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미룸 없는 치유
1) 지각의 법칙 뒤집기
이것은 기적에 관한 과정이다. 그런 만큼, 이 과정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에 치유의 법칙이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다루어 온 원리들을 되짚어, 치유가 가능해지기 위해 반드시 일어나야 할 모든 것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정리해 보자. 일단 치유가 가능해지면 치유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병은 분리에서 온다. 분리가 부정되면 병은 사라진다. 병을 가져온 그 생각이 치유되어 온전한 정신으로 대체되는 즉시 병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병과 죄는 결과와 원인으로 보이며, 이성의 빛으로부터 신중하게 지켜지도록 자각에서 숨겨진 관계로 남아 있다. 죄책감은 처벌을 청하고, 그 요청은 받아들여진다. 진리 안에서가 아니라 죄 위에 세워진 그림자와 환영의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지각했다. 지각이란 이루어진 소망이기 때문이다. 지각은 변한다 — 그것은
변함없는 지식을 대신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각될 수 없으며, 오직 알려질 수 있을 뿐이다.
지각되는 것은 여러 형태를 취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지각되는 것을 진리 앞으로 가져오면, 그 무의미함은 아주 뚜렷해진다. 진리에서 떨어져 있으면, 그것은 의미를 지니고 실재인 것처럼 보인다.
지각의 법칙은 진리와 정반대다. 그리고 지식에 대해 참인 것은 지식과 떨어져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참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병의 세상에, 그 모든 형태에 적용되는 답을 주었다. 하나님의 답은, 필요한 시간 안에서 작용하지만, 영원하다.
그러나 이 답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시간의 법칙은 그 작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 답은 이 세상 안에 있지만 그 일부는 아니다. 이 답은 실재하며, 모든 실재가 있어야 할 곳에 머물기 때문이다.
생각은 자신의 근원을 떠나지 않으며, 그 결과는 다만 근원과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생각은 마음에 속한다. 밖으로 투사되어 마음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전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의 결과이며 자신의 근원을 떠난 적이 없다.
하나님의 답은 죄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놓여 있다. 오직 그곳에서만 그 결과가 원인 없이 완전히 되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각의 법칙은 뒤집혀야 한다. 지각의 법칙은 진리의 법칙이 뒤집힌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법칙은 영원히 참일 것이며 뒤집힐 수 없지만, 거꾸로인 것처럼 보일 수는 있다.
2) 하나 되려는 소망
그리고 이것은 그 뒤집힘의 환영이 놓인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잡혀야 한다. 하나의 환영이 나머지보다 진리에 덜 순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환영들에는 더 큰 가치가 주어지고, 치유와 도움을 위해 진리에 덜 기꺼이 내주어지는 것은 가능하다. 어떤 환영에도 조금의 진리도 없다. 그러나 어떤 환영들이 다른 환영들보다 더 참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분명 조금도 말이 되지 않는데도 그렇다.
환영의 위계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호일 뿐, 실재가 아니다. 선호가 진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환영은 환영이며 거짓이다. 그대의 선호는 그것들에게 아무 실재성도 주지 못한다. 어느 것 하나 어떤 식으로든 참이 아니며, 모두가 하나님이 그것들 모두에게 답으로 준 것에 똑같이 쉽게 굴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다. 그리고 그의 뜻에 반하는 듯 보이는 어떤 소망도 진리 안에 아무 근거가 없다.
죄는 바로잡음을 넘어 불가능함에까지 이르므로 실수가 아니다. 그러나 죄가 실재한다는 믿음은 몇몇 실수를 영원히 치유의 희망 너머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지옥의 지속적인 근거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천국에 자신만큼이나 실재하는 자신의 반대편이 맞서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둘로 쪼개질 것이고, 모든 창조는 하나님이 조바심을 내어 세상을 갈라놓고 공격을 자신에게 떠넘길 때까지 서로 대립하는 두 힘의 법칙 아래 놓일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잃고, 죄가 하나님에게서 그 실재성을 빼앗아 마침내 하나님의 사랑을 복수의 발치에 가져다 놓았다고 선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미친 그림에는 미친 방어가 예상될 수 있지만, 그런 방어로 그 그림이 참이라는 것이 세워질 수는 없다.
의미가 없는 곳에서는 그 무엇도 의미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리고 진리는 자신을 참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방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환영에는 증인도 결과도 없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자는 다만 속은 것일 뿐이다. 용서만이 여기서 유일한 기능이다. 용서는 죄가 지배한다고 여겨졌던 하나님의 아들의 모든 측면에 이 세상이 부정하는 기쁨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한다.
그대는 아마 죄책감의 안개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모든 신념을 끝내는 데 용서가 하는 역할을 보지 못할 것이다. 죄란 그대가 그대의 형제와 그대 자신 사이에 부과하는 신념이다.
이 신념들은 그대를 시간과 장소에 가두며, 그대에게 작은 공간을, 그에게 또 다른 작은 공간을 준다. 이렇게 갈라놓는 것은, 그대의 지각 안에서, 분명히 분리되고 떨어져 있는 하나의 것인 몸으로 상징된다. 그러나 이 상징이 나타내는 것은 다만 떨어져 분리되어 있고 싶어 하는 그대의 소망일 뿐이다.
용서는 그대의 형제와 그대 자신 사이에 서 있는 것을 거두어 낸다. 그것은 그대가 그와 합쳐지고 떨어져 있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우리는 용서를 "소망"이라고 부른다. 용서가 여전히 다른 선택들을 떠올리며 아직 선택의 세상을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망은 천국의 상태와 일치하며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지 않는다. 이 소망이 그대에게 온전한 유산을 주기에는 한참 못 미친다. 그래도 이 소망은 그대가 그대가 있는 천국과 그대가 어디에 있고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 사이에 놓아둔 장애물을 거두어 내기는 한다.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될 수 있고, 그래서 부정되기 전에는 알려졌었다 해도 알려지지 않게 될 수 있다. 완전하고 온전한 구원이 청하는 것은 다만 이것뿐이다. 참인 것이 참이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 거기 없는 것을 눈감아 줄 작은 기꺼움, 죽음과 황폐함이 지배하는 듯 보이는 이 세상보다 천국을 선호한다고 말하는 작은 탄식이다.
기쁜 응답으로 창조가 그대 안에서 일어나, 그대가 보는 세상을 온전히 완전하고 온전한 천국으로 대체할 것이다. 진리가 참이기를 바라는 기꺼움이 아니라면 용서가 무엇이겠는가?
자기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나 됨에서 무엇이 치유되지 않고 부서진 채로 남을 수 있겠는가? 죄는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소망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임을 지각하는 그 순간 모든 기적이 가능해진다.
3) 하나 된 원인 결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 모든 것을 갖기를 뜻한다. 그리고 아들을 모든 것으로 창조했을 때 이것을 보장했다.
그대가 가진 것이 그대인 것이라면, 그 무엇도 잃어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창조가 그대의 기능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 나누게 된 기적이다.
창조는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이해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너무 많이 청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적게 청한다. 아들은 자신만의 작은 보물 하나를 찾기 위해 모든 것과 함께 자신의 정체성을 희생시키려 한다.
그리고 그는 고립감과 상실감과 외로움 없이는 이것을 할 수 없다. 바로 이 고립감과 상실감과 외로움이 그가 찾으려 애써 온 보물이다. 그리고 그는 그 보물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이 보물인가? 불확실함이 그대가 원하는 것일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그대의 뜻과, 그대가 참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실수인가?
그 오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오류가 지켜지지 않고 바로잡힐 수 있도록.
죄란 공격이 그 믿음이 생겨난 마음 밖으로 투사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여기에 생각이 자신의 근원을 떠나 실재하고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확고한 확신이 있다.
그리고 이 오류로부터 죄와 희생의 세상이 일어난다. 이 세상은 공격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대의 순수함을 증명하려는 시도다. 이 시도의 실패는, 그대가 이유도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는 데 있다.
결과는 자신의 근원과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대가 통제하거나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떨어뜨려진 결과는 결코 합쳐질 수 없다.
원인과 결과는 하나이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은 그대가 언제나 참이었던 것 — 그가 그대를 자신의 일부로 창조했다는 것, 그리고 생각이 자신의 근원을 떠나지 않기에 이것은 여전히 참일 수밖에 없다는 것 — 을 배우기를 뜻한다.
창조의 법칙이 그러하다 — 마음이 떠올리는 각 생각은 그 풍요로움을 더할 뿐, 결코 빼앗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뜻해진 것만큼이나 헛되이 바라는 것에도 똑같이 참이다.
마음은 속기를 바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그것이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이 자신의 근원을 떠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성공 없이 환영을 참으로 만들자고 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속이려는 시도에서 성공은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가 분리된 채로 있지 않고 함께 모일 때 기적은 가능하다. 원인 없이 결과만
치유하는 것은 그저 결과를 다른 형태로 옮길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해방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완전한 구원과 죄책감으로부터의 벗어남 말고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여전히 자신이 얼마간의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며 그 어떤 손실로도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작은 희생 하나는 그 결과에 있어서 희생이라는 생각 전체와 똑같다. 어떤 형태로든 손실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불완전해져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다.
아들은 자기 자신을 알지도 못할 것이며, 자신의 뜻을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자기 자신을 저버렸고, 그 둘 다를 미움 속에서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다.
4) 십자가형 안의 해방
환영은 섬기도록 만들어진 목적을 섬긴다. 그리고 그 목적에서 환영들은 자신이 지닌 듯 보이는 그 어떤 의미든 끌어낸다.
하나님은 만들어진 모든 환영에, 어떤 형태를 취하든 하나의 기적을 정당화할 또 다른 목적을 주었다. 모든 기적 안에 모든 치유가 놓여 있다. 하나님은 그 환영들 모두에게 하나로서 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인 것은 똑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대가 같은 것을 다르다고 믿는다면 그대는 다만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라고 부르는 것은 영원히 하나일 것이며,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로 합쳐져 있다 — 그렇게 창조되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기적은 다만 그대의 아득한 이름을 부를 뿐이며, 진리가 그대의 기억 안에 있기에 그대는 그 이름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이 이름을 향해 그대의 형제는 자신의 해방과 그대의 해방을 청한다. 천국은 하나님의 아들 위에 빛나고 있다.
그를 부정하지 말라, 그래야 그대가 해방될 수 있다. 매 순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는 죽지 않기로 선택할 때까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해치고 싶은 모든 소망 안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해 뜻하는 것 대신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매 순간은 그에게 생명을 내놓는다. 그의 아버지가 그가 살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십자가형 안에 해방이 놓여 있다. 고통이나 괴로움이 없는 곳에는 치유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용서는 어떤 형태의 공격에도 답이 된다.
그렇게 공격은 그 결과를 빼앗기고, 미움은 사랑의 이름으로 응답받는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형과 지옥과 죽음에서 구하도록 그대에게 주어졌으니, 그대에게 영원한 영광이 있기를. 하나님이 그렇게 되기를 뜻했기에 그대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을 구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의 손 안에 모든 구원이 놓여 있어, 하나로서 내주어지고 받아들여진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힘을, 그가 쓰이기를 바라는 대로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이 그대를 창조한 그대로인 것도, 그가 자신의 아들의 모든 실수에 답하고 그를 자유롭게 하려고 준 것을 사용하는 것도 오만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준 그 힘을 내려놓고, 그가 뜻하는 것 대신 하찮고 무의미한 소망을 선택하는 것은 오만이다.
그대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은 무한하다. 그 선물이 답할 수 없는 상황은 없으며, 그 은혜로운 빛 안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도 없다. 하나님이 그대가 있기를 바라는 그 평화 안에 머물라.
그리고 그대의 형제가 그대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 평화를 찾는 수단이 되라. 죄와 죽음의 세상에 축복을 가져다주는 데 함께 하나가 되자. 우리 각자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들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특별함이 부정하는 그 하나 됨이 그들 모두를 구할 것이다. 하나인 것에는 특별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 각자에게 속한다. 형제와 그의 것 사이에는 아무 소망도 놓여 있지 않다. 하나에게서 얻는 것은 그들 모두에게서 빼앗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를 축복하는 것은 그들 모두에게 하나로서 축복을 내주는 것이다.
그대의 아득한 이름은, 모든 이의 이름이 그대에게 속하듯, 모든 이에게 속한다. 그대의 형제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면 하나님이 응답할 것이다. 그대가 부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이미 응답한 하나님이 응답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기적은 아무 변화도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기적은 언제나 참이었던 것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알아보이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저 스스로 있게 된 진리의 이 작은 선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자신으로 있도록 허락받고, 모든 창조는 하나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자유로워진다.
5) 즉각적인 구원
그대에게 남은 단 하나의 문제는, 그대가 용서하는 시간과 그대의 형제를 신뢰함으로써 오는 혜택을 받게 될 시간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 간격은 다만 그대와 그대의 형제 사이에 그대가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싶어 하는 그 작은 것을 반영할 뿐이며, 그것으로 그대와 그가 조금이나마 분리되게 하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환영이며,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 너머로 투사된 간격을 그대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간격이 제자리에 가까이 옮겨질수록, 그대는 더 공간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대는 그대의 형제로부터 간직하고 싶어 하는 거리가 있으며, 그대는 여전히 자신이 그의 밖에 있다고 믿기에 이 공간을 시간으로 지각한다. 이것은 신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대는 신뢰가 지금 모든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그대는 분리된 것으로 지각되는 이해관계를 조금이나마 조심하고 조금이나마 경계하며 남아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지각으로는 그대는 용서가 지금 내놓는 것을 얻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 선물을 주고받는 사이에 놓여 있다고 그대가 생각하는 그 간격은, 그대가 희생하고 손실을 겪는 시간처럼 보인다.
그대는 즉각적인 결과가 아니라 결국에 이르는 구원을 본다. 구원은 즉각적이다.
그대가 그렇게 지각하지 않는 한, 그대는 구원의 목적이 그대의 것이 되는 시간과 그 결과가 그대에게 오게 될 시간 사이에 큰 손실의 위험이 있다고 믿으면서, 구원을 두려워할 것이다.
이런 형태 안에는 두려움의 근원인 그 오류가 여전히 가려져 있다. 구원은 그대가 여전히 그대들 사이에서 보는 그 공간을 지워 없애, 그대가 즉시 하나가 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그대가 손실이 있으리라고 두려워하는 자리가 있다. 이 두려움을 시간에 투사하지 말라. 시간은 그대가 지각하는 그런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대가 무엇을 위해 보는가라는 점을 제외하면, 몸만큼이나 중립적이다. 그대가 그대와 그대의 형제 사이에 여전히 작은 공간을 간직하고 싶어 한다면, 그대는 용서가 잠시 보류되는 약간의 시간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만 용서가 보류되는 시간과 용서가 주어지는 시간 사이의 그 간격을 위험해 보이게 만들 뿐이며, 그 공포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대와 그대의 형제 사이의 공간은 오직 지금인 현재 안에서만 나타나며, 미래의 시간 안에서는 지각될 수 없다. 또한 현재 안에서가 아니면 그 공간을 눈감아 줄 수도 없다. 미래의 손실은 그대의 두려움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합쳐짐이 그대의 두려움이다. 지금 말고 누가 황량함을 느낄 수 있겠는가? 미래의 원인은 아직 아무 결과도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두려워한다면 현재의 원인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잡음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지, 미래의 상태가 아니다.
그대가 안전을 위해 세우는 계획은 모두 그대가 계획할 수 없는 미래 안에 놓여 있다. 미래에는 아직 아무 목적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일어날 일에도 아직 아무 원인이 없다. 원인 없이 누가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결과들이 원인이 있었고 지금 재앙적이라고 판단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누가 결과를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죄에 대한 신념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그 원인과 마찬가지로 앞을 보고 뒤를 보지만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지나쳐 본다.
그러나 그 결과가 이미 두려운 것으로 판단되었다면, 그 원인은 오직 지금 여기에만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원인을 지나쳐 봄으로써, 그것은 치유에서 지켜지고 떨어져 있게 된다.
기적은 지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여기, 현재의 은총 안에, 죄와 두려움이 지나쳐 보았지만 시간의 전부인 그 유일한 시간의 간격 안에 서 있다.
모든 바로잡음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시간이 전혀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루어짐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영원히 걸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성령이 그대의 관계에 가져온 목적의 변화는 그 안에 그대가 보게 될 모든 결과를 담고 있다. 그것들은 지금 바라볼 수 있다. 그것들이 이미 거기 있는데도 시간 안에서 펼쳐지기를 기다리며 그것들이 오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대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이 선을 가져다준다고 들었다. 그러나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재앙의 형태를 띤 선은 미리 믿기 어렵다.
또한 이 생각에는 사실 아무 이치도 없다. 선이 왜 악의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가? 그리고 그렇다면 그것은 속임수가 아닌가?
선이 조금이라도 나타난다면, 그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왜 그 결과는 뚜렷하지 않은가? 왜 미래에 있는가? 그리고 그대는 한숨과, 지금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이해할 것이라는 "추론"으로 만족하려 한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 의미가 분명해질 것이다. 이런 추론은 이성이 아니다. 그 추론은 부당하며, 해방의 때가 이를 때까지 분명히 처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을 향한 목적의 변화가 주어졌다면, 재앙이 닥치는, 언젠가 "선"으로 지각되지만 지금은 고통의 형태로 지각되는 그런 간격이 있을 이유가 없다. 이것은 지금의 희생이며,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이 준 것에 대해 성령이 요구할 대가일 수 없다. 그러나 이 환영에는, 참은 아니지만, 이미 그대의 마음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다.
그리고 이 환영은 그 원인이 만들어 내는 결과 하나이며, 그 결과가 지각되는 한 형태일 뿐이다. 응보가 "선"이 나타나는 형태로 지각되는 이 시간의 간격은,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채 그대들 사이에 놓여 있는 그 작은 공간의 한 측면일 뿐이다.
미래의 행복으로 만족하지 말라. 그런 행복에는 아무 의미도 없으며, 그것은 그대의 정당한 보상도 아니다. 그대에게는 지금 자유를 위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죄수의 형태로 있는 자유가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왜 구원이 죽음으로 가장되어야 하는가? 미룸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추론"은 현재 원인의 결과가 미래의 어느 시간까지 미루어져야 유지된다고 말하지만, 이는 결과와 원인이 하나로 와야 한다는 사실을 다만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시간을 바라보지 말고, 여전히 그대들 사이에 놓여 있어 벗어나야 할 그 작은 공간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 공간이 형태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알아보이지 않게 되어 그렇게 보존되면서 시간으로 가장되게 하지 말라. 성령의 목적은 이제 그대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