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용서 너머의 무한한 힘

힘은 대립할 수 없다. 대립은 그것을 약화시킬 것이고, 약화된 힘은 개념상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약한 힘은 무의미하며, 약화시키는 데 쓰이는 힘은 제한하는 데 쓰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화시키는 힘은 제한되고 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힘은 대립이 없어야 힘 자신일 수 있다. 약함은 힘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바꾸지 않고는 힘에 끼어들 수 없다. 약화시키는 것은 제한하는 것이며, 자신이 공격하는 개념과 모순되는 반대되는 것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약화시키는 것은 그 관념이 아닌 어떤 것을 그 관념에 결합시켜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약화된 힘'이나 '증오하는 사랑' 같은 이중 개념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대의 형제가 '증오하는 사랑', '약화된 힘',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 있는 죽음'의 상징이라고 결정해 왔다. 그래서 그는 그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 형제가 의미 없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대의 형제는 이중적인 생각을 나타내는데, 그 절반은 남은 절반 때문에 사라진다. 그러나 남은 절반마저도 자신이 없앤 절반 때문에 곧 모순되고 마니, 결국 둘 다 사라진다. 그렇게 이제 그는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있을 수 없는 관념을 나타낼 뿐인 상징은 텅 빈 공간과 무(無)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와 텅 빈 공간은 방해가 될 수 없다. 실재에 대한 자각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그 빈 공간에 무언가 있다는 신념이다. 그대가 보는 그대 형제의 그림은 아무 의미도 없다.

공격하거나 부정할 것도, 사랑하거나 미워할 것도, 힘을 부여하거나 약하다고 볼 것도 없다. 그 그림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이 나타내는 생각을 없애는 모순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그림에는 원인이 전혀 없다. 원인 없이 결과를 지각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원인 없는 것이 무 외에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대가 보는 그대 형제의 그림은 완전히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 적도 없다. 그러니 그 그림이 차지한 텅 빈 공간을 비어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그 그림을 보는 데 바친 시간을 헛되이 쓴 시간, 채워지지 않은 시간으로 지각하라. 채워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 텅 빈 공간과, 쓰이고 완전히 채워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 사용되지 않은 시간의 간격, 이 둘은 진리가 들어와 그 안에 자리 잡으라는 조용한 초대가 된다.

그 초대의 진정한 매력을 더할 준비는 할 수 없다. 그대가 비워 둔 것을 하나님이 채울 것이며, 그가 있는 곳에는 진리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약화되지 않고 반대되는 것이 없는 힘, 그것이 바로 창조다. 창조에는 상징이 없다. 그 무엇도 진리 너머를 가리키지 않는다.

무엇이 모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참된 무효화는 자비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대의 그림을 처음으로 대신하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또 다른 그림이다. 무는 그림으로 그릴 수 없듯이, 전체성에도 상징이 없다. 실재는 궁극적으로 형태 없이, 그림으로 그려지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은 채 알려진다.

용서는 아직 완전히 한계에서 자유로운 힘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가 부과하기로 택한 한계를 두지 않는다.

용서는 진리가 일시적으로 표현되는 수단이다. 용서는 성령이 그림들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도록 해 주는데, 이는 보조 수단이 무의미해지고 배움이 끝나는 때까지 이어진다. 어떤 학습 보조 수단도 배움의 목표를 넘어서까지 쓸모를 이어갈 수 없다. 그 목적이 달성되면 그것은 기능을 잃는다. 그러나 배움의 기간 동안 이 보조 수단은 지금 그대가 두려워하지만 언젠가는 사랑하게 될 쓸모를 지닌다.

얼마 전까지 비어 있던 그 공간을 채우도록 그대에게 주어진 그대 형제의 그림은 어떤 방어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압도적으로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대가 원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결정하는 데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그 그림은 이중 개념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이 그림의 절반에 불과해 불완전할지라도, 그 자체 안에서는 동일하다. 그것이 나타내는 것의 나머지 절반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마지막 걸음을 몸소 내디딜 자유를 그대로 지니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그림도 학습 보조 수단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모든 학습 보조 수단을 마침내 대신할 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용서는 사라지고 상징은 희미해지며, 눈이 본 적 있거나 귀가 들은 적 있는 그 어떤 것도 지각될 것으로 남지 않는다. 완전히 무한한 힘이 왔으니,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기능의 선택이란 어디에도 없다. 그대가 잃을까 두려워하는 그 선택을, 그대는 애초에 가진 적이 없다.

그러나 오직 이 선택만이 무한한 힘과, 완전하고 행복하며 반대되는 것이 없는 단일한 생각들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아무것도 대립하지 않는 힘의 평화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힘이란 있을 수 없다.

용서를 넘어서고, 상징과 한계의 세상을 넘어서는 그 힘을 맞아들이라. 하나님은 그저 존재하려 할 뿐이니, 그래서 하나님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