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맹세 아닌 하나님의 약속
1) 말없는 병의 서약
이것이 그대가 떨어져 걸으려 하는 모든 형제와 맺어 온 은밀한 맹세다. 이것이 그대가 자신이 공격받는다고 지각할 때마다 다시 맹세하는 은밀한 서약이다. 자신이 공격받는다고, 그 공격으로 잃는다고 보지 않는다면, 누구도 고통받을 수 없다.
병에 대한 모든 서약은 의식 안에서 말해지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에게, 그에 의해 상처받고 그 대가로 그를 공격하겠다는 약속이다.
병은 몸에게 쏟아진 분노다. 몸이 고통을 겪게 하려는 것이다.
병은, 그대가 그로부터 떨어져 있으려 하듯 그대로부터 떨어져 있으려는 다른 이의 은밀한 바람과의 합의 속에서 은밀히 만들어진 것의 명백한 결과다. 그대들 둘 다 병이 자신의 바람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 결과도 가질 수 없다.
"내 마음과 그대의 마음 사이에는 틈이 없다"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 죽을 때까지 영원히 충실하겠다는 자신의 하찮은 서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치유로 그의 형제도 치유된다.
이것이 그대와 각 사람 사이의 합의가 되게 하라. 그대가 그 사람과 떨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겠다는 합의 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대가 그와 맺는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 약속이 하나님이 그에게 한 것처럼 그가 하나님에게 한 그 약속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킨다.
하나님의 아들도 자신의 약속을 지킨다.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그의 아버지는 말했다.
"그대는 영원히 나에게 사랑받고, 나도 영원히 그대에게 사랑받는다. 나 자신처럼 완전하라. 그대는 결코 나로부터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는 그 약속 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병들겠다는 약속을 나누지 않고 대신 자신의 마음이 치유되고 하나로 통합되게 할 때마다 그 대답을 그에게 일깨운다.
아들의 은밀한 맹세들은, 그가 나누는 그 약속의 주인인 하나님의 뜻 앞에서 무력하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자기 자신을 약속한 아들이 대신 내세우는 것은 그 자신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아들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아들 안에는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빈 공간, 작은 틈은 부족함일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원할 수 있는 곳은 오직 그곳뿐이다. 하나님이 없는 공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틈은, 하나가 되기로 약속한 아버지와 아들 어느 쪽의 뜻도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의 일부로서 뜻하는 것을 배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 자신과 그가 존재하는 것 사이에 틈이 없다는 그 약속은 거짓일 수 없다. 그 온전함 안에 어떤 틈도 있을 수 없는,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이 둘 사이에 어떤 뜻이 끼어들 수 있겠는가?
2) 거룩한 집의 보조물
그대가 모든 형제와 맺고 있는 그 아름다운 관계는 그대의 일부다. 하나님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온전함과 건강, 도움의 근원, 치유로의 부름과 치유하라는 부름을 그대 자신에게서 부정한다면, 그대는 병든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의 구원자는 치유를 기다리며, 세상도 그와 함께 기다린다.
그리고 그대도 세상과 떨어져 있지 않다. 치유는 하나이거나 아예 없을 것이다.
치유가 있는 곳이 바로 그 하나 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분리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분리의 반대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구원의 어떤 측면에도 중간 지대는 없다.
그대는 구원을 온전히 받아들이거나,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다. 분리되지 않은 것은 결합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합된 것은 분리될 수 없다.
그대와 그대의 형제 사이에는 틈이 있거나, 그대들은 하나다. 그 중간이란 없으며, 다른 선택도 없고, 두 선택 사이에서 나뉠 충성이란 것도 없다.
나뉜 충성은 다만 두 선택 모두에 대한 불충일 뿐이다. 그저 그대를 빙빙 돌게 하여, 안도의 약속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푸라기라면 무엇이든 불확실하게 붙잡게 만든다. 그러나 누가 지푸라기 위에 자신의 집을 짓고, 그 집을 바람을 막을 피난처로 믿을 수 있겠는가?
몸은 이와 같은 집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몸이 진리 안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몸은 그대의 집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있는 집에 이르도록 돕는 보조물로 볼 수 있다. 이것을 목적으로 삼을 때 몸은 치유된다.
몸은 분리와 병의 꿈을 증언하는 데 쓰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하지 않은 일로 함부로 탓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치유를 돕는 데 쓰이며, 이 목적을 위해서는 병들 수 없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것이 아닌 목적과는 결합하지 않을 것이며, 그대는 그것이 병들지 않기로 택했다.
모든 기적은 이 선택에 기초해 있으며, 선택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 그대에게 주어진다. 어떤 형태의 병도 면제되지 않는다.
그 선택은 형태의 관점에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병의 선택은 형태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하나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하나이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그대는 병들거나 건강하다.
그러나 결코 그대 혼자만은 아니다. 이 세상은 다만 그대가 홀로 있을 수 있고, 그대와 떨어진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생각할 수 있다는 꿈일 뿐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그대가 떨어져 있다는 뜻일 수밖에 없으며, 그렇다면 그대는 병들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대가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전부는, 그대가 불충에 충실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려 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불충이 바로 병이다. 병은 지푸라기 위에 세워진 집과 같다.
병은 그 자체로 꽤 견고하고 실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병의 안정성은 그 기초와 떼어 놓고 판단될 수 없다.
병이 지푸라기 위에 놓여 있다면, 문을 빗장 걸고 창문을 잠그고 걸쇠를 단단히 채울 필요가 없다. 바람이 병을 쓰러뜨릴 것이고, 비가 와서 그것을 망각 속으로 쓸어 갈 것이다.
위험과 두려움을 위해 만들어진 것 안에서 안전을 찾으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병의 약함은 병 자체에 있지 않고, 병이 서 있는 그 작은 무(無)의 틈이 지닌 연약함에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더 많은 자물쇠와 사슬과 무거운 닻으로 병을 짓누르겠는가?
그림자 위에 놓인 것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 깃털 하나의 무게에도 무너질 것 위에 그대의 집을 짓겠는가?
그대의 집은 그대 형제의 건강, 그의 행복, 그의 죄 없음,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약속한 모든 것 위에 지어져 있다. 그대가 대신 맺어 온 어떤 은밀한 약속도 그 형제의 집의 기초를 흔들지 못했다.
바람이 그 집에 불어닥치고 비가 두드릴 테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이다. 세상은 씻겨 나가겠지만 이 집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
그 집의 힘이 그 자체 안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집은 하나님의 약속, 곧 자신의 아들이 자기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는 약속 위에 놓인 안전의 방주다.
이 피난처의 안전과 그 근원 사이에 어떤 틈이 끼어들 수 있겠는가? 여기서부터, 몸은 있는 그대로 보일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그의 집으로 해방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정도보다 더도 덜도 아닌 가치로 말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목적을 지닌 채, 몸은 잠시 동안 거룩함의 집이 된다.
몸이 그대의 아버지의 뜻을 그대와 나누기 때문이다.
3) 틈이 낳는 두려움
하나님이 부재하는 시간도, 장소도, 상태도 없다.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것인 온전함 안에 틈이 있다고 생각할 방법은 없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틈이라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타협을 의미하는 일은 전혀 있을 수 없다.
그런 타협은 하나님의 사랑이 한 줌의 미움을 품을 수 있고, 하나님의 온유함이 때로 공격으로 변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인내가 때로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과 형제 사이에 틈이 있다고 지각할 때, 그대는 이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에서 기만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계하라. 하나님이 너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그대와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 틈을 남겨 두어, 달아날 필요가 있을 때 그리로 빠져나갈 수 있게 하라.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사랑은 배신자와 같다. 두려움과 미움은 결코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사랑을 두려워하며, 그러므로 그는 반드시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가 사랑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사랑하기를 두려워하고 미워하기를 좋아하며, 그래서 사랑이 두려운 것이라고, 미움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 작은 틈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의 구원이자 희망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그 틈이 반드시 가져오는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