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순수함을 증언하는 그림

1) 부당함이라는 혼란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현존을 깨닫기 위해 무엇이 아직 되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가? 오직 이것뿐이다 — 그대는 공격이 언제 정당화되고 언제 부당하여 허락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를 구별하는 시각을 지니고 있다.

그대가 어떤 공격을 부당하다고 지각할 때, 그대는 지금 분노로 반응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대는 같은 공격을 다른 것으로 본다.

혼란은 제한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일어난다면 전체적일 것이다. 그리고 혼란의 존재는, 어떤 형태로든, 아버지와 아들의 현존을 가릴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명료하게 알려지거나 전혀 알려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혼란스러운 지각은 지식을 막을 것이다.

이것은 혼란의 크기나 방해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혼란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아버지와 아들에게로 가는 문은 닫히고, 그들은 거기서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는다.

그대가 어떤 형태의 공격은 그대에게 부당하다고 지각한다면, 그 지각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지각은 그대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형태들이 분명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어떤 것들이 부당하다고 평가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떤 것들에는 의미가 주어지고 이치에 맞는 것으로 지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어떤 것들만이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공격이 무의미하며, 똑같이 원인도 결과도 없고 어떤 종류의 결과도 지닐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현존은, 그들의 빛나는 순수함과 그대의 자각 사이에 서 있는 그 어떤 베일에든 가려진다. 그 자각이란, 이 순수함이 그대 자신의 것이며 그대와 함께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똑같이 속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제한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한된 것은 천국일 수 없다. 그러므로 제한된 것은 지옥일 수밖에 없다.

부당함과 공격은 하나의 실수이며, 너무나 단단히 결합되어 있어 하나가 지각되는 곳에서는 다른 하나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대는 부당하게 대우받을 수 없다. 그대가 부당하게 대우받는다는 믿음은 다만 그대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박탈당했다는 생각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희생의 원인을 투사하는 것이, 부당하고 그대의 정당한 몫이 아니라고 지각되는 모든 것의 뿌리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깊은 부당함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것을 청하는 것은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 말고는 아무 적도 없다. 그리고 그대는 그 형제를 그대 자신으로 알지 못하기에 참으로 그에게 적이다.

그 형제가 자기 자신인 것을 박탈당하고, 자기 자신이 될 권리를 부정당하며, 그의 아버지의 사랑과 그대의 사랑을 그에게 마땅하지 않은 것으로 희생하라고 요구받는 것보다 더 부당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대 자신이 부당하게 대우받는다고 지각하려는 유혹을 경계하라.

이런 시각 안에서, 그대는 아버지와 아들의 것이 아니라 오직 그대 자신만의 순수함을, 다른 누군가의 죄책감을 대가로 찾으려 한다. 그대의 죄책감을 다른 누군가에게 줌으로써 순수함을 살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형제에 대한 그대의 공격이 얻으려 하는 것이 순수함인가?

그 공격은 그대가 청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그대 자신의 공격에 대한 보복이 아닌가? 그대가 그 공격에 죄가 없으며 자신의 순수함에도 불구하고 희생되었다고 믿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은가?

죄책감의 게임이 어떤 식으로 벌어지든, 손실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자신의 순수함을 잃어야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그에게서 가져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대는 그대의 형제가 그대에게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한쪽이 부당해야 다른 쪽이 순수해질 수 있다고 그대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게임 안에서 그대는 그대의 관계 전체를 위한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대는 이 목적을 그 관계에 주어진 목적에 더하려 한다. 성령의 목적은 그대의 거룩한 손님들의 현존을 그대에게 알려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목적에는 아무것도 더해질 수 없다.

성령의 목적 말고는 세상에 아무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이 하나의 목표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는 것은 다만 세상과 그대 자신에게서 모든 목적을 빼앗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세상이 그대에게 지우는 듯 보이는 부당함 하나하나는, 그대가 성령이 보는 그 기능 없이 세상을 목적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세상에 지운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단순한 정의는 이 땅의 모든 살아 있는 것에게서 부정되어 왔다.

2) 고통은 고발의 증인

그대는 부당하게 심판하고 그대가 심판한 대로 본다. 이 부당함이 그런 그대에게 무엇을 하는지, 그대는 헤아릴 수 없다. 세상은 흐릿하고 위협적으로 변하며, 구원이 가져다주는 그 행복한 반짝임의 흔적은 조금도 그대의 길을 밝히는 것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이 빛을 빼앗기고 어둠 속에 버려진 채, 헛된 세상 속에서 부당하게 목적 없이 남겨진 것으로 본다.

세상은 공정하다. 성령이 부당함을 안의 빛으로 가져왔고, 그곳에서 모든 부당함이 풀려 정의와 사랑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어디에서든 부당함을 지각한다면, 그대는 다만 이렇게 말하면 된다 — 이것으로 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현존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부당함을 보기보다는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싶다. 그들의 현존이 바로 그 부당함을 비추어 없애기 때문이다.

부당하게 대우받고 싶은 소망은 공격과 순수함을 결합하려는 타협 시도다. 도저히 함께 성립할 수 없는 것을 결합하여, 결코 합쳐질 수 없는 것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그대는 온화한 길을 걸으라, 그러면 그대는 밤의 그 어떤 악도 그림자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길 위에 공포의 상징을 놓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가시관을 엮게 될 것이고, 그대의 형제와 그대 자신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혼자서는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다. 그리고 그대가 부당하게 대우받는다면, 그대의 형제는 그대가 보는 그 부당함을 겪어야 한다. 그대는 혼자서는 자기 자신을 희생시킬 수 없다.

희생은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희생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창조 전체를, 그리고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희생과 함께 아버지를 끌어들일 것이다.

희생으로부터의 그대의 해방 안에서 그대 형제의 해방도 드러나며 그 자신의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겪는 고통 하나하나를 그대의 형제가 공격의 죄를 지었다는 증거로 본다. 이렇게 그대는 그대 자신을 하나의 표지로 만든다. 그 표지가 가리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순수함을 잃었으며 그가 정죄받았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저 그대를 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에게 부당했던 것은 그대의 형제에게 정의로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대가 지금 겪는 부당한 복수는 그에게 속하며, 그 복수가 그에게 놓일 때 그대는 자유로워진다.

그대 자신을 그의 죄책감의 살아 있는 상징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말라. 그대가 그를 위해 만든 그 죽음에서 그대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의 형제의 순수함 안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의 순수함을 찾는다.

그대가 고통을 겪거나, 박탈당하거나, 부당하게 대우받거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할 때마다, 그대는 다만 그대의 형제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공격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십자가형의 그림을 그의 눈앞에 들어 보인다. 이는 그의 죄가 그대의 피와 죽음 속에 천국에 새겨져 있다고 그가 보게 하려는 것이며, 그의 앞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그를 지옥에 떨어뜨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새겨진 것이다. 천국에서 그대는 공격 너머에 있으며 그대의 형제의 순수함을 증명한다.

3) 형제가 보는 용서

그대가 그대의 형제에게 내미는 그대 자신의 그림을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도 보여 주며, 그대는 그 그림에 자신의 모든 믿음을 준다. 성령은 그대에게, 그에게 내주라고, 아무 고통도 비난도 전혀 없는 그대 자신의 그림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대의 형제의 죄책감에 순교했던 것은 그의 순수함에 대한 완전한 증인이 된다.

증인의 힘은 믿음을 넘어선다. 증인의 힘은 그 뒤에 확신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증인은 자기 자신을 넘어 자신이 대표하는 것을 가리키기에 믿어진다. 병들고 고통받는 그대는 다만 그대의 형제의 죄책감을 대표할 뿐이다 — 그가 준 상처를 그가 잊지 않도록 그대가 보내는 증인, 그대가 그가 결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는 그 증인.

그대는 이 병들고 애처로운 그림을, 그대의 형제를 벌하는 데 쓰이기만 한다면 받아들인다. 병든 이들은 모두에게 무자비하며, 전염을 통해 죽이려 한다.

"형제여, 나를 보라, 그대의 손에 내가 죽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죽음은 쉬운 대가로 보인다. 병이란 그대의 형제의 죄책감에 대한 증인이며, 죽음은 그의 실수가 죄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병은 그저 "작은" 죽음, 아직 완전하지 않은 복수의 형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대표하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그대가 그대의 형제에게 보낸 그 암울하고 씁쓸한 그림을 그대는 슬픔 속에서 바라보아 왔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보여 준 모든 것을 그대는 믿어 왔다. 그것이 그대가 지각하고 사랑한 그의 죄책감을 증언했기 때문이다.

이제 성령은 자신의 손길로 부드러워진 손 안에 그대의 다른 그림 하나를 놓는다. 이 다른 그림은 여전히 몸의 그림이다. 그대가 참으로 무엇인지는 보일 수도 그려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공격의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기에 결코 조금의 고통도 겪지 않았다. 이 그림은 그대가 다칠 수 없다는 영원한 진리를 증언하며, 자기 자신을 넘어 그대의 순수함과 그대의 형제의 순수함 둘 다를 가리킨다. 이것을 그에게 보여 주라.

그러면 그대의 형제는 모든 흉터가 치유되었고 모든 눈물이 웃음과 사랑 속에서 닦였음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자신의 용서를 볼 것이며, 치유된 눈으로 그 그림 너머로 그대 안에서 보는 순수함을 볼 것이다. 여기에 그가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증거가 있다. 그의 광기가 그에게 하라고 시킨 것은 그 무엇도 실제로 행해진 적이 없으며 어떤 종류의 결과도 지닌 적이 없다는 증거다.

또한 여기에는 그대의 형제가 자신의 마음에 지운 그 어떤 비난도 결코 정당화된 적이 없으며, 그 어떤 공격도 결코 두려움의 독 있고 집요한 가시로 그를 건드릴 수 없다는 증거가 있다. 그의 죄책감이 아니라 그의 순수함을 증언하라.

그대의 치유는 그의 위안이자 그의 건강이다. 그 치유가 환영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