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죄의 자리를 비우는 용서
1) 영광의 세상으로
용서는 이 세상에서 천국의 정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의 세상을, 그 너머에 아무런 한계도 없는 그 문 저편에서 정의가 비칠 수 있는 단순한 세상으로 옮겨 놓는다. 무한한 사랑 안에는 용서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 그리고 세상 안에서의 자비는 천국으로 통하는 그 문 너머의 단순한 정의에 자리를 내준다. 누구도 그가
죄를 믿었고 여전히 자신에게 용서받아야 할 것이 많다고 믿지 않는 한, 용서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용서는 그가 용서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음을 배우는 수단이 된다.
용서는 언제나 용서를 내놓는 사람 위에 머무르며, 그가 자신에게 더는 용서가 필요 없다고 볼 때까지 그러하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자신의 참된 기능인 창조로 돌아가며, 그의 용서는 창조를 다시 그에게 내놓는다.
용서는 죄의 세상을 보기에 경이로운 영광의 세상으로 바꾼다. 모든 꽃은 빛 속에서 빛나고, 모든 새는 천국의 기쁨을 노래한다.
여기에는 슬픔도 이별도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서받은 것은 합쳐질 수밖에 없다. 그것들을 갈라놓고 떨어뜨려 놓을 그 무엇도 사이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죄 없는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임을 지각할 수밖에 없다. 서로를 밀어낼 그 무엇도 사이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가 비워 놓은 그 자리에서, 그들은 하나로 합쳐지며, 자신들의 일부가 떨어져 나뉘어 있던 것이 아니었음을 기쁘게 알아본다.
그대가 서 있는 그 거룩한 자리는 다만 죄가 떠난 그 자리다. 그리고 여기서 그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본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서도 그의 아버지가 참으로 어떤 존재인지 떠올리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사랑을 두려워하면서, 죄가 자리를 비워 둔 그 땅 위에 서 있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 자리는 천국의 제단이 일어나 세상 위로 멀리 솟아오르고, 우주 너머로 뻗어 모든 창조의 심장에 닿을 곳이다. 천국이란 창조된 모든 것이 자신의 창조의 근원에게 바치는 감사와 사랑과 찬미의 노래 말고 무엇이겠는가?
가장 거룩한 제단은 한때 죄가 있다고 믿어졌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다. 그리고 여기로 천국의 모든 빛이 와서 다시 불붙고 기쁨 속에서 더욱 늘어난다. 여기서 잃었던 것이 천국의 빛들에게 되돌려지고, 그 빛들의 모든 광채가 다시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용서는 천국의 문 앞에 내놓을, 결코 작지 않은 기적들을 가져온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와서, 그를 그의 집에 더 가까이 데려다주는 선물 하나하나를 받는다. 단 하나도 잃어지지 않으며,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더 소중히 여겨지지 않는다. 각각은 나머지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그에게 자신의 아버지의 사랑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각각은 그가 두려워했던 것을 그가 가장 사랑한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친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랑은 두려워할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하도록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기적 말고 무엇이겠는가?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기적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대들 사이의 공간을 사라지게 하는 데 그 밖에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한때 죄가 지각되었던 곳에서 진리의 제단이 될 세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는 그곳에서 천국의 빛들과 합류하여 그 빛들의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그 빛들이 완전해지기 위해 그대에게 오듯, 그대도 그 빛들과 함께 갈 것이다.
이는 천국의 노래를 듣고서 그 노래에 자신의 힘을 더하여 더욱 달콤하게 만드는 목소리 없이 남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는 죄가 자신의 것이라고 선포했던 그 작은 자리 안에 세워진 제단에서 함께 노래한다. 그리고 그때는 작았던 것이 우주가 단 하나의 목소리로 합류한 그런 크기의 노래로 솟아올랐다.
그대와 그대의 형제 사이에 여전히 서 있는 이 작은 죄의 자리는 천국의 문이 행복하게 열리는 것을 여전히 가로막고 있다. 천국의 부유함을 그대에게서 가로막는 그 방해물은 얼마나 작은가. 그리고 그대가 하나님의 사랑을 향한 그 웅장한 합창에 합류할 때 천국의 기쁨은 얼마나 클 것인가!
2) 이미 지나간 시간
기적이 모두 똑같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작은 방해물이 참으로 크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기적이 모두 똑같음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 과정의 목적이다. 이것이 그 유일한 목적이니, 배워야 할 것은 오직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기적이 모두 똑같다는 것을 여러 다른 방식으로 배울 수 있다. 모든 배움은 천국의 문에 도움이 되거나 방해가 된다. 그 사이의 것은 있을 수 없다.
교사는 오직 둘뿐이며, 두 교사는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가 선택한 교사가 이끄는 길을 따라갈 것이다.
시간이 남아 있고 선택이 의미를 지니는 동안 그대가 취할 수 있는 방향은 오직 둘뿐이다. 천국으로 가는 길 말고는 결코 다른 길이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다만 천국을 향해 갈지, 아니면 아무 데도 아닌 곳을 향해 갈지를 선택할 뿐이다.
선택할 다른 것은 없다. 시간 말고는 결코 아무것도 잃어지지 않으며, 시간은 결국 무의미하다.
시간은 영원에 대해서는 그저 작은 방해물일 뿐이며, 세상의 참된 교사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그대는 시간을 정말 믿고 있다. 그렇다면 배움이 이룰 수 있는 목표만큼이나 높은 목표에 이르는 데 시간을 쓸 수 있는데도, 왜 아무 데도 아닌 곳으로 가는 데 낭비해야 하는가?
천국의 문으로 가는 길이 조금이라도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라. 확실한 목적과 높은 결의와 행복한 확신을 지니고, 그대의 형제의 손을 잡고 천국의 노래에 발맞추어 그대가 착수하는 그 무엇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하고 아무 목적도 없는 길을 홀로 비참하게 헤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하나님은 그대가 만든 교사와 충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가 만든 교사를 대신하기 위해 자신의 교사를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대신하려던 것은 이미 대신되었다.
시간은 그대의 마음 안에서 오직 한순간만 지속되었으며, 영원에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시간은 지나갔으며, 모든 것은 무로 가는 길이 만들어지기 전과 정확히 똑같다.
첫 번째 실수가 저질러진 그 짧은 시간의 째깍임 안에는 그 하나의 실수와 그 안에 담긴 모든 실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째깍임은 그 실수에 대한 바로잡음과 그 첫 실수 안에서 나온 모든 실수에 대한 바로잡음 또한 함께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안에서 시간은 사라졌다. 그 순간이 시간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답한 것은 답해졌고 사라졌다.
성령은 여전히 자신이 시간 안에 살고 있다고 믿으며 시간이 사라졌음을 알지 못하는 그대를, 한없이 작고 무의미한 미로를 통해 여전히 이끈다. 그 미로는 그대가 여전히 시간 안에서 지각하고 있지만,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대는 자신이 과거 안에 산다고 생각한다. 그대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그 모든 것의 비실재성이 진리에 자리를 내주기 오래전, 오직 한순간만 그대가 본 것이다. 그대의 마음 안에 여전히 답해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환영은 단 하나도 없다.
불확실함이 확실함으로 옮겨진 지 너무나 오래되어, 마치 여전히 그대 앞에 있는 것처럼 불확실함을 마음에 품고 있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대가 간직하여 영원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그 짧은 순간은, 왔었다는 것을 그 무엇도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천국 안에서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다. 하나님의 아들의 단순한 지식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빨리 사라져 버린 것이, 그대가 그 순간을 자신의 교사로 선택할 만큼 여전히 거기 있을 리 없다.
이 세상은 오직 아득한 과거 안에서만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 과거는 창조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의 세상을 만들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 간격은 너무나 아득한 과거의, 너무나 짧은 시간의 간격이었기에, 천국의 노래에서 단 하나의 음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행동이나 생각 하나하나, 모든 심판, 그리고 죄에 대한 모든 신념 안에서, 세상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던 그 한순간은 여전히 다시 불려 나온다. 마치 시간 안에서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대는 아득한 기억을 자신의 눈앞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오직 기억 속에서만 사는 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그가 서 있는 그 자리에 방해가 되는가? 그가 들을지도 모를 과거의 어떤 메아리가, 지금 그가 있는 그곳에서 들을 것에 대한 사실인가? 그리고 시간과 장소에 대한 그 자신의 환영이 그가 실제로 있는 곳에 얼마만큼의 변화를 미칠 수 있겠는가?
용서받지 못한 것은 영원히 지나가 버린 과거로부터 부르는 목소리다. 그리고 그것을 실재라고 가리키는 모든 것은 다만 소망일 뿐이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 다시 실재로 만들어져, 참으로 지금 여기인 것 대신 지금 여기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소망일 뿐이다. 과거가 지나갔고 그대에게 되돌아올 수 없다는 진리에 이 소망이 방해가 되는가?
그리고 그대는 천국이 사라지는 듯 보이고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그대의 미움의 상징이 되었던 그 두려운 순간이 간직되기를 바라는가? 이미 오래전에 바로잡히고 되돌려진 그 공포의 시간을 잊으라.
죄가 하나님의 뜻에 맞설 수 있는가? 과거를 보고 현재에 가져다 놓는 것이 그대에게 달려 있을 수 있는가? 그대는 되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과거의 방향을 가리키는 모든 것은 그저 그대를, 그 성취가 비실재일 수밖에 없는 사명 위에 올려놓을 뿐이다.
그대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가 그대에게 반드시 오도록 확실히 한 정의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대 자신에 대한 그대 자신의 부당함으로부터 그대를 지켰다. 그대는 자신의 길을 잃을 수 없다. 아버지의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으며,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 말고는 그대가 갈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이 오래전에 지나간 시간의 기억일 뿐인 길에서 길을 잃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이 과정은 오직 지금인 것만을 그대에게 가르칠 것이다. 아득한 과거의 끔찍한 한순간은, 이제 완전히 바로잡혔으니, 아무 걱정거리도 가치도 없다.
죽어 지나간 것은 평화롭게 잊히게 하라. 부활이 그 자리를 대신하러 왔다. 그리고 이제 그대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의 일부다.
과거의 그 어떤 환영도 그대를 죽음의 자리에 붙들어 둘 힘이 없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한순간 들어갔다가 즉시 자신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으로 회복된 무덤이다. 그리고 그가 이미 오래전에 벗겨져 그의 마음에서 영영 사라진 사슬에 묶여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창조한 아들은 하나님이 그를 창조한 그대로 자유롭다.
하나님의 아들은 살기 대신 죽기를 선택한 바로 그 순간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대는 이제 그를 용서하지 않겠는가, 그가 하나님이 기억하지도 않고 거기 있지도 않은 과거에 실수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3) 과거와 현재의 다리
이제 그대는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때로는 과거가 마치 현재인 것처럼 실재로 보인다. 과거로부터의 목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의심받는다. 그대는 여전히 환각을 보지만 자신이 지각하는 것에 확신이 없는 자와 같다.
이곳은 두 세상 사이의 경계지대, 곧 과거와 현재 사이의 다리다. 여기서는 과거의 그림자가 남아 있지만, 여전히 현재의 빛이 어렴풋이 알아보인다.
일단 보이고 나면, 이 빛은 결코 잊힐 수 없다. 그것은 그대를 과거에서 벗어나 그대가 참으로 있는 현재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그림자 목소리는 시간의 법칙도 영원의 법칙도 바꾸지 않는다. 그림자 목소리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서 오며, 지금 여기의 참된 존재를 방해하지 않는다.
실재 세계는, 시간과 죽음이 실재하며 지각될 수 있는 존재를 지닌다는 환각의 두 번째 부분이다. 이 끔찍한 환영은, 하나님이 모든 시간과 모든 상황에 대한 환영에 자신의 답을 주는 데 걸린 그 시간 동안만 부정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 이 환영은 더는 거기 있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았다.
매일, 그리고 매일의 매 순간, 그리고 매 순간이 담고 있는 매 찰나마다, 그대는 다만 공포의 시간이 사랑을 대신했던 그 단 하나의 순간을 다시 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대는 다시 살기 위해 매일 죽으며, 전혀 틈이 아닌 과거와 현재 사이의 그 틈을 건너기까지 그렇게 한다. 모든 삶이 그러하다. 태어남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다시 삶으로 이어지는 겉보기 간격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다시 살 수 없는 한순간의 되풀이다.
그리고 모든 시간은 다만 이미 끝난 것이 여전히 지금 여기 있다는 미친 신념일 뿐이다.
과거를 용서하고 지나가게 하라, 과거는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대는 더는 두 세상 사이에 놓인 땅 위에 서 있지 않다. 그대는 나아가, 천국의 문에 놓인 세상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뜻에는 아무 방해도 없으며, 이미 오래전에 끝난 여정을 다시 되풀이할 필요도 없다. 그대의 형제를 부드럽게 보라. 그리고 그대의 미움에 대한 지각이 사랑의 세상으로 바뀐 세상을 바라보라.
4) 유일한 친구
그대가 좋고 가치 있으며 애쓸 만하다고 믿는 이 세상의 그 무엇이든 그대를 해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런 것에 해칠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대가 그것이 환영일 뿐임을 부정하고 실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환영은 그대에게 실재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환영의 지각된 실재성을 통해 병든 환영의 세상 전체가 들어왔다.
죄에 대한, 공격의 힘에 대한, 상처와 해에 대한, 희생과 죽음에 대한 모든 신념이 그대에게 왔다. 하나의 환영을 실재로 만들면서 나머지를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호하는 것들만 간직하기로 선택하면서 오직 진리만이 줄 수 있는 안전을 찾을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환영들이 모두 같다고 믿으면서도 그중 하나가 최선이라고 계속 주장할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하나의 환영을 유일한 친구로 삼아 그대의 작은 삶을 고독 속에서 이끌지 말라. 환영을 친구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걸맞은 우정이 아니며, 그가 만족한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더 나은 친구를 주었으니, 그 친구 안에 땅과 천국의 모든 힘이 머문다. 그대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그 하나의 환영은 그 친구의 은총과 위엄을 그대에게서 가리며, 그 친구의 우정과 용서가 그대의 반기는 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 친구 없이는 그대는 친구가 없는 것이다. 그 친구를 대신할 다른 친구를 찾지 말라. 다른 친구는 없다. 하나님이 정한 것에는 대체물이 없다.
어떤 환영이 진리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그림자와 함께 사는 자는 참으로 홀로다. 그리고 외로움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대는 하나님이 그대의 친구를 위해 정한 그 왕좌를 하나의 그림자가 찬탈하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그 그림자의 공허함이 그대의 왕좌 또한 비어 채워지지 않은 채로 남겨 두었음을 그대가 깨닫기만 한다면 말이다.
어떤 환영도 친구로 삼지 말라. 그렇게 하면 그 환영은 하나님이 그대의 친구라 부른 이를 대신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 안에서 그대의 유일한 친구는 바로 그다.
그 친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선물을 그대에게 가져다주며, 오직 그 선물이 주어진 그만이 그대가 그 선물을 받도록 확실히 할 수 있다. 그대가 그의 왕좌 위에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면, 그는 그 선물들을 그대의 왕좌 위에 놓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