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서 자아를 잃을까 두렵지 않다면, 그대는 육체가 천국의 부름에 '아니오'라고 말하도록 허락하겠는가? 그러나 발견됨으로써 그대의 자아가 사라질 수 있겠는가?
그대가 자유롭다는 것을 아는 일을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지각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진리를 적으로 바라보는 대신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길을 잃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명확하게 표시된 쉬운 길이 어째서 가시밭길처럼, 험하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길처럼 보이는가? 그대가 그 길을 천국과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희생도 어떤 상실도 없는 단순한 길로 보는 대신 지옥으로 가는 길로 보기 때문이 아닌가?
3) 받아들여진 치유
그대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어떤 상실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전까지, 그대는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얼마간 후회를 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의 선택이 가져다준 많은 이득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이득들을 보지 못한다 해도, 그것들은 거기에 있다. 그것들의 원인이 이미 일으켜졌으니, 그 원인이 들어선 곳에는 그것들도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대는 치유의 원인을 받아들였으니, 그러므로 그대는 반드시 치유되었다. 그리고 치유되었으므로, 치유하는 힘도 이제 반드시 그대의 것이다.
기적은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결과처럼 갑자기 발생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또한 기적 자체가 원인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는 곳에 있다.
이제 기적은 일으켜졌으나, 아직 지각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기적의 결과들은 거기에 있으나, 아직 보이지는 않는다.
이제 내면을 들여다보라. 그러면 그대는 후회할 이유가 아니라, 참으로 기쁜 환희와 평화의 희망을 위한 원인을 보게 될 것이다.
전쟁터에서 평화의 희망을 찾으려 하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었다. 죄와 고통을 간직하는 기능을 하도록 만들어진 것에게 죄와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을 요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었다.
고통과 죄는 하나의 환영이며, 미움과 두려움이 그러하듯, 공격과 죄책감도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환영들이 원인을 잃은 곳에서는 그 결과들도 사라지고, 환영이 없는 곳이면 어디든 사랑이 와야만 한다.
그대는 어째서 기뻐하지 않는가? 그대는 고통과 질병, 비참함과 상실, 그리고 미움과 공격의 모든 결과로부터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