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꿈꾸는 자의 선택

1) 벌받는 꿈의 논리

고통은 세상이 그대에게 입힌 온갖 상처를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 구원에 대한 세상의 미친 버전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는 마치 벌받는 꿈과 같다. 그 꿈속에서 꿈꾸는 자는 자신에 대한 공격을 불러온 것이 무엇인지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이 아닌 어떤 것에게 부당하게 공격받는다고 본다. 꿈꾸는 자는 이 '다른 어떤 것', 즉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의 희생자이며, 그것에 대해 책임질 이유가 전혀 없다.

꿈꾸는 자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다만 자신에게 무엇이 행해지는지만 알기에 결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그의 공격은 여전히 분명하다.

고통을 짊어지는 것이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꾸는 자는 벗어날 수 없다. 그 근원이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는 벗어날 수 있음을 보이고 있다. 필요한 것은 오직, 그대가 그 문제를 그대가 꾸며 놓은 방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뿐이다. 이 문제는 매우 단순하지만, 풀리지 않은 채로 남겨 두려고 만들어진 두꺼운 복잡함의 구름에 가려져 왔다. 이런 문제를 풀 다른 방법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 구름이 없다면 문제는 본래의 단순함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그 선택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제가 분명히 보이면 터무니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문제가 자신을 해치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매우 쉽게 없앨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 문제가 풀리도록 마음먹는 데 누구도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세상이 만들어지고, 그 위에 세워지며, 유지되는 그 '논리'는 다만 이것이다.

'그대가 내가 하는 일의 원인이다. 그대의 존재가 나의 분노를 정당화하며, 그대는 나와 별개로 존재하고 생각한다. 그대가 공격하는 동안 나는 결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겪는 고통은 그대의 공격이다.' 이 '논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자라면 누구나 그 논리가 앞뒤가 맞지 않고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보게 된다.

그러나 그 '논리'는 그럴듯해 보인다. 마치 세상이 그대를 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인에 관한 한 뻔한 것을 넘어설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참으로 넘어설 필요가 있다.

2) 단죄 너머의 원인

세상이 단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세상 안에 있는 이들이 함께 나누고 있는 필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공통된 필요를 인식하지 못한다. 각자는 자신이 자기 역할을 하면 세상의 단죄가 자신에게 놓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각자는 세상의 구제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라고 여긴다. 복수에는 초점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수하는 자의 칼은 자기 자신의 손에 들려, 자기 자신을 겨누게 된다.

그리고 복수하는 자가 자신이 택하지 않은 공격의 희생자가 되려 한다면, 그는 그 칼을 다른 이의 손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복수하는 자는 자신이 쥐고 있지 않은 칼이 자기 자신에게 입힌 상처로 고통받는다. 이것이 그가 보는 세상의 목적이다.

이렇게 보면, 세상은 이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그 수단은 목적을 증언할 뿐, 그 자체로 원인은 아니다. 원인을 그 결과와 떼어 놓고 본다고 해서 원인이 바뀌지도 않는다.

원인이 결과를 낳으며, 그 결과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원인을 증언한다. 그러니 결과 너머를 보라. 고통과 죄의 원인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

그리고 고통과 죄에 머물러 있지 말라. 그것들은 다만 그 원인의 반영일 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단죄에서 구해 내는 데 그대가 맡은 역할은 바로 그대 자신이 벗어나는 것이다.

악의 세상에 대한 증인은 세상 안에서 악의 필요를 본 것을 위해서가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리고 여기가 그대의 죄책감이 처음으로 목격된 곳이다. 그대의 형제로부터 분리된 그곳에서 그대 자신에 대한 첫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상이 증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다른 원인을 찾지 말고, 그 원인을 무효화하기 위해 그 강력한 증인의 무리 가운데서 찾지도 말라. 그들은 그대의 충성을 요구하는 그것의 주장을 뒷받침할 뿐이다.

진리를 감추는 것은 그대가 진리를 찾으려고 바라볼 곳이 아니다. 죄의 증인들은 모두 하나의 작은 공간 안에 서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대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대 관점의 원인을 찾는다.

세상은 그대가 청하지도 부르지도 않은 온갖 것을 그대에게 떠안기는 것처럼 보였다. 한때 그대는 그 모든 것의 원인이 참으로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신했다. 그대에게 고통과 아픔을 가져온다고 지각한 그 수많은 원인 가운데, 그대의 죄책감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 수많은 원인들을 어떤 식으로도 스스로 청한 적이 없었다.

이것이 모든 환상이 생겨난 방식이다. 그것들을 만드는 자는 자신이 그것들을 만들고 있다고 보지 않으며, 그것들의 실재성은 그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것들에 어떤 원인이 있든 그 원인은 그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며, 그가 보는 것은 그의 마음과 분리되어 있다.

꿈꾸는 자는 자신의 꿈의 실재성을 의심할 수 없다. 그가 그것들을 만들고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자신이 하는 역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대신 꾸어 주는 꿈에서는 누구도 깨어날 수 없다. 꿈꾸는 자는 다른 누군가의 꿈의 일부가 된다. 그는 자신이 만들지 않은 꿈에서 깨어나기를 선택할 수 없다.

무력하게 서서, 꿈꾸는 자는 분리된 마음이 품고 소중히 여긴 꿈의 희생자가 된다. 이 마음은 참으로 꿈꾸는 자를 개의치 않을 수밖에 없다. 날씨나 하루의 시각이 그의 평화와 행복을 신경 쓰지 않듯이 말이다.

분리된 마음은 꿈꾸는 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꿈을 만족시키는 어떤 역할에든 원하는 대로 그를 배역으로 던져 넣는다. 그의 가치는 너무나 하찮아서, 그는 다만 세상의 헛된 꿈속에서 지어진 무의미한 줄거리에 따라 오르내리며 춤추는 그림자일 뿐이다.

3) 생명과 죽음 사이

이것이 그대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그림이다. 그대가 그대 꿈의 꿈꾸는 자가 아니라면, 그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며, 원인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가 고통의 원인이 그대의 마음 안에 있음을 부정한다면 택하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이 그대 마음 안에 있음을 참으로 기뻐하라. 원인이 그곳에 있기에 그대는 시간 속에서 그대 운명을 결정하는 유일한 자가 된다.

잠든 죽음과 악한 꿈, 아니면 행복한 깨어남과 생명의 기쁨 가운데 선택하는 것은 그대의 역할이다. 생명이나 죽음, 깨어남이나 잠, 평화나 전쟁, 그대의 꿈이나 그대의 실재 말고 그대가 무엇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겠는가?

죽음을 평화라고 생각할 위험이 있다. 세상이 몸을 하나님이 창조한 참나(Self)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결코 자신의 반대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죽음은 평화의 반대다. 그것이 생명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은 평화다. 깨어나 죽음에 관한 모든 생각을 잊으라.

그러면 그대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참으로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대는 그대가 둘 중에서 고르는 것들의 원인을 있는 그대로, 있는 곳 그대로 보아야 한다.

두 상태 중 하나만 분명히 인식된다면, 그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만이 자신에게 달린 것으로 보일 때, 누가 결과들 사이에서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겠는가?

4) 부드러운 꿈으로

정직한 선택은 결코, 그대 안의 진리에 대해 서로 다른 꿈을 지닌 하찮은 그대와 거대한 세상 사이에 나뉜 선택으로 지각될 수 없다. 실재와 꿈 사이의 간극은 세상의 꿈꾸기와 그대가 은밀히 꾸는 꿈 사이에 있지 않다.

세상의 꿈꾸기와 그대의 은밀한 꿈은 하나다. 세상의 꿈꾸기는 그대가 내어 준 그대 자신의 꿈의 일부에 불과하며, 그대는 그 일부를 마치 자신의 시작이자 끝인 것처럼 보았다.

그러나 세상의 꿈꾸기는 그대의 은밀한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대는 그 은밀한 꿈을 지각하지 못하지만, 그 은밀한 꿈이 그대가 보고 실재라고 의심치 않는 그 부분을 일으켰다. 그대가 잠들어 누운 채, 그 원인이 실재한다고 은밀히 꿈꾸는 동안, 어떻게 그 부분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대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형제, 오래된 원수, 밤에 그대를 뒤쫓으며 그대의 죽음을 획책하되 죽음이 더디고 느리게 오도록 꾀하는 살인자 — 그대는 이런 꿈을 꾼다. 그러나 이 꿈 밑에는 또 다른 꿈이 있으니, 그 꿈에서는 그대가 살인자가 되고, 은밀한 원수가 되며, 그대 형제와 세상을 똑같이 약탈하고 파괴하는 자가 된다.

여기에 고통의 원인, 곧 그대의 작은 꿈들과 그대의 실재 사이의 공간이 있다. 그대가 보지도 못하는 그 작은 틈, 환상과 두려움이 태어나는 곳, 공포와 오래된 증오의 때, 재앙의 순간 — 이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여기에 비실재의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무효화될 곳도 바로 여기다.

그대가 이 꿈들의 세상을 꾸는 자다. 이 꿈들의 세상에는 다른 원인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두렵게 한 것은 한낱 헛된 꿈일 뿐,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었다. 그 꿈이 아들로 하여금 자신이 순수함을 잃었고, 아버지를 부정했으며, 자기 자신에게 전쟁을 걸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꿈은 너무나 무섭고 너무나 실재처럼 보여서, 그는 공포의 식은땀과 죽음의 두려움에 찬 비명 없이는 실재로 깨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더 부드러운 꿈이 그가 깨어나기에 앞서 있어, 그의 더 고요해진 마음이 그를 깨우려고 사랑으로 부르는 음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기도록 해 주는 경우는 예외다. 그의 고통이 치유되고 그의 형제가 그의 벗이었던, 더 부드러운 그 꿈 말이다.

하나님은 아들이 부드럽게, 기쁨으로 깨어나기를 뜻했고, 아들에게 두려움 없이 깨어날 수단을 주었다.

그대의 꿈 대신 성령이 준 꿈을 받아들이라. 꿈을 꾸는 자가 누구인지 일단 인식하고 나면, 꿈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령 안에서 쉬라. 그리고 공포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그대가 꾼 꿈들을 그의 부드러운 꿈들이 대신하게 하라.

성령은 용서하는 꿈들을 가져온다. 그 꿈들 안에서는 누가 살인자이고 누가 희생자가 될지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가 가져오는 꿈들 안에는 살인도 죽음도 없다. 죄책감의 꿈은 그대의 눈이 감겨 있음에도 그대의 시야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다.

미소가 찾아와 잠든 그대의 얼굴을 밝게 비춘다. 이제 잠은 평화롭다. 이것들이 행복한 꿈이기 때문이다.

그대와 거룩한 순수함 속에서 하나가 되는, 죄 없는 그대 형제를 부드럽게 꿈꾸라. 그리고 이 꿈으로부터 하늘의 주는 몸소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깨울 것이다.

그대 형제의 실수에 그대 꿈속에서 머무르는 대신, 그의 친절을 꿈꾸라. 그가 준 상처를 헤아리는 대신, 그의 사려 깊음을 꿈꿀 것으로 택하라.

그의 환상을 용서하고, 그가 베푼 온갖 도움에 감사하라. 그리고 그가 그대의 꿈속에서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그의 많은 선물을 외면하지 말라.

그 형제는 자신의 아버지를 나타내는데, 그대는 그 아버지가 그대에게 생명과 죽음 둘 다를 내놓는다고 본다. 형제여, 아버지는 오직 생명만을 준다.

그러나 그대가 형제의 선물이라고 보는 것은, 그대가 아버지에게서 받는다고 꿈꾸는 선물들을 나타낸다. 그대 형제의 모든 선물이 그대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친절의 빛 안에서 보이게 하라. 그리고 어떤 고통도 그의 선물에 대한 깊은 감사의 그대 꿈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