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성령이 맞추는 부서진 그림

1) 하나로 결합된 마음

성령은 그대들 둘의 마음 안에 있으며, 하나다. 성령의 하나 됨을 그 자신으로부터 갈라놓는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몸 사이의 틈은 중요하지 않다. 성령 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것은 언제나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과의 하나 됨을 받아들인다면, 누구도 병들지 않는다. 병들고 분리된 마음이 되려는 형제의 바람은 증인이나 원인 없이는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누군가가 형제와 하나가 되기를 뜻한다면 둘 다 사라진다. 한쪽 형제는 자신이 다른 쪽 형제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꿈을 꾸지만, 그 다른 쪽 형제는 그의 꿈을 나누지 않음으로써 그들 사이의 공간을 비워 두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성령이 하나로 결합시킨 자신의 아들과 하나가 되러 온다.

성령의 기능은 하나님의 아들의 부서진 그림을 가져와 그 조각들을 다시 제자리에 맞추는 것이다. 완전히 치유된 이 거룩한 그림을, 성령은 분리된 모든 조각 하나하나에게 내민다. 조각들은 저마다 자신이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이라고 여긴다.

성령은 각 조각에게, 자기 자신이라고 고집했던 작고 부서진 하나의 조각 대신, 그 전체 그림이 나타내는 각자의 정체성을 내놓는다.

그리고 형제가 이 그림을 볼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알아볼 것이다. 그대가 형제의 악한 꿈을 나누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기적이 병과 죄의 모든 씨앗이 깨끗이 치워진 그 작은 틈 안에 놓을 그림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들이 자기 자신에게 은혜로웠기 때문이다.

아버지, 당신이 당신의 거룩한 아들의 부서진 조각들 사이에 놓인 그 작은 틈 하나하나를 닫으러 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거룩함은 완전하고 온전하게 그 조각 하나하나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하나 안에 있는 것이 그것들 모두 안에 있기 때문에 결합되어 있다. 가장 작은 모래알조차 하나님의 아들의 완성된 그림의 일부로 인식될 때 얼마나 거룩한가!

그 부서진 조각들이 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전체가 각 조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모든 측면은 다른 모든 부분과 똑같다.

그대 형제의 꿈들과 하나가 되지 말고 그와 하나가 되라. 그리고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가 되는 그곳에 아버지가 있다.

아무것도 잃지 않았음을 지각하는 자가 무엇 때문에 대체물을 찾겠는가?

건강의 단순한 행복을 받은 자가 무엇 때문에 병의 '이득'을 가지려 하겠는가? 하나님이 준 것은 상실일 수 없으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에는 아무 결과도 없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 틈 안에서 무엇을 지각하려 하는가?

병의 씨앗은 분리 안에 기쁨이 있고 분리를 포기하는 것이 희생이 되리라는 신념에서 온다. 그러나 그대가 그 틈 안에 없는 것을 보겠다고 고집하지 않을 때, 기적이 그 결과로 나타난다.

환상을 놓아 버리려는 그대의 의향이 하나님의 아들의 치유자가 요구하는 전부다. 그 치유자는 병의 씨앗이 있던 곳에 치유의 기적을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틈에는 상실이 아니라 오직 얻음만이 있을 것이다.

2) 꿈을 나누지 않음

병에 대한 느낌이란 한계에 대한 느낌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갈라져 나오고 분리되는 것에 대한 느낌이 아니라면? 그대와 그대의 형제 사이에, 그리고 이제 건강으로 보이는 것과의 사이에 지각되는 틈이 아니라면?

그래서 선함은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이고, 악함은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병은 자아를 선함으로부터 갈라놓고 악함을 안에 붙들어 두는 것이다.

하나님은 두려움의 꿈에 대한 대안이다. 그 꿈들을 나누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나눌 수 없다. 그러나 그 꿈들을 나누는 데서 자신의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자는 하나님을 나누고 있다.

다른 선택은 없다. 그대가 그것을 나누지 않는 한,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대는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이 창조할 수 있도록 자신의 뜻을 그대와 나누었기 때문에 존재한다.

증오와 악의, 씁쓸함과 죽음, 죄와 고통과 아픔과 상실의 악한 꿈들을 나누는 것이 바로 그 꿈들을 실재하게 만든다. 나누어지지 않으면, 그것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지각된다.

그 꿈들에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대가 그 꿈들에 그대의 지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는 사랑이 올 수밖에 없다. 이 둘만이 대안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나타나는 곳에서는 다른 하나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대가 나누는 것이 그대가 가진 유일한 것이 된다. 그대는 그대가 받아들이는 그것을 갖는다. 그것이 그대가 갖고 싶어 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꿈꾸는 자를 용서하고, 그가 자신이 만든 꿈이 아님을 지각한다면, 그대는 어떤 악한 꿈도 나누지 않는다. 그러므로 꿈꾸는 자는 그대의 꿈의 일부일 수 없으며, 그대의 꿈으로부터 그대들 둘 다 자유롭다.

용서는 꿈꾸는 자를 악한 꿈으로부터 분리하여, 그렇게 그를 풀어 준다. 기억하라. 그대가 악한 꿈을 나눈다면, 그대는 자신이 그대가 나누는 꿈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을 두려워하며, 그대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정체성이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의 참나(Self)를 부정하고, 그대의 창조주가 만들지 않은 낯선 땅을 걷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그대는 그대가 아닌 어떤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원수처럼 보이는 그대의 참나에게 전쟁을 걸고, 그대가 미워하는 것의 일부로서 그대의 형제를 공격할 것이다. 타협이란 없다.

그대는 그대의 참나이거나, 하나의 환상이다. 환상과 진리 사이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그대가 그대가 아닌 어떤 것일 수 있는 중간 지대는 하나의 꿈일 수밖에 없으며, 진리일 수 없다.

그대는 환상과 진리 사이의 작은 틈을, 그대의 모든 안전이 놓여 있고 그대가 만든 것이 그대의 참나를 안전하게 숨겨 주는 곳이라고 생각해 왔다. 여기에 병든 것으로 세워진 세상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몸의 눈이 지각하는 세상이다.

여기에 몸이 듣는 소리들, 몸의 귀가 듣도록 만들어진 목소리들이 있다. 그러나 몸이 지각할 수 있는 광경과 소리는 무의미하다.

몸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그것은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듣는다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몸은 판단하거나 이해하거나 알 수 없는 만큼이나 지각할 수도 없다. 그것의 눈은 멀었고, 귀는 먹었다. 그것은 생각할 수 없으며, 그래서 결과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 병들도록 창조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3) 무고한 몸

그대의 눈이 꿈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대의 귀가 환상을 증언하지 못하게 하라. 눈과 귀는 그곳에 없는 세상을 바라보고,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는 목소리들을 듣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보이고 들리고 이해될 수 있는 다른 소리와 다른 광경들이 있다. 눈과 귀는 의미 없는 감각 기관이며, 보고 들은 것을 다만 전할 뿐이기 때문이다.

듣고 보는 것은 눈과 귀가 아니라 그대다. 온갖 들쭉날쭉한 조각, 무의미한 파편과 증거 조각을 짜 맞추어, 그대가 원하는 세상에 대한 증인을 만드는 것은 그대다.

몸의 귀와 눈이 그대가 상상한 그 틈 안에서 보이는 이 무수한 조각들을 지각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귀와 눈이 자신을 만든 자에게 그의 상상이 실재라고 설득하지 못하게 하라. 창조는 실재를 입증한다.

모든 창조가 나누는 그 기능을 창조가 나누기 때문이다. 창조는 자신의 진실성을 입증하려고 짜 맞춘 작은 유리 조각들, 나무 한 조각, 실 한두 가닥 같은 것들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실재는 이런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진리를 꿈과 환상으로부터 갈라놓는 틈은 없다.

진리는 어떤 장소나 시간에도 꿈과 환상을 위한 자리를 남기지 않았다. 진리가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을 채워, 그 모두를 완전히 나눌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대와 그대의 형제 사이에 작은 틈이 있다고 믿는 그대는, 여기가 바로 그대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지각되는 세상 안에 갇힌 죄수로 있는 곳임을 보지 못한다. 그대가 보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세상을 지각하는 그 장소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틈은 안개 속에 조심스럽게 감추어져 있다. 흐릿한 그림들이 떠올라 막연하고 불확실한 형태와 변화하는 모양으로 그 틈을 덮으며, 영원히 실체 없고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 틈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놀라운 비밀도, 죽음의 뼈에서 공포가 솟아오르는 어두운 무덤도 없다.

그 작은 틈을 보라. 그러면 그대는 그대가 사랑을 알아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잃었을 때 그대 자신 안에서 보게 될 죄의 순수함과 텅 빔을 보게 될 것이다.

몸을 벌하는 자는 미쳤다. 여기서 그 작은 틈이 보이지만, 여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몸은 자신을 판단한 적도, 자신이 아닌 것이 되도록 자신을 만든 적도 없다. 그것은 고통을 기쁨으로 만들려 하지 않으며, 흙 속에서 지속되는 쾌락을 찾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대에게 말해 주지 않으며, 자신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몸은 희생시키지 않는다. 의지도 선호도 의심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경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희생될 수는 있지만, 자신을 희생자로 느낄 수는 없다.

몸은 어떤 역할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공격 없이 지시받은 대로 행한다. 볼 수 없는 것에게 시력의 책임을 지우고, 들을 수 없는 그것을 그대가 싫어하는 소리 때문에 탓하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한 관점이다.

몸은 그대가 주는 벌을 겪지 않는다.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만, 결코 그 선택을 하지 않는다.

몸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것은 다만 자신이 놓인 길을 목적 없이 따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길이 바뀐다면, 그것은 그만큼 쉽게 다른 길을 걷는다.

몸은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자신이 걷는 길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틈도 지각하지 않는다.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은 증오를 위해 쓰일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증오스러운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대가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원하는 그것을, 몸은 알지 못한다. 그대는 분리를 추구하도록 몸을 내보낸다.

몸이 분리되어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몸을, 몸이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그대가 몸으로 만든 용도 때문에 미워한다.

그대는 몸이 보고 듣는 것에서 움츠러들고, 몸의 연약함과 하찮음을 미워한다. 그리고 그대는 몸의 행위를 경멸하지만, 그대 자신의 행위는 경멸하지 않는다.

몸은 그대를 위해 보고 행동한다. 그것은 그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것이 연약하고 하찮은 것은 그대의 바람에 의한 것이다.

몸은 그대를 벌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렇게 그대에게 가져오는 한계 때문에 그대의 증오를 받을 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대는 몸을, 그대의 마음이 갖고 보고 간직하기를 그대가 원하는 그 한계들의 상징으로 만들어 왔다.

몸은 그대가 자신의 것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작은 조각과, 참으로 그대의 것인 나머지 모든 것 사이의 틈을 나타낸다. 그대는 몸을 미워하면서도, 몸이 그대 자신이며 몸 없이는 그대 자신을 잃으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