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관념일 뿐인 에고

1) 기원을 묻는 물음

마음이 어떻게 에고를 만들 수 있었는지 묻는 것은 합당하다. 사실 이는 그대가 던질 수 있는 최선의 물음이다.

그러나 과거의 관점에서 답을 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잘못이 현재에도 되풀이되지 않는다면 역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추상적인 생각은 앎에 적용된다. 앎은 완전히 비인격적이며 예시는 그것을 이해하는 데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각은 언제나 구체적이며, 그러므로 상당히 특정하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한 에고, 곧 자아를 만든다. 이 에고는 그 불안정성 때문에 엄청난 편차에 놓인다.

사람은 또한 자신이 지각하는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에고도 만드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로 가변적이다.

이 에고들의 상호작용은 둘 다를 바꾸는 과정이다. 이 에고들은 변하지 않는 것이 만든 것도, 변하지 않는 것과 함께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에고들이 서로를 바꾸는 이 변화는 상호작용이 마음 안에서 일어날 때에도 물리적 상호작용을 동반할 때에도 똑같이 쉽게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난다. 이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에고가 다만 하나의 관념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더 좋은 예는 없을 것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 상태는 에고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 주는 좋은 예다.

그대가 앎을 내던지면 그대는 마치 앎을 지녀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된다. 이는 너무나 명백해서 이 사실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일이 지금 일어난다면, 이런 일이 과거에 일어났다는 것이 어째서 놀라운 일이겠는가? 놀라움은 낯선 것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지만, 그토록 끈질기게 일어나는 무언가에 대한 반응으로는 그다지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마음이 지금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해도, 마음이 반드시 그런 식으로 작동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라.

동물이 새끼를 사랑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이는 동물이 새끼를 자기 자신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일부라고 여기는 것을 내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대는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을 대하는 것과 매우 비슷하게 그대의 에고에 반응한다. 사랑과 보호와 자비로 말이다. 그대가 만든 자아에 대한 그대의 반응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그 반응은 여러 면에서 그대가 언젠가 그대의 참된 창조물, 곧 그대만큼이나 시간을 초월한 그 창조물에 반응할 방식과 닮아 있다.

문제는 그대가 에고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아니라, 그대가 자신을 무엇이라고 믿느냐다. 믿음은 에고의 기능이며, 그대의 근원이 믿음에 열려 있는 한 그대는 그 근원을 에고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가르침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 그대는 다만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지각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는 믿음은 에고적 사고가 지닐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관념이다. 이는 이 믿음이 에고가 참나(Self)가 아니라는 알아봄의 실마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의 사고 체계를 허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로 지각될 수밖에 없는데,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기는 칼이나 가위를 빼앗으면 격노하며 소리 지르지만, 빼앗지 않으면 스스로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대는 여전히 아기다. 그대에게는 참된 자기 보존의 감각이 없으며, 자신을 가장 다치게 할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이 사실을 알아차리든 못하든, 그대는 해롭지 않으면서도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려는 노력에 협력하기로 이미 동의한 바 있다 — 이 둘은 함께 간다. 이 협력에 대한 그대의 태도조차 필연적으로 갈등을 겪는다. 모든 태도는 에고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이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잠시 참으라, 그리고 그 결과가 하나님만큼이나 확실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2) 홀로 존재라는 믿음

참되고 지속되는 풍요의 감각을 지닌 사람만이 참으로 자비로울 수 있다. 무엇이 관련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면 이는 명백하다.

에고의 관점에서는 무언가를 준다는 것은 그 무언가 없이 지내야 한다는 의미다. 그대가 주는 것을 희생과 연관 지을 때, 그대는 자신이 어떻게든 더 나은 것을 얻고 있다고 믿을 때에만 준다. 그래서 그대가 주는 무언가 없이도 지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얻기 위해 준다"는 것은 에고의 피할 수 없는 법칙이다. 에고는 언제나 자신을 다른 에고와의 관계 속에서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고는 자신을 낳은 결핍에 대한 믿음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다. 다른 에고들을 실재로 지각하는 에고의 지각 전체는 다만 자기 자신도 실재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자존감"은 언제나 스트레스에 취약한데, 스트레스란 에고의 존재에 대한 지각된 위협을 가리키는 말이다. 에고는 말 그대로 비교로 살아간다. 동등함은 에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고, 그래서 자비는 불가능해진다. 에고는 결코 풍요로부터 주지 않는다. 에고는 애초에 풍요를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얻는다"는 관념이 에고의 사고 체계 안에서 생겨났다.

욕구는 "얻는" 기제이며,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는 에고의 필요를 나타낸다. 이 말은 이른바 "더 높은 에고의 필요"만큼이나 육체의 욕구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육체의 욕구는 그 근원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에고는 육체를 자신의 집으로 여기며 육체를 통해 자신을 만족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다는 관념은 마음이 내린 결정이며, 이 마음은 진정으로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해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다.

에고는 자신이 완전히 홀로 존재한다고 믿는데, 이는 다만 자신이 어떻게 생겨났다고 생각하는지를 나타내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이는 너무나 두려운 상태여서, 에고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에고들에게 향하는 것뿐이다. 하나가 되려는 미약한 시도로 다른 에고들과 동일시하거나, 마찬가지로 미약한 힘의 과시로 다른 에고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고는 그 전제 자체에 물음을 던질 자유가 없다. 그 전제가 바로 에고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에고란 자신이 완전히 홀로 존재한다는 마음의 믿음이다.

영의 인정을 얻어 자신의 존재를 세우려는 에고의 끊임없는 시도는 소용없다. 앎 안에 있는 영은 에고를 자각하지 못한다. 영은 에고를 공격하지 않는다. 영은 다만 에고를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뿐이다. 에고 역시 영을 자각하지 못하는 한편,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게 거부당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지각한다. 그래서 에고의 관점에서 본 자존감은 반드시 망상일 수밖에 없다.

3) 천국은 곧 그대

하나님의 창조물은 신화를 만들지 않지만, 창조적인 노력이 신화 만들기로 돌아설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오직 한 가지 조건 아래서만 가능하다. 그 조건이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더 이상 창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신화는 전적으로 지각적이며, 그 형태가 매우 모호하고 특징적으로 선악이 뒤섞인 성격을 띠기에, 가장 자비로운 신화조차 두려운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다.

신화와 마법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화는 대개 에고의 기원과 관련되고, 마법은 에고가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힘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신화 체계는 대개 "창조"에 관한 어떤 설명을 담고 있으며, 이를 그 나름의 특정한 형태의 마법과 연결 짓는다.

이른바 "생존을 위한 투쟁"은 다만 에고가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몸부림이자, 자기 자신의 시작에 대한 에고의 해석일 뿐이다. 이 시작은 대개 육체의 출생과 연관된다. 육체의 출생 시점 이전에 에고가 존재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더 "종교적으로" 에고 중심적인 사람들은 영혼이 그 이전에도 존재했으며, 에고적 삶으로의 일시적인 추락 이후에도 계속 존재하리라고 믿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영혼이 이 추락 때문에 벌받으리라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구원은 영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영은 위험에 처해 있지 않으며 구원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다만 "바른 마음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성령의 하나로 통합된 마음(one-mindedness)은 아니지만, 그 하나로 통합된 마음이 회복되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바른 마음 상태는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이어진다. 이는 올바른 지각에는 공격이 한결같이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릇된 마음 상태는 사라진다.

에고는 심판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으며, 그에 따라 옆으로 치워진다. 그러면 마음에게는 오직 하나의 방향만이 남는다. 그 하나의 방향은 언제나 자동적이다. 마음이 따르는 사고 체계가 그 방향을 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각을 바로잡는 일이 다만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오직, 잘못된 지각이 앎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반면 정확한 지각은 앎을 향한 디딤돌이기 때문에 필요할 뿐이다. 올바른 지각의 가치 전체는, 모든 지각이 결국 불필요하다는 필연적인 깨달음에 있다. 이 깨달음이 장애물을 완전히 없앤다.

그대는 그대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 물을 수도 있다. 그 물음은 합당한 물음이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이 그것을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대"란 누구인가? 영은 불멸이며, 불멸은 변함없는 상태다. 불멸은 언제나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처럼 지금도 참이다. 불멸에는 아무런 변화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멸은 연속체가 아니며, 대립물과 비교됨으로써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앎은 결코 비교를 동반하지 않는다. 이 점이 바로 앎과 마음이 붙잡을 수 있는 다른 모든 것 사이의 주된 차이다.

"천국은 그대 안에 있다"라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 말은 에고에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에고는 이 말을 마치 바깥에 있는 무언가가 안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이 해석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안에"라는 말은 불필요하다. 천국은 곧 그대다. 창조주가 그대 말고 무엇을 창조했겠으며, 그대 말고 무엇이 창조주의 나라이겠는가? 이 말이 메시지의 전부이며, 이 메시지는 전체로서 부분들의 합을 초월한다.

그대에게도 그대의 영이 창조한 나라가 있다. 그대의 영은 에고의 환영 때문에 창조를 멈추지 않았다. 그대의 창조물도 그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없이 있지 않다. 그대의 에고와 그대의 영은 결코 공동 창조자가 되지 못하지만, 그대의 영과 그대의 창조주는 언제나 공동 창조자다. 그대의 창조물이 그대만큼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하라. 그대의 창조물의 나라는 완전히 하나로 통합되어 있고 완전히 보호받고 있으며, 에고는 그 나라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