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희생 너머의 생명

1) 몸이라는 희생

공격의 "역학" 안에서 희생은 핵심 개념이다. 그것은 모든 타협, 흥정을 성사시키려는 모든 필사적인 시도, 그리고 모든 갈등이 겉보기 균형을 이루는 축이다. 그것은 누군가는 반드시 잃어야 한다는 중심 주제의 상징이다.

희생이 몸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뚜렷이 드러난다. 희생은 언제나 손실을 제한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몸 자체가 하나의 희생이다 — 그대 자신을 위해 조금이나마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힘을 포기하는 것이다. 형제를 그대와 분리된 다른 몸 안에서 보는 것은, 그의 작은 부분만을 보고 나머지는 희생시키고 싶어 하는 소망의 표현이다.

세상을 보라, 그러면 그대는 자기 자신 너머의 그 무엇에도 이어져 있지 않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겉보기 모든 실체는 조금 더 가까워지거나 조금 더 멀어질 수는 있지만, 합쳐질 수는 없다.

그대가 보는 세상은 하나 됨의 "희생" 위에 세워져 있다.

그 그림은 완전한 불화합과 전혀 하나 되지 못함를 그린 그림이다. 각 실체 둘레에는 벽이 세워져 있다. 그 벽은 너무나 견고해 보여서, 안에 있는 것은 밖으로 결코 닿을 수 없고, 밖에 있는 것은 벽 안에 갇힌 것과 결코 닿아 합쳐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각 부분은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 다른 부분을 희생시켜야 한다. 부분들이 합쳐진다면 각 부분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것이며, 분리를 통해서만 각자의 자아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몸이 울타리로 둘러친 그 작은 것이 자아가 되며, 나머지 전부를 희생함으로써 그 작은 것은 보존된다. 그리고 나머지 전부는 그 작은 것을 잃어야 하며,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불완전한 채로 남아야 한다.

그대 자신에 대한 이런 지각 안에서는 몸의 상실이 참으로 하나의 희생이 될 것이다. 몸을 보는 것이 희생에 한계가 있고 여전히 그대 혼자만을 위한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은 것이 그대에게 속하도록 하기 위해 밖에 있는 모든 것에 한계가 놓이며, 이는 그대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한계가 놓이는 것과 같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은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대가 보는 각 형제에게 이 한계를 부과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를 그대 자신을 보듯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2) 희생을 요구하는 눈

몸은 하나의 손실이며, 희생당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그대의 형제를 그대와 떨어져 자신의 감방에 갇힌 분리된 몸으로 보는 동안, 그대는 그 형제와 그대 자신 둘 다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 없이 자기 자신을 지각하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이 요구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 없이 있는 것보다? 그러나 모든 희생은 그들이 분리되어 서로 없이 있을 것을 요구한다.

누구에게든 어떤 희생이 요구된다면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 아들이 진리를 아무리 증언한다 해도, 분리된 몸들의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온전함에 대한 어떤 증언이 보이겠는가?

그런 세상에서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의 하나 됨과 사랑의 노래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아들이 세상을 자신의 노래 앞에서 물러가게 하고, 몸의 눈을 그 아들을 보는 시야로 대체하는 것은 그에게 주어져 있다. 환영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증인을 보고자 하는 이들은 다만 세상 안에서, 세상에 뜻과 의미를 주는 목적을 보고자 청할 뿐이다.

그대의 특별한 기능 없이는 이 세상은 그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은 천국 그 자체만큼이나 풍요롭고 무한한 보물창고가 될 수 있다.

여기서는 매 순간 그대 형제의 거룩함을 볼 수 있으며, 그 거룩함은 그대가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행복의 초라한 조각과 자그마한 부스러기 하나하나에 무한한 공급을 더한다. 그대는 하나 됨을 시야에서 놓칠 수는 있어도, 그 실재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

또한 그대는 희생시키고 싶어 하는 것을 잃을 수도 없고, 그것이 잃어지지 않았음을 그대에게 보여 주는 성령의 과업을 막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대의 형제가 그대에게 불러 주는 노래를 들으라.

3) 매 순간 재탄생

그리고 세상이 물러가게 하고, 그 형제의 증언이 평화를 위해 내놓는 안식을 받으라. 그러나 그를 심판하지 말라.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위한 해방의 노래를 듣지 못할 것이며, 그가 증언하도록 주어진 것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보고 그와 함께 기뻐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형제의 거룩함을 죄에 대한 그대의 신념에 대한 희생물로 만들지 말라. 그대는 그 안에서 죽음을 받아 마땅한 죄를 볼 때마다 그의 순수함과 함께 그대 자신의 순수함도 희생시키며, 그때마다 죽는다.

그러나 그대는 매 순간 다시 태어나 다시 생명을 받을 수 있다. 그 형제의 거룩함은 그대에게 생명을 준다. 그의 죄 없음이 하나님에게 알려져 있기에 그대는 죽을 수 없다. 그 형제가 그대 안의 빛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 빛이 꺼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도 그의 거룩함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

생명을 희생시키고 그대의 눈과 귀가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아들의 죽음을 증언하게 하려는 그대여, 하나님이 그 둘이 되기를 뜻하지 않은 것으로 그 둘을 만들 힘이 그대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천국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몸 안에 갇혀 있지 않으며, 홀로 죄에게 희생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가 천국에서 그러하듯, 그는 영원히 어디에서나 그러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히 똑같다. 매 순간 다시 태어나며, 시간에 닿지 않고, 생명이나 죽음의 그 어떤 희생의 손도 미치지 않는 저 너머에 있다. 그는 생명도 죽음도 만들지 않았으며, 자신의 선물이 결코 희생과 손실을 겪을 수 없음을 아는 하나로부터 그 둘 중 하나만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온유함 속에 하나님의 아들 위에 머물며, 세상이 그 아들에게 지우려 할 모든 부당함으로부터 그를 안전하게 지킨다. 그대가 그의 죄를 실재로 만들고 그를 위해 그의 아버지의 뜻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그 썩어 가는 감옥 안에서 그를 봄으로써 그를 정죄하지 말라.

그대의 특별한 기능은 그 문이 열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아들이 나와 그대에게 빛을 비추고 그대에게서 자유의 선물을 받음으로써 그것을 그대에게 돌려줄 수 있다. 그가 정의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스스로 만든 그 감금에서 그 거룩한 아들을 풀어 주는 것 말고 성령의 특별한 기능이 무엇이겠는가? 그대의 기능이 그의 기능과 동떨어지고 분리된 과업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