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생명의 증인이 된 치유

1) 기적이 태어남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치유받는 것이다. 기적은 그대의 도움 없이 확장되지만, 시작되려면 그대가 필요하다.

치유의 기적을 받아들이라. 그러면 그것은 그 본성대로 뻗어 나갈 것이다. 태어나는 그 순간 스스로 확장되는 것이 그것의 본성이다.

그리고 기적은 주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그 순간 태어난다. 누구도 다른 이에게 치유받으라고 요구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은 스스로 치유받을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이에게 내줄 수 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누가 다른 이에게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을 누가 나눌 수 있겠는가?

성령은 그대에게 말한다. 그는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귀 기울임으로써 그의 음성은 확장된다.

그대가 성령이 하는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건강은 건강의 증인이다.

건강이 증언되지 않는 한, 확신 없이 남는다. 건강은 증명될 때에야 비로소 입증되며, 신념을 강요하는 증인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이중적인 메시지로는 누구도 치유받지 못한다. 그대가 오직 치유받기만을 원한다면, 그대는 치유받는다. 그대의 단일한 목적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그대가 치유를 두려워한다면, 치유는 그대를 통해 올 수 없다. 치유에 필요한 단 한 가지는 두려움의 부재다. 두려워하는 자는 치유받지 못하며, 치유할 수도 없다.

이것이 치유를 위해 갈등이 그대의 마음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치유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 한순간만이라도 그대가 공격 없이 사랑한다는 뜻이다.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기적은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거룩한 순간은 기적이 머무는 곳이다. 그곳으로부터, 갈등을 초월해 평화에 이른 마음 상태의 증인으로서 기적 하나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

기적은 평화의 자리로부터 전쟁터로 위안을 실어 나르며, 전쟁에 아무 결과도 없음을 보여 준다. 전쟁이 가져오려 애써 온 온갖 상처, 부서진 몸과 산산이 조각난 팔다리, 비명 지르며 죽어 가는 자와 소리 없이 죽은 자 모두가 부드럽게 일으켜져 위로받는다.

기적이 치유하러 온 곳에는 슬픔이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는 공격 없는 그대의 사랑의 한순간이면 그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 한순간에 그대는 치유받으며, 그 단 한 순간에 모든 치유가 이루어진다.

2) 세상이 청하는 치유

거룩한 순간이 가져오는 축복을 그대가 받아들일 때, 무엇이 그대와 떨어져 서 있겠는가? 축복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를 축복하는 그 존재는 온 세상을 사랑하며, 두려워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세상 안에 남겨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축복으로부터 움츠러든다면, 세상은 정말로 두려운 것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그대가 세상의 평화와 위안을 보류하여 세상을 죽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쓰라리게 버림받은 세상을, 그것을 구할 수 있었으나 치유받기가 두려워 물러선 자에 대한 정죄로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죽어 가는 모든 이의 눈은 책망을 실어 오고, 고통은 속삭인다.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가?"

그 질문을 잘 헤아려 보라. 그것은 그대를 대신해 그대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죽어 가는 세상은 다만 그대가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을 한순간 멈추어, 세상이 치유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할 뿐이다. 거룩한 순간으로 와서 치유받으라.

거룩한 순간에 받은 것은 그대가 세상으로 돌아갈 때 하나도 뒤에 남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복받음으로써 그대는 축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죽어 가는 세상에 줄 생명이 그대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고통에 찬 눈들은 더 이상 책망하지 않고, 다만

축복을 준 그대에게 감사하며 빛난다. 거룩한 순간의 광휘가 그대의 눈을 밝혀, 온갖 고통 너머를 보고 그 대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시력을 그대에게 줄 것이다.

치유는 고통을 대신한다. 하나를 보는 자는 다른 하나를 지각할 수 없다. 둘 다 동시에 그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보는 것을 세상이 목격하고, 그대의 치유에 대해 증언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치유는 세상이 치유되는 데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다.

세상은 완벽하게 배운 단 하나의 교훈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대가 그 교훈을 잊을 때, 세상은 그대가 가르친 것을 부드럽게 일깨워 줄 것이다.

세상이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치유받은 그대에게, 세상은 감사를 조금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그 증인들을 불러내어, 자신들에게 시력을 가져다준 그대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 줄 것이다.

그 증인들은 바로 그 시력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목격했다. 정죄의 세상은, 모든 눈이 자신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준 벗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세상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그대의 형제는 자신이 원수라고 여겼던 많은 이가 실은 벗임을 기쁘게 지각할 것이다.

3) 배움의 전이

문제는 구체적이지 않지만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며, 이 구체적인 형태들이 세상을 이룬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의 문제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이해한다면, 그 문제는 그 사람이 볼 것으로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문제의 본성 자체는 바로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그 문제를 지각하는 동안에는, 있는 그대로 지각할 수 없다.

그러나 치유는 구체적인 사례들 속에서 나타나며, 그 모두를 포함하도록 일반화된다. 이는 그것들이 서로 다른 형태를 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배움은 전이를 목표로 하며, 전이는 오직 공통된 요소만 있는 두 상황이 하나로 보일 때 완성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가 보는 차이를 보지 않는 어떤 존재만이 이룰 수 있다. 그대의 배움의 완전한 전이는 그대가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대가 보는 온갖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전이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그 차이들이 실재할 수 없음을 그대에게 확신시켜 준다. 그대의 치유는 확장되어, 그대의 것이 아니라고 여겼던 문제들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대의 여러 다른 문제들이, 그 가운데 어느 하나가 벗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풀릴 것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그 문제들의 차이일 수는 없다. 배움은 어떤 상황에서 그 반대되는 상황으로 건너뛰어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치유는 올바로 지각되었으나 결코 어겨진 적 없는 법칙에 따라, 합법적인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대가 그 문제들을 지각하는 방식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는 틀렸지만, 그대 안에는 옳은 어떤 존재가 있다. 그러니 그대의 배움의 전이를 그 존재에게 맡기라. 그 존재는 그 법칙을 참으로 이해하며, 그 법칙이 어겨지지도 한계 지어지지도 않은 채로 남으리라 보장해 줄 것이다.

그대가 할 역할은 다만 그 존재가 그대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뿐이며, 나머지는 그가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그대의 배움의 힘은 그 배움이 찾아내는 수많은 서로 다른 증인들을 통해 그대에게 입증될 것이다.

그 증인들 가운데 맨 먼저 그대의 형제가 보일 것이나, 그 뒤로 수천이 서 있고, 그들 각자 너머에는 또 수천이 있다. 각각은 나머지와 다른 문제를 지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함께 풀린다.

그리고 그것들에 공통된 답은 그 질문들이 결코 분리될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 치유가 주어진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리고 그대는 스스로 치유를 받아들일 때 평화가 그대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치유의 전체 가치를 그대가 헤아릴 필요는 없다.

그대가 치유로부터 유익을 얻었음을 알기 위해서는 말이다. 공격 없이 사랑이 들어온 그 순간에 일어난 일은 영원히 그대와 함께 남을 것이다. 그대의 치유는 그 결과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며, 그대 형제의 치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대가 가는 곳마다, 그대는 그대의 치유가 몇 배로 늘어난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보는 모든 증인은 실제로 있는 것 전체에 비하면 훨씬 적을 것이다. 무한은 그 낱낱의 부분을 세는 것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대의 치유에 감사한다. 그 치유가 자신의 아들에게 주는 사랑의 선물임을 알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그 치유는 하나님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4) 죄의 증인 대신함

고통은 몸이 실재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성령이 하는 말을 침묵시키고 그의 말이 그대의 자각에 이르지 못하게 하려는 시끄럽고 흐려 놓는 목소리다. 고통은 주의를 강요하여, 성령을 향하던 것을 끌어당겨 자기 자신에게 집중시킨다.

고통의 목적은 쾌락의 목적과 같다. 둘 다 몸을 실재하게 만드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목적을 공유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목적 공유가 목적의 법칙이며, 이 법칙은 목적을 공유하는 모든 것을 이 법칙 안에서 하나로 묶는다. 쾌락과 고통은 똑같이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쾌락과 고통은 아무것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들에는 의미 없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의 목적이 지닌 그 무의미함을 공유한다.

죄는 고통에서 쾌락으로, 그리고 다시 고통으로 옮겨 간다. 어느 쪽 증인이든 같은 것이며, 오직 하나의 메시지만을 전한다. "그대는 여기, 이 몸 안에 있으며, 상처받을 수 있다. 그대는 쾌락도 누릴 수 있지만, 오직 고통을 대가로 치를 때뿐이다."

이 증인들에는 훨씬 더 많은 증인이 합류한다.

각각은 서로 다른 이름을 지녔기에 달라 보이며, 그래서 서로 다른 소리에 응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을 제외하면, 죄의 증인들은 모두 똑같다.

쾌락을 고통이라 부르라. 그러면 고통은 아플 것이다. 고통을 쾌락이라 부르라. 그러면 그 쾌락 뒤에 있는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죄의 증인들은 다만 하나가 앞으로 나서고 다른 하나가 뒤로 물러나며 이름에서 이름으로 옮겨 갈 뿐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앞서 있든 아무 차이가 없다. 죄의 증인들은 다만 죽음의 부름만을 듣는다.

그 자체로는 아무 목적도 없는 이 몸이 그대의 모든 기억과 모든 희망을 담고 있다. 그대는 그것의 눈으로 보고 그것의 귀로 들으며, 그것이 무엇을 느끼는지 그대에게 말하도록 내버려 둔다. 몸은 알지 못한다.

몸은 다만 그대가 그것에게 사용하라고 붙여 준 이름들을 그대에게 말해 줄 뿐이다. 그대가 그것의 실재성을 증언할 증인들을 불러낼 때 말이다. 그대는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실재하는지 선택할 수 없다.

그대가 무엇을 선택하든 나머지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 이름 또는 저 이름을,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을 선택할 뿐이다. 그대가 어떤 증인을 진리의 이름으로 불렀다고 해서 그 증인이 참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증인이 나타내는 것이 진리라면, 그 안에서 진리가 발견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그를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증인은 몸에 반하는 어떤 증인도 보지 않는다. 그는 또한 몸의 실재성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다른 이름의 증인들에게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몸이 실재하지 않음을 안다.

그대가 몸이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믿는 것을 그 무엇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몸은 하나님 자신의 일부에게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그 기능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증인은 그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몸의 죽음을 증언하는 증인 하나하나에 맞서, 그는 죽음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그대의 생명을 증언할 증인을 보낸다. 그가 가져오는 기적 하나하나는 몸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증언이다.

하나님의 증인은 몸의 고통과 쾌락을 똑같이 치유한다. 죄의 모든 증인을 그의 증인들이 대신하기 때문이다. 기적은 죄의 증인들이 불리는 이름들 사이에 아무런 구별도 두지 않는다.

기적은 다만 죄의 증인들이 나타내는 것에 아무 결과도 없음을 증명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기적 자신의 결과가 그것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의 고통을 무슨 이름으로 불렀든 상관없다.

고통은 더 이상 그곳에 없다. 기적을 가져오는 그 존재는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하나로 지각한다.

두려움이 죽음의 증인이듯, 기적은 생명의 증인이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인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가져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죽어 가던 자가 살아나고, 죽은 자가 일어나며, 고통은 사라졌다. 그러나 기적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나타내는 것을 위해서만 말한다.

사랑에도 죄의 세상 안에서는 상징이 있다. 기적은 용서한다. 그것이 용서를 넘어서 있는 참된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기적이 오로지 무효화하러 온 그 법칙에 자신이 매여 있다고 생각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친 생각인가!

죄의 법칙들은 서로 다른 세기를 지닌 서로 다른 증인들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서로 다른 고통을 증언한다.

그러나 세상을 축복하러 기적을 보내는 그 존재에게는, 사소한 고통의 찌름 하나, 세속적인 작은 쾌락 하나, 그리고 죽음의 고통 그 자체가 다만 하나의 소리일 뿐이다. 치유를 구하는 부름이며, 고통에 찬 세상 안에서 도움을 청하는 애처로운 외침이다.

기적이 증언하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의 같음이다. 기적이 증명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음이다. 그것들을 서로 다르다고 부르는 법칙들은 힘을 잃어 무력한 것으로 드러난다.

기적의 목적은 바로 이것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기적이 증언하는 것을 위해 그 힘을 보증했다. 그러니 그대는 죄의 법칙이 아니라 기적의 증인이 되라.

더 이상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대가 치유받아야 할 필요는 있다. 세상의 고통과 슬픔이 세상을 자신의 구원과 구제에 귀먹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부활은 그대의 치유와 행복을 기다린다. 그대가 세상의 치유를 보여 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대가 다만 치유의 결과를 지니고 다니기만 한다면, 거룩한 순간은 모든 죄를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더 이상 고통받기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더 나은 기능을 그대가 무엇으로 섬길 수 있겠는가? 그대가 치유할 수 있도록 치유받으라.

그리고 죄의 법칙이 그대에게 적용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 그리고 사랑의 상징이 죄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기로 택한 그대에게, 진리가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