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에고를 내려놓는 배움
좋은 교사는 자신의 관념을 분명히 하고, 그 관념을 가르침으로써 강화한다. 교사와 학생은 배움의 과정에서 서로 같다. 교사와 학생은 같은 차원의 배움 안에 있으며, 가르침을 나누지 않는 한 확신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좋은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관념을 믿어야 하지만, 또 하나의 조건도 충족해야 한다. 좋은 교사는 자신이 그 관념을 전하는 학생들도 믿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관념을 지금 이대로 지키고 싶어서 그 관념을 철통같이 지킨다. 배움은 곧 변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변화는 분리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두려운 일이다. 분리된 사람들은 그 변화를 분리를 치유하는 쪽으로의 움직임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리된 사람들은 언제나 그 변화를 더 깊은 분리를 향한 움직임으로 지각한다. 분리야말로 그들이 변화를 처음 경험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의 에고에 그 어떤 변화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면 평화를 찾으리라고 믿는다. 이런 깊은 혼동은, 오직 같은 사고 체계가 두 토대 위에 동시에 설 수 있다고 그대가 주장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 무엇도 에고에서 영에 이를 수 없고, 그 무엇도 영에서 에고에 이를 수 없다. 영은 에고를 강화할 수도, 에고 안의 갈등을 줄일 수도 없다. 에고는 모순이다. 그대의 자아와 하나님의 자아는 서로 대립한다. 이 둘은 근원에서도, 방향에서도, 결과에서도 대립한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화해할 수 없다. 영은 지각할 수 없고 에고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소통하지 않으며 결코 소통할 수 없다.
에고를 만든 자가 잘못 이끌릴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에고는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에고를 만든 자는 생명이 주어진 것을 완전히 생명 없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영은 가르침이 필요 없지만 에고는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배움은 궁극적으로 두려운 것으로 지각된다. 이는 배움이 에고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빛에 내어놓는 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에고는 나의 자비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에고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변화다.
나의 가르침도 그대의 가르침과 같았고, 나는 그 가르침을 배웠기에 그 가르침을 가르칠 수 있다. 나는 결코 그대의 에고를 공격하지 않겠지만, 에고라는 사고 체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그대에게 가르치려 한다. 내가 그대에게 그대의 참된 창조를 일깨워 줄 때, 그대의 에고는 두려움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가르침과 배움은 지금 그대의 가장 큰 힘이다. 이는 가르침과 배움이 그대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바꾸고 다른 사람도 마음을 바꾸도록 도울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대가 마음을 바꾸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분리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입증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꿈을 꾸는 동안 그 꿈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꿈꾸는 사람은 실제로 자신의 갈라진 마음을 치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분리된 에고에 관한 꿈을 꾸고, 그 꿈 위에 서 있는 세상을 믿는다. 이는 그대에게는 매우 실재하는 일이다. 그대는 그 꿈에 관한 마음을 바꾸지 않고서는 그 꿈을 되돌릴 수 없다.
그대가 자신의 사고 체계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내려놓고 그 사고 체계를 나에게 열어 준다면, 나는 매우 부드럽게 그 사고 체계를 바로잡고 그대를 하나님에게로 다시 이끌 것이다.
모든 좋은 교사는 자신이 배운 것을 학생들에게 충분히 전해 주어, 언젠가 학생들이 더 이상 교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교사의 유일하고 참된 목표다.
에고에게 이 목표를 납득시키기는 불가능하다. 이는 에고 자신의 모든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은 법을 만든 사람이 믿는 체계의 연속성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대가 에고를 만든 이상 에고가 자신을 지키려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대가 그 법칙을 믿지 않는 한 그 법칙에 복종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에고는 자신의 기원의 본성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 자신의 기원의 본성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에고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서로 충돌할 수 있지만, 영은 결코 충돌할 수 없다. 그대가 어떤 교사를 그저 "더 큰 에고"로 지각한다면 그대는 두려워질 것이다. 에고를 키우는 것은 분리에 대한 불안을 늘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나와 함께 생각한다면 나는 그대와 함께 가르치고 그대와 함께 살겠지만, 나의 목표는 언제나 그대를 마침내 교사에 대한 필요에서 풀어 주는 것이다.
이는 에고 중심적인 교사의 목표와는 정반대다. 그런 교사는 다른 에고들에게 미치는 자기 에고의 영향에 관심을 두며, 그래서 에고들의 상호작용을 에고를 보존하는 수단으로 해석한다. 만약 내가 이렇게 믿었다면 나는 가르치는 일에 헌신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대도 그렇게 믿는 한 헌신적인 교사가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추앙받거나 배척당해야 할 교사로 지각되지만, 나는 그 어느 쪽 지각도 나 자신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대의 가치는 가르침이나 배움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그대의 가치는 하나님이 세운다. 그대가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그대가 하는 모든 일은 두려움에 차 있을 것이며, 특히 우월함과 열등함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교사는 참을성이 있어야 하며, 그 가르침이 습득될 때까지 되풀이해야 한다.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려 한다. 나에게는 그대의 배움에 한계를 정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대가 하거나 생각하거나 바라거나 만드는 그 무엇도 그대의 가치를 세우는 데 필요하지 않다. 이 점은 망상 안에서가 아니고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대의 에고는 결코 위태로워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에고를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영은 결코 위태로워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영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한 그 어떤 혼동도 망상이며, 이 망상이 지속되는 한 그 어떤 형태의 헌신도 불가능하다.
에고는 자신의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상황을 자기 자신을 향한 찬사의 형태로 이용하려 한다. 그대가 에고의 존재를 믿는 한 에고는 계속 의심에 차 있을 것이다. 에고를 만든 그대는 에고를 신뢰할 수 없다. 그대의 바른 마음 안에서는 에고가 실재하지 않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온전한 해법은 실재를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재를 바꾸려는 시도는 참으로 두려운 시도다. 그대는 실재의 일부이며, 실재는 그대의 에고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변함없이 서 있지만 영에게는 손쉽게 닿는다.
그대가 두려울 때,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실재임을 알라. 그리고 그대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의 사랑받는 아들이다. 그대의 에고가 이를 반박하게 두지 말라, 에고는 그대만큼이나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두려움의 창시자가 아니다. 그대가 두려움의 창시자다. 그대는 하나님과 다르게 창조하기로 선택했고, 그래서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어 냈다.
그대가 평화롭지 않은 것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대에게 매우 숭고한 역할을 주었지만 그대는 그 역할을 다하고 있지 않다. 그대의 에고는 그 역할을 다하는 대신 두려워하기를 선택했다. 그대가 깨어나면 그대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을 텐데, 이는 말 그대로 믿기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 믿기지 않는 일을 믿지 말라. 그것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려는 그 어떤 시도도 다만 피할 수 없는 일을 미루는 것일 뿐이다.
"피할 수 없는"이라는 말은 에고에게는 두렵지만 영에게는 기쁘다. 하나님은 피할 수 없으며, 그대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도 그대를 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에고가 영의 기쁨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대가 일단 그 기쁨을 경험하고 나면 에고에게서 모든 보호를 거두어들이고 두려움에 대한 그 어떤 투자도 완전히 그만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대의 투자가 큰 것은 두려움이 분리를 증언하기 때문이며, 그대가 두려움을 증언할 때 그대의 에고는 기뻐한다.
두려움을 뒤에 남겨 두라! 두려움에 귀 기울이지 말고 두려움을 보존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에게만 귀 기울이라,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영과 마찬가지로 속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을 풀어 주고 다른 사람도 풀어 주라. 다른 사람에게 그대 자신의 거짓되고 하찮은 모습을 보여 주지 말고, 그대 자신도 그들에 대해 그런 모습을 받아들이지 말라.
에고는 그대를 위해 초라하고 비바람을 가려 주지 못하는 집을 지어 왔다. 이는 에고가 그렇게밖에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궁핍한 집을 애써 떠받치려 하지 말라. 그 집의 허약함이 곧 그대의 힘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창조물에게 걸맞은 집을 지을 수 있는데, 그들은 스스로 그 집을 버림으로써 그 집을 비워 두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며, 그대가 들어가기로 선택할 때 그대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만은 그대가 완전히 확신해도 된다. 하나님이 소멸하는 것을 창조할 수 없는 것은 에고가 영원한 것을 만들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대의 에고에 관해서는 그대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대의 영에 관해서는 그대는 둘 다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겸손은 에고를 위한 가르침이지 영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영은 겸손을 넘어서 있다. 영은 자신의 광채를 알아보고 어디에서든 기꺼이 그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가 땅을 물려받는 것은 자신의 에고가 겸손하기 때문이며, 이 겸손이 온유한 자에게 더 참된 지각을 준다.
하늘나라는 영의 권리이며, 그 아름다움과 존엄은 의심과 지각을 훨씬 넘어서 있고,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 곧 오직 그에게만 온전히 걸맞은 그의 창조물을 향한 사랑의 표징으로 영원히 서 있다. 그 외의 그 무엇도 하나님 자신의 창조물을 위한 선물이 되기에 충분히 걸맞지 않다.
나는 그대가 원한다면 그대의 에고를 대신하겠지만, 결코 그대의 영을 대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책임감을 보여 온 형인 형제에게 자녀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 그렇게 해도 그 자녀의 근원에 관한 그 어떤 혼동도 생기지 않는다. 그 형제는 자녀의 몸과 에고를 보호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신을 아버지와 혼동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그대의 몸과 에고를 맡길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가 몸과 에고에 마음 쓰지 않아도 되고, 내가 그대에게 몸과 에고의 하찮음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한때 몸과 에고를 믿으려는 유혹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면, 나는 몸과 에고가 그대에게 지니는 중요성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함께 이 가르침을 배워, 함께 몸과 에고에서 자유로워지자.
나에게는 마음을 치유하려는 나의 목표를 함께 나누는 헌신적인 교사들이 필요하다. 영은 그대의 보호나 나의 보호가 필요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 세상에서 그대는 환난을 겪을 필요가 없다. 내가 이미 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는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