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꿈을 무효화하는 기적
1) 몸이 중심인 꿈
몸은 세상의 꿈꾸기에서 중심인물이다. 몸 없이는 꿈이 없으며, 자신이 마치 눈에 보이고 믿어져야 할 하나의 인격인 것처럼 행세하는 그 꿈 없이는 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꿈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한다. 그 꿈은 몸이 다른 몸들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고, 몸 바깥의 세상에 태어나, 잠시 살다가 죽어서, 자신처럼 죽어 가는 다른 몸들과 함께 흙 속에서 하나가 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살도록 주어진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것은 벗과 원수로 삼을 다른 몸들을 찾는다. 그것의 안전이 그것의 주된 관심사다.
그것의 안락함이 그것을 이끄는 규칙이다. 그것은 쾌락을 찾고 해로울 것들을 피하려 애쓴다.
무엇보다도, 몸은 자신의 고통과 기쁨이 서로 다르며 구별될 수 있다고 스스로 가르치려 애쓴다.
세상의 꿈꾸기는 여러 형태를 취한다. 몸이 자신이 자율적이고 실재한다는 것을 여러 방식으로 입증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이 가치 있고 실재한다고 선언하는 작은 금속 원반이나 종이 조각으로 사들인 것들을 자신에게 걸친다. 그것은 그 원반과 종이 조각을 얻으려고 무의미한 일들을 하며, 필요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무의미한 것들을 얻기 위해 그 원반과 종이 조각을 내던진다.
그것은 다른 몸들을 고용하여,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더 많은 무의미한 것들을 모으게 한다. 그것은 자신의 꿈을 나눌 수 있는 특별한 몸들을 찾아다닌다.
때로 몸은 자신보다 약한 몸들의 정복자라고 꿈꾼다. 그러나 꿈의 어떤 단계에서는, 자신을 해치고 괴롭히려는 몸들의 노예가 된다.
태어나서부터 죽기까지 몸이 겪는 연속된 모험이, 세상이 지금까지 꾼 모든 꿈의 주제다.
이 꿈의 '영웅'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며, 그 목적도 마찬가지다. 꿈 자체는 여러 형태를 취하며 그 '영웅'이 처한 매우 다양한 장소와 사건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꿈에는 다만 여러 방식으로 가르쳐지는 하나의 목적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자신이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는 이 단 하나의 교훈을 거듭, 또 거듭, 또다시 가르치려 애쓴다. 그리고 그대는 그것의 결과이며, 그것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렇게 그대는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 꿈이다. 그래서 그대는 그것이 꾸며 낸 장소와 사건들 안팎을 하릴없이 떠돈다.
이것이 몸이 하는 전부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다만 꿈속의 형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속의 형상들을 실재인 것처럼 보지 않는 한, 누가 꿈속의 형상들에 반응하겠는가?
꿈꾸는 자가 꿈속의 형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그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자신이 꿈속의 형상들을 일으키고 실재처럼 보이게 만듦으로써 그 결과를 그것들에 부여했다는 것을 그가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세상이 지금까지 꾼 모든 꿈의 결과에서 벗어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가? 어떤 꿈도 그대가 하는 일의 원인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그대의 바람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다만 꿈의 시작을 바라보기로 하자. 그대가 보는 부분은 다만 두 번째 부분일 뿐이며, 그 원인은 첫 번째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잠들어 꿈꾸는 자는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의 공격을 기억하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이 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이 세상을 실재라고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때가 참으로 있었다고 믿지 않는다.
꿈꾸는 자는 이 생각들이 하나의 환상이며, 웃어넘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다는 것을 즉시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생각들이 얼마나 심각해 보이는가!
그리고 누구도 그 생각들이 웃음과 불신으로 맞이해졌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다만 그 생각들의 원인을 곧바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때를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두려움의 이유가 아니라 웃음의 근거를 보게 될 것이다. 꿈꾸는 자가 내어 준 꿈을 그 꿈꾸는 자에게 돌려주기로 하자. 그는 그 꿈을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자신에게 행해진 것으로 지각한다.
2) 작고 미친 생각
모든 것이 하나인 영원 속으로, 작고 미친 생각 하나가 스며들었고, 하나님의 아들은 그것을 보고 웃어야 함을 잊었다. 그가 잊음으로써 그 생각은 심각한 관념이 되었고, 성취될 수 있고 실재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함께, 우리는 그 둘을 웃어넘길 수 있고, 시간이 영원에 끼어들 수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이 영원을 에워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농담이다.
이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시간이 실재하게 되는 무시간성, 자기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부, 원수가 된 분리된 형제, 몸 안에 있는 마음 — 이 모두는 자신의 시작에서 끝을 시작하고, 자신의 원인에서 끝나는 순환의 형태들이다.
그대가 보는 세상은 그대가 자신이 했다고 생각한 것을 정확히 그려 낸다. 다만 이제 그대는 자신이 한 일이 자신에게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대가 생각한 것에 대한 죄책감은 그대 자신의 바깥으로, 그대의 꿈을 대신 꾸고 그대의 생각을 대신 생각하는 죄지은 세상 위로 놓이고 있다. 그 세상은 그대 자신의 복수가 아니라 세상 자신의 복수를 가져온다.
세상은 그대를 몸 안에 좁게 가두어 둔다. 몸이 꿈속에서 저지르는 온갖 죄스러운 일들 때문에 세상은 그 몸을 벌한다. 그대는 몸이 그 악한 행위를 멈추게 할 힘이 없다.
그대가 몸을 만들지 않았고, 몸의 행동도, 목적도, 운명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다만 오래된 진리를 보여 줄 뿐이다.
그대는 그대가 다른 이들에게 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일을 다른 이들이 그대에게 한다고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들을 탓하도록 미혹되고 나면, 그대는 그들이 하는 일의 원인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죄책감이 그들에게 놓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유치한가, 죄책감을 그대 자신의 바깥으로 밀어내면서도 결코 놓아 버리지 않음으로써 그대의 순수함을 지키려는 그 심술궂은 장치는!
그대의 눈이 사방에서 그 무거운 결과를 보되 그 하찮은 원인은 보지 못할 때, 그 농담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원인 없이는 그 결과들이 참으로 심각하고 슬퍼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들은 다만 뒤따를 뿐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뒤따르지 않고 다만 농담일 뿐인 것은 바로 그것들의 원인이다.
성령은 부드러운 웃음 속에서 원인을 지각하며, 결과를 바라보지 않는다. 원인을 완전히 간과해 온 그대의 오류를, 그가 달리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그는 그대에게 온갖 끔찍한 결과 하나하나를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청한다. 그대가 그와 함께 그 어리석은 원인을 바라보고 잠시 함께 웃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대는 결과를 판단하지만, 그는 그 결과들의 원인을 판단했다. 그리고 그의 판단으로 결과들은 제거된다.
아마 그대는 눈물을 흘리며 올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라. "내 형제여,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여,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그대의 헛된 꿈을 보라."
그리고 그대는 그대의 웃음과 그대 형제의 웃음이 그의 웃음과 하나 된 채로 거룩한 순간을 떠날 것이다. 구원의 비밀은 다만 이것이다.
그대가 이것을 그대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것. 공격의 형태가 무엇이든, 이것은 여전히 참이다.
누가 원수와 공격자의 역할을 맡든, 이것은 여전히 진실이다. 그대가 느끼는 어떤 고통이나 아픔의 원인이 무엇으로 보이든, 이것은 여전히 참이다.
그대가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대는 꿈속의 형상들에 전혀 반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형상들이 아무리 증오스럽고 사악하다 할지라도, 그 꿈이 그대의 꿈임을 그대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것들은 그대에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다.
이 단 하나의 교훈을 배우면, 그 고통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그대는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성령은 이 하나의 포괄적인 구제의 교훈을 그대가 배울 때까지 되풀이할 것이다. 그대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아픔이 어떤 형태이든 마찬가지다.
그대가 그에게 어떤 상처를 가져가든, 그는 바로 이 매우 단순한 진리로 답할 것이다. 이 하나의 답이 온갖 형태의 슬픔과 고통의 원인을 없애기 때문이다.
그 형태는 그의 답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는 슬픔과 고통의 형태가 무엇이든 다만 그 모두의 단 하나의 원인만을 그대에게 가르치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기적이 "내가 이 일을 했으며, 내가 무효화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는 단순한 진술을 반영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든 형태의 고통을, 그 고통들 하나하나가 나머지와 같다는 것을 아는 성령에게 가져가라.
그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차이를 보지 않으며, 그 고통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그대에게 가르칠 것이다. 그 고통의 형태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나머지와 다른 원인을 갖지 않으며, 그것들 모두는 참으로 배운 단 하나의 교훈만으로 쉽게 무효화된다.
구원은 그대가 오직 그대 자신에게서만 숨겨 온 비밀이다. 우주는 그렇다고 선포한다.
그러나 그대는 그 증인들에게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이 그대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 증인들은 구원을 그대에게 비밀로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대는 다만 자신이 듣지 않고 보지 않기로 택했을 뿐임을 배우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인식될 때, 그대는 세상을 얼마나 다르게 지각하게 될 것인가! 그대가 그대의 죄책감에 대해 세상을 용서할 때, 그대는 그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세상의 순수함은 그대의 죄책감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대의 무죄함도 세상의 죄에 달려 있지 않다. 이것은 명백한 것이다.
오직 그대 자신에게만 숨겨진 비밀이다. 그리고 그대를 세상과 분리된 채로, 그대의 형제를 그대와 분리된 채로 유지해 온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그대는 다만 그대와 형제 둘 다 결백하거나, 둘 다 죄가 있다는 것을 배우기만 하면 된다. 불가능한 단 한 가지는 그대와 형제가 서로 다르다는 것, 즉 결백함과 죄 있음이 둘 다 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아직 배워야 할 유일한 비밀이다. 그리고 그대가 치유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닐 것이다.
3) 기억을 놓아 버림
기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하는 일이라고는 오직 무효화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그것은 이미 행해진 것에 대한 방해를 없앤다. 그것은 더하지 않고, 다만 없앨 뿐이다.
그리고 기적이 없애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것이지만, 기억 속에 간직됨으로써 마치 즉각적인 결과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이 세상을 만든 생각들은, 그 생각들을 생각하고 잠시 사랑했던 그 마음 안에 더 이상 있지 않다.
기적은 다만 과거가 사라졌음을 보여 줄 뿐이며, 참으로 사라진 것에는 결과가 없다. 원인을 기억하는 것은 다만 그것이 현존한다는 환상을 낳을 수 있을 뿐, 결과를 낳지는 못한다.
죄책감의 모든 결과는 더 이상 여기에 없다. 죄책감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라지면서 그 결과들도 함께 사라져, 원인 없이 남겨졌다. 죄책감의 결과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왜 그것을 기억 속에 붙들고 있겠는가?
기억하기는 지각만큼이나 선별적이다. 기억이 지각의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과거를, 마치 지금 일어나고 있고 여전히 보이는 것처럼 지각하는 것이다. 기억은, 지각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대의 창조 안에서 준 것을 대신하도록 그대가 만들어 낸 기술이다.
그리고 그대가 만든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은 다른 목적을 섬기고 다른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되도록 쓰일 수 있다. 그대가 그러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해치는 대신 치유하는 데 쓰일 수 있다. 치유를 위해 쓰이는 그 무엇도 무언가를 하려는 노력을 나타내지 않는다.
치유에 쓰이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어떤 것을 요구하는 필요가 그대에게 없다는 인식이다. 그것은 진리를 방해하는 데 쓰이지 않는, 선별하지 않는 기억이다. 성령이 치유를 위해 쓸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들이 만들어진 내용과 목적 없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것들은 다만 적용되지 않은 기술일 뿐이다. 그것들은 자신이 쓰이기를 기다린다. 그것들에는 헌신도 목표도 없다. 성령은 참으로 기억을 쓸 수 있다.
하나님 자신이 기억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다만 현재 상태에 대한 기억일 뿐이다.
그대는 기억이 오직 과거의 것만을 담고 있다고 믿는 데 너무나 오래 길들여져서, 그것이 지금을 기억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기가 어렵다. 세상이 기억하기에 부과하는 한계는, 그대가 세상이 그대 자신에게 부과하도록 내버려 둔 그 한계만큼이나 광대하다.
기억을 과거에 연결하는 고리란 없다. 그대가 그 고리가 그곳에 있기를 바란다면, 그 고리는 그곳에 있게 된다. 그러나 그 고리를 만든 것은 오직 그대의 바람뿐이며, 죄책감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의 한 부분에 그것을 붙들어 놓은 것도 오직 그대뿐이다.
성령의 기억 사용은 시간과 전혀 무관하다. 그는 기억을 과거를 붙들어 두는 수단으로 쓰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과거를 놓아 버리는 방법으로 쓴다.
기억은 자신이 받는 메시지를 담고,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행한다. 그것은 메시지를 쓰지도, 메시지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정하지도 않는다. 몸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 자체로는 목적이 없다.
그리고 만약 기억이 오래된 증오를 소중히 간직하는 데 쓰이는 것처럼 보이고, 그대가 간직해 온 부당함과 상처의 그림을 그대에게 준다면, 이것은 그대가 기억의 메시지를 그렇게 되기를 요청한 것이며, 기억은 바로 그렇게 되어 있을 뿐이다.
몸의 모든 과거의 역사가 기억의 금고에 맡겨져 그 안에 감추어져 있다. 과거를 살아 있게, 현재를 죽어 있게 유지하려고 만들어진 온갖 기이한 연상들이 그 안에 저장되어 있다. 그것들은 그대에게 다시 불려 와 다시 살아나라는 그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그 기이한 연상들의 결과는 그것들의 원인을 앗아 간 시간 때문에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은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또 다른 국면일 뿐이다.
시간은 그대가 그대 자신에 관한 진리를 계속 감추려고 쓰는 다른 모든 속성과 손잡고 작용한다. 시간은 앗아 가지도, 되돌려 놓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대는 시간을 기이하게 쓴다. 마치 과거가 현재를 일으켰고, 현재는 그 원인이 사라졌기에 어떤 변화도 불가능한 결과일 뿐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변화에는 지속될 원인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원인이 과거에 있다면, 현재에는 어떤 변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대가 기억을 쓰는 방식대로라면, 오직 과거만이 기억 속에 담기며, 그래서 기억은 과거를 지금에 맞세워 붙들어 두는 방법이다. 그대 자신에게 가르친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말라. 그대는 잘못 가르침받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교훈을 배우고 간직할 수 있는데, 무의미한 교훈을 마음에 담아 둘 자가 누구겠는가? 증오의 오래된 기억들이 떠오를 때, 그 원인이 사라졌음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그대는 그 기억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대가 지금 그 기억들에 부여하려는 원인이, 그 기억들을 그것들이었던 것 또는 그렇게 보였던 것으로 만든 그 원인이 되지 않게 하라. 그 원인이 사라졌음을 기뻐하라.
그 원인이 바로 그대가 용서받을 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지금 받아들여진 원인의 새로운 결과들을, 여기 있는 그 결말들을 보라.
그 결과들은 그 사랑스러움으로 그대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 결과들이 가져오는 오래되었으나 새로운 관념들은, 그대의 지각이 보는 기억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을 만큼 오래된 한 원인의 행복한 결과일 것이다. 이것이 그대가 잊으려 할 때 성령이 그대를 위해 기억해 온 그 원인이다.
그 원인은 과거가 아니다. 성령이 그 원인이 잊히지 않도록 해 왔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결코 바뀐 적이 없다.
성령이 그 원인을 그대의 마음 안에 언제나 안전하게 간직해 왔기 때문이다. 그 원인의 결과들은 참으로 새로워 보일 것이다. 그대가 자신이 그 원인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그대의 마음에서 결코 사라진 적이 없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에게 잊히는 것은 그대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기억하는 것은 결코 있었던 적이 없다. 그 기억은 그대가 원인과 혼동한 무원인성에서 나왔다. 그대가 원인 없는 것이었고 결코 결과일 수 없었던 그 결말들을 기억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기억은 다만 웃음을 받을 만할 뿐이다. 기적은 영원히 현존하며 시간과 방해에 완전히 닿지 않은 한 원인을 그대에게 일깨운다.
그 원인은 있는 그대로에서 결코 바뀐 적이 없다. 그리고 그대는 그 원인의 결과이며, 그 원인 자체만큼이나 변함없고 완전하다. 그 원인의 기억은 과거에 있지 않으며, 미래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 원인은 기적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기적들은 다만 그 원인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대에게 일깨울 뿐이다. 그대가 그대의 죄를 이유로 그 원인을 용서할 때, 그 원인은 더 이상 부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 자신의 창조주에게 심판을 내리려 해 온 그대는, 창조주가 자신의 아들에게 심판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대는 그에게서 그 결과들을 부정하려 하지만, 그 결과들은 결코 부정된 적이 없다. 원인 없고 그의 뜻에 반하는 것을 이유로 그의 아들이 단죄될 수 있었던 때란 없었다.
그대의 기억하기가 증언하려는 것은 다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하나님은 그대가 두려워하는 그 일을 하지 않았다. 그대 역시 그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대의 순수함은 잃어버려진 적이 없다. 그대는 치유받기 위해 어떤 치유도 필요하지 않다.
고요함 속에서, 기적 안에서 하나의 교훈을 보라. 원인이 자신의 결과를 갖도록 허용하고 방해할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교훈이다. 기적은 한순간 멈추어 고요해진 마음속으로 조용히 들어온다.
기적은 그 고요한 시간으로부터, 그리고 그때 고요히 치유받은 마음으로부터, 자신의 고요함을 나누기 위해 다른 마음들에게로 부드럽게 뻗어 간다. 그리고 그 마음들은, 모든 마음이 존재하게 만든 그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적의 빛나는 확장을 막지 않는 데 함께할 것이다.
나눔에서 태어나기에, 시간의 어떤 멈춤도 기적을 지체시킬 수 없다. 기적은 하나님의 기억이 그 마음들에게 돌아올 때, 모든 고요하지 못한 마음들에게 서둘러 가서 한순간의 고요함을 가져다준다. 그들 자신의 기억하기는 이제 고요하며, 그 기억하기를 대신하러 온 하나님의 기억은 그 후에 완전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주어진 성령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요한 순간 하나하나에 감사를 드린다. 그 순간 안에서 하나님의 기억은 자신이 간직해 온 모든 보물을 그 보물들이 간직되어 온 대상인 하나님의 아들에게 내어놓도록 허락받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 보물들이 주어진 그 대상에게 그 보물들을 얼마나 기쁘게 내어놓는가! 그리고 그의 창조주는 그의 감사를 함께 나눈다.
하나님이 자신의 결과들을 빼앗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이 받아들이는 그 순간의 침묵은 영원과 하나님을 맞아들이며, 이 둘이 머물고자 하는 곳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 순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자신을 두렵게 만들 어떤 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을 밀어낼 두려움이 없는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기억은 얼마나 순식간에 떠오르는가! 그대 자신의 기억하기는 사라졌다. 현재의 평화로 기쁘게 깨어나는 길을 막을 그 두려운 형상을 붙들어 둘 과거란 없다.
영원의 나팔 소리가 고요함 속에 울려 퍼지지만, 그 고요함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기억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이 잊히고 무효화되게 하려고 만들어진 그 원인이다. 그 고요함은, 그대의 기억하기가 현재와 과거를 갈라놓으려고 그 사이에 끼어들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기억하는 사랑의 부드러운 소리로 말한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은 마침내 현재의 원인과 그 자애로운 결과들을 자각한다. 이제 그는 자신이 만든 것이 원인 없는 것이며 아무 결과도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을 봄으로써,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할 필요가 결코 없었고, 결코 하지도 않았음을 이해한다.
그의 원인은 곧 그 원인의 결과들이다. 그 원인 외에 다른 과거나 미래를 낳을 수 있는 다른 원인은 결코 없었다.
그 원인의 결과들은 변함없이 영원하며, 두려움을 넘어서고, 죄의 세상을 완전히 지나서 있다. 원인 없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무엇이 상실되었단 말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기억이 상실의 자리를 대신하러 왔을 때, 희생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환상과 실재 사이의 그 작은 틈을 닫는 데, 하나님의 기억이 그 틈을 가로질러 흐르게 하여 한순간이면 건너기에 충분한 다리로 만드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자신으로써 그 틈을 닫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억은 지나쳐 가지 않았다. 그 기억은 아들을 기슭에 영원히 좌초된 채로 남겨 두지 않았다. 그 기슭에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또 다른 기슭이 언뜻 보일 뿐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대가 들어 올려져 부드럽게 건네지기를 뜻한다. 그는 다리를 놓았으며, 자신의 아들을 그 위로 건네줄 이도 바로 그다.
그가 뜻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말라. 또한 그대를 위한 그 뜻에서 그대가 배제될까 두려워하지도 말라.
4) 뒤바뀜의 바로잡음
원인 없이는 결과가 있을 수 없고, 그러나 결과 없이는 원인도 없다. 원인은 그 결과로 인해 원인이 된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로 인해 아버지가 된다.
결과는 자신의 원인을 창조하지 않지만, 그 원인이 됨을 성립시킨다. 그렇게 아들은 자신의 창조주에게 아버지 됨을 주고, 자신이 창조주에게 준 그 선물을 받는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는 또한 하나님이 그를 창조한 것처럼 창조하는 아버지이기도 할 수밖에 없다.
창조의 원에는 끝이 없다. 그것의 시작과 끝은 같다. 그러나 그 자체 안에 시작도 끝도 없는 모든 창조의 우주를 담고 있다.
아버지 됨은 창조다. 사랑은 확장되어야 한다. 순수함은 가두어지지 않는다. 장벽도 한계도 없이 영원히 담기지 않는 것이 순수한 것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순수함은 몸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한계가 있는 곳에서는 순수함을 찾을 수 없다.
몸은 그 자체만큼이나 한계가 없는 그 결과들에 의해 치유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치유는 마음이 몸 안에 있지 않고, 마음의 순수함이 몸과는 전혀 별개이며, 그곳이 바로 모든 치유가 있는 곳임을 알아보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치유는 어디에 있는가? 오직 치유의 원인이 자신의 결과를 부여받는 곳에만 있다. 병은 무원인성에 결과를 부여하여 그것을 원인으로 만들려는 무의미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병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자신의 원인으로 만들려 시도하며, 자신이 자신의 아버지의 아들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이 불가능한 바람 때문에, 그는 자신이 사랑의 결과임을 믿지 않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따라 자신이 원인일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치유의 원인이 모든 것의 유일한 원인이다. 그 원인에는 다만 하나의 결과만이 있다. 그리고 그 인식 안에서, 무원인성에는 어떤 결과도 주어지지 않으며 아무 결과도 보이지 않는다.
몸 안의 마음과, 저마다 분리된 마음을 지닌 다른 몸들의 세상이 그대의 '창조물'이다. 그대는 그 '다른' 마음이며, 자신과 다른 결과로 창조한다. 그리고 그 '다른' 마음들의 '아버지'로서, 그대는 그 '다른' 마음들과 같을 수밖에 없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잠들게 하고, 자신에게 낯선 존재이며 다른 누군가의 꿈의 일부에 불과한 그런 꿈을 꾼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적은 그대를 깨우지 않고, 다만 꿈꾸는 자가 누구인지를 그대에게 보여 줄 뿐이다. 그것은 그대가 여전히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그대의 꿈꾸기의 목적에 따라 꿈들 사이의 선택이 있음을 가르친다.
그대는 치유의 꿈을 원하는가, 아니면 죽음의 꿈을 원하는가? 꿈은 그대가 자신에게 보이기를 원했던 것을 그려 낸다는 점에서 기억과 같다. 문이 열린 빈 창고가 그대의 기억과 꿈의 온갖 조각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꿈꾸는 자라면, 그대는 적어도 이만큼은 지각한다. 곧 그대가 그 꿈을 일으켰으며, 다른 꿈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꿈의 내용이 바뀌려면, 그대가 좋아하지 않는 그 꿈꾸기를 꿈꾼 것이 바로 그대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 꿈꾸기는 다만 그대가 일으킨 결과일 뿐이며, 그대는 이 결과의 원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살인과 공격의 꿈속에서 그대는 죽어 가는 몸 안에서 살해당하는 희생자다. 그러나 용서하는 꿈속에서는 누구도 희생자나 고통받는 자가 되라고 요구받지 않는다.
이것들이 기적이 그대 자신의 꿈과 맞바꾸는 행복한 꿈들이다. 기적은 그대에게 또 다른 꿈을 만들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대가 이것과 맞바꾸려는 그 꿈을 자신이 만들었음을 보라고 요구할 뿐이다.
이 세상은 원인이 없다. 세상 안에서 누군가가 꾼 모든 꿈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어떤 계획도 가능하지 않으며, 찾아내고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설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원인이 없는 것에서 그 밖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원인이 없다면, 목적도 없다. 그대는 꿈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그것에 실재하는 결과를 부여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꿈에 실재하는 결과를 부여하는 것은 그 원인을 바꾸는 셈일 것이다. 그대가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꿈을 꾸는 자는 깨어 있지 않지만, 자신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병들었거나 건강한, 우울하거나 행복한 존재로 보는 환상을 보지만, 그 환상에는 확실한 결과를 보장하는 안정된 원인이 없다.
기적은 그대가 하나의 꿈을 꾸고 있으며 그 내용이 참이 아님을 확립한다. 이것은 환상을 다루는 데 중대한 걸음이다.
자신이 환상들을 지어냈음을 지각하면, 누구도 환상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두려움은, 그 사람이 자신이 꿈속의 형상이 아니라 꿈의 저자였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꿈꾸는 자는 자신이 형제에게 주었다고 꿈꾸는 그 결말을 자기 자신에게 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의 바람이 이루어졌음을 그에게 보여 주려고 꿈이 짜 맞추어 그에게 내놓은 것이다.
그렇게 꿈꾸는 자는 자기 자신의 공격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공격을 다른 이의 손에 의한 것으로 본다. 희생자로서, 그는 그 공격의 결과로 고통받지만 그 원인 때문은 아니다.
꿈꾸는 자는 자신의 공격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자신이 일으킨 것에 대해 결백하다. 기적은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그에게 보여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꿈꾸는 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공격을 원인으로 만들어 줄 결말이 없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그 원인은 결코 있었던 적이 없다.
분리는, 아버지가 자신의 결과들을 빼앗기고 더 이상 그 결과들의 창조주가 아니게 되어 그 결과들을 지킬 힘이 없었다는 꿈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꿈속에서, 꿈꾸는 자는 자기 자신을 만들었다.
그러나 꿈꾸는 자가 만든 것은 그에게 등을 돌려, 꿈꾸는 자가 그랬듯이 자신의 창조주의 역할을 떠맡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창조주를 미워했듯이, 꿈속의 형상들도 그를 미워해 왔다.
꿈꾸는 자의 몸은 그 형상들의 노예이며, 그들은 그가 몸에 부여한 동기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았기에 몸을 학대한다. 그리고 몸이 그들에게 내줄 수 있는 복수 때문에 몸을 미워한다.
몸에 대한 그 형상들의 이 복수가 바로, 꿈꾸는 자가 그 꿈의 창조주일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와 원인은 먼저 갈라진 다음 뒤바뀌어, 결과가 원인이 되고 원인이 결과가 된다. 이 뒤바뀜이 분리의 마지막 단계이며,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구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마지막 단계는 그 이전에 있었던 것의 결과이면서, 원인으로 나타난다. 기적은 원인이 되는 그 기능을 결과가 아니라 원인에게 되돌려 주는 첫걸음이다.
이 혼동이 꿈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며, 혼동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깨어남이 두려운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깨어나라는 부름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 깨어남이 두려움으로의 부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그대에게 배우라고 청하는 모든 교훈과 마찬가지로, 기적은 분명하다. 기적은 성령이 그대에게 배우게 하려는 것을 보여 주며, 그 결과가 그대가 원하는 것임을 그대에게 보여 준다.
성령의 용서하는 꿈들 안에서 그대의 꿈의 결과들은 무효화되고, 미워하던 원수들은 자비로운 뜻을 지닌 벗으로 지각된다. 그들의 적개심은 이제 원인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 원수들이 그 적개심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들의 증오를 만든 자의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증오에 아무 결과도 없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는 이만큼은 그 꿈에서 자유로워졌다. 세상은 중립적이며, 여전히 분리된 것들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몸들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 몸들은 병들어 있지 않다. 기적은 두려움의 원인을 그것을 만든 그대에게 되돌려 준다.
그러나 기적은 또한, 그 원인이 아무 결과도 없으므로 원인이 아니라는 것도 보여 준다. 원인이 됨의 기능은 결과를 갖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가 사라진 곳에는 원인도 없다. 그렇게 몸은 기적에 의해 치유된다.
기적이 마음이 병을 만들었고, 마음이 자신이 만든 것의 희생자, 즉 결과가 되도록 몸을 이용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훈의 절반은 전체를 가르치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다만 몸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것만 배운다면 기적은 쓸모없다. 이 몸의 치유는 기적이 가르치려고 보내진 교훈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적의 교훈은 이것이다. 몸이 병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마음이 병들었다는 것이며, 그 죄책감을 투사하는 것은 아무것도 일으키지 않았고 아무 결과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기적으로 가득하다. 기적들은 고통과 아픔, 죄와 죄책감의 모든 꿈 곁에서 빛나는 침묵 속에 서 있다.
기적들은 그 꿈의 대안이며, 꿈을 지어내는 데 능동적인 역할을 부인하기보다는 꿈꾸는 자가 되기로 하는 선택이다. 그것들은 병의 결말을 그 원인에게로 되돌리는 것의 기쁜 결과들이다.
몸은 마음이 "이것은 나에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풀려난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은 대신 다른 선택을 할 자유를 얻는다.
여기서 시작하여, 구원은 분리로 내려가는 하나하나의 걸음의 경로를 바꾸어 나갈 것이다. 모든 단계가 되짚어지고, 그 사다리가 사라지고, 세상의 모든 꿈꾸기가 무효화될 때까지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구원 너머에서 완전한 확실함 속에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대는 분리가 그대를 내려가게 이끈 그 사다리를 이제 막 오르기 시작해, 자신의 처음이자 불확실한 걸음이 이끌리도록 겨우 허락하기 시작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대의 관심사는 오직 기적뿐이다. 여기가 우리가 시작해야 할 곳이다. 그리고 일단 시작하고 나면, 깨어남으로 올라가고 꿈을 끝내는 그 길은 평온하고 단순하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대가 기적을 받아들일 때, 그대는 이미 꾸어지고 있는 꿈에 그대의 두려움의 꿈을 더하지 않는다. 지지 없이는, 이미 꾸어지고 있는 그 꿈은 아무 결과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그 꿈을 강화하는 것이 바로 그대의 지지이기 때문이다.
5) 하나 되는 마음들
어떤 마음도, 두 마음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데 다른 마음이 동의하기 전까지는 병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병드는 것은 그 마음들의 공동 결정이다.
그대가 동의를 보류하고 병을 실재하게 만드는 데 그대가 하는 역할을 받아들인다면, 다른 마음은 자신의 죄책감을 투사할 수 없다. 자신을 그대와 분리되고 떨어진 것으로 지각하도록 놔두는 그대의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몸은 그대들의 두 마음 모두에게 서로 분리된 관점에서 병든 것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형제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은 병의 원인과 지각된 결과를 막는다. 병이 분리되는 마음들에서 오듯이, 치유는 하나가 되는 마음들의 결과다.
기적은 다만 마음들이 하나로 결합되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이것이 뒤바뀌어, 분리된 마음들이 서로 분리되어 결합할 수 없는 몸들로 보인다.
그대의 형제가 병들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
그가 병든다면, 그대는 그의 꿈을 그와 함께 나눔으로써 그를 그 자신의 꿈에 버려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병의 원인이 있는 곳에서 병을 보지 못했고, 그대는 병이 자라난 곳인 그대들 사이의 틈을 간과했다.
그렇게 그대들은 병 안에서 결합되어 그 작은 틈을 치유되지 않은 채로 보존한다. 그 틈 안에서 병은 조심스럽게 보호되고 소중히 여겨지며 굳은 신념으로 떠받쳐진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그 작은 틈에 다리를 놓으러 오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환상으로 하나님의 오심에 맞서 싸우지 말라. 꿈속에서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그 무엇보다도 그대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 오심이기 때문이다.
꿈꾸기의 끝은 두려움의 끝이며, 사랑은 결코 꿈들의 세상 안에 있었던 적이 없다. 그 틈은 작다.
그러나 그 틈은 역병의 씨앗과 온갖 형태의 병을 담고 있다. 그것이 하나가 되지 않고 떨어져 있으려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것은 병의 원인이 아닌 것에 원인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틈의 목적이 병이 지닌 원인의 전부다. 그 틈은 그대를, 마치 고통의 원인인 것처럼 그대가 보는 몸 안에 분리된 채로 두려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고통의 원인은 분리이지, 다만 그 결과일 뿐인 몸이 아니다. 그러나 분리는 다만 빈 공간일 뿐이다. 아무것도 감싸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배가 지나가면서 만든 물결들 사이의 빈자리만큼이나 실체가 없다.
그리고 물이 그 틈을 닫으려고 밀려들고 물결들이 합쳐지며 덮듯이, 그 틈도 그만큼이나 빠르게 덮인다. 물결들이 합쳐져, 잠시 그것들을 분리된 채로 두는 것처럼 보였던 그 공간을 덮어 버렸을 때, 물결들 사이의 그 틈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들이 하나가 되어, 병의 씨앗이 자라나는 것처럼 보였던 그 작은 틈을 닫았을 때, 병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다리를 놓지만, 오직 기적이 깨끗하고 비워 둔 그 공간에만 놓는다. 병의 씨앗과 죄책감의 수치심에는 하나님이 다리를 놓을 수 없다.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낯선 의지를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낯선 의지의 결과들이 사라지게 하고, 그것들을 그대 자신을 위해 간직하려고 조급한 손으로 붙들지 말라. 기적은 그것들을 모두 옆으로 쓸어 내어, 자신의 아들이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이어 줄 다리를 놓으러 오려는 하나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
그러니 은빛 기적들과 금빛 행복의 꿈들을, 그대가 세상의 창고 안에 간직하려는 모든 보물로 여기라. 그 문은 도둑들이 아니라, 조약돌의 반짝임을 금으로 착각하고 은처럼 빛나는 눈 더미를 저장해 온 그대의 굶주린 형제들에게 열려 있다.
열린 문 뒤에 그 형제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이란, 영원을 갈가리 찢어 날과 달과 해로 쪼개는 것으로 지각되는 작은 틈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리고 세상 안에 사는 그대는, 저마다 분리되고 불확실한 흙 조각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아들의 산산이 부서진 그림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이여, 다만 그대의 세상이 기적들로 부드럽게 밝혀지게 하라. 그리고 그 작은 틈이 그대와 그대 형제 사이에 서 있는 것으로 보였던 그곳에서, 그와 하나가 되라.
그러면 이제 병은 원인 없이 보일 것이다. 치유의 꿈은 용서 안에 있으며, 그대가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음을 부드럽게 보여 준다.
기적은 결코 없었던 것을 그대에게 증언할 죄책감의 증거를 전혀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창고 안에 기적은 그대의 아버지와 그대의 참나(Self)를 맞아들일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
더 이상 굶주리지 않으려 하고 그곳에 차려진 풍성한 잔치를 누리려는 모든 이가 들어올 수 있도록, 그 문은 열려 있다. 그리고 들어온 이들은 기적이 그대에게로 오라고 청한, 그대가 초대한 손님들을 만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세상의 꿈꾸기가 보여 준 잔치들과는 다른 잔치다. 여기서는 누구든 더 많이 받을수록, 나머지 모두가 나눌 몫도 더 많이 남기 때문이다.
그 손님들은 무한한 공급을 함께 가져왔다. 그리고 누구도 빼앗기지 않으며 빼앗을 수도 없다.
여기에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 앞에 차려 놓고 그와 똑같이 나누는 잔치가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나눔 안에는 풍성함이 흔들리고 옅어지는 어떤 틈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는 흉년이 들어올 수 없다. 끝이 없는 이 잔치는 시간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 그대의 손님들을 그대로부터 떼어 놓는 것처럼 보였던 그 공간에 식탁을 차렸기 때문이다.
6) 나누지 않는 속죄
그대 자신을 위해 속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누군가의 병과 죽음의 꿈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대가 형제의 분리하려는 바람을 나누지 않고, 그가 자기 자신에게 환상을 돌리도록 내버려 둔다는 뜻이다.
또한 그대는 그 환상들이 대신 그대에게 돌려지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게 그것들에는 아무 결과도 없다.
그리고 그대는 고통의 꿈에서 자유롭다. 그대가 형제를 그대로 있게 두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형제를 돕지 않는 한, 그대는 그와 함께 고통받을 것이다. 그 고통이 그대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의 고통의 꿈속의 형상이 되고, 그도 그대의 꿈속의 형상이 된다. 그렇게 그대와 그대의 형제 둘 다 환상이 되어, 정체성을 잃는다.
그대는 누구의 악한 꿈을 나누느냐에 따라 누구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대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그대가 악하다는 것뿐이다.
그대가 두려움의 꿈을 나누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여기서 확실함을 찾는 방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