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희생 없는 정의
1) 희생자 요구하는 법
구원 안에는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종류의 정의가 있다. 세상에게 정의와 복수는 같은 것이다. 죄인들은 정의를 오직 자신의 처벌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 처벌은 어쩌면 다른 누군가가 대신 짊어지겠지만,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죄의 법칙은 희생자를 요구한다. 희생자가 누구인지는 거의 상관없다. 그러나 죽음이 그 대가여야 하며, 반드시 치러져야 한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 광기다. 그러나 사랑이 미움을 뜻하고, 죽음이 영원과 초시간성과 생명에 대한 승리와 개선으로 보이는 그곳에서, 광기 없이 어떻게 정의가 규정될 수 있겠는가?
정의를 알지 못하는 그대도 여전히 물을 수 있고, 그 답을 배울 수 있다. 정의는 모두를 똑같은 방식으로 본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해야 한다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그런 일은 어떤 형태를 취하든 복수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어떤 희생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희생이든 죄가 보존되고 유지되도록 치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희생은 죄의 대가로 내놓는 지불이지만, 전체 대가는 아니다. 나머지는 다른 이에게서 빼앗아 그대의 작은 지불금 곁에 놓이며, 그대가 간직하려 하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든 것을 "속죄"한다. 그렇게 하여 희생자는 부분적으로는 그대이고, 나머지 훨씬 더 큰 부분은 다른 누군가로 보인다. 그리고 전체 대가 중에서, 다른 이의 몫이 클수록 그대의 몫은 작아진다. 그리고 눈먼 정의는 대가가 지불되기만 하면 만족하며, 누가 지불하는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이것이 정의일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이런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의를 알며, 아주 잘 안다. 하나님은 모든 이에게 온전히 공정하기 때문이다.
복수는 하나님의 마음에 낯설다. 하나님이 정의를 알기 때문이다. 정의롭다는 것은 공정하다는 것이며, 복수심을 품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정함과 복수는 함께 성립할 수 없다. 공정함과 복수는 각각 상대를 반박하며, 상대가 실재함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2) 지옥 된 천국
특별함을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마음과 성령의 정의를 함께 나누는 것은 그대에게 불가능하다. 그러나 죄인이 저지르지 않았지만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죄로 성령이 그를 정죄한다면, 그가 어떻게 정의로울 수 있겠는가? 그리고 처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아무 도움도 없이 그 처벌을 내려놓고 처벌이 참이 아님을 지각하라고 요구한다면, 정의는 어디에 있겠는가?
여전히 죄가 의미 있다고 믿는 이들이 성령의 정의를 이해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그들은 성령이 자신들의 혼란을 함께 나눈다고 믿어야 하며, 정의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이 반드시 동반하는 복수를 피할 수 없다고 믿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을 두려워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지각한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 자신의 분노한 손이 천국의 "불길"에서 뜯어낸 번개로 자신들을 내리쳐 죽이지 않으리라고 성령을 믿지도 못한다.
그들은 천국이 지옥이라고 믿으며, 사랑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 깊은 의심과 두려움의 냉기가 그들을 덮친다. 그들의 세상은 죄의 안정성에 의지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정의로 아는 것의 "위협"이, 자신들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복수보다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세상에 더 파괴적이라고 지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잃는 것을 저주로 여긴다. 그리고 마치 성령이 위에서 보내진, 구원자와 친구를 가장하여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복수를 행하려는 배신과 속임수의 지옥의 사자라도 되는 양, 성령으로부터 달아난다. 그가 그들에게 천사의 겉옷을 입고 속이려 꾸민 악마 말고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천국의 문처럼 보이는 지옥의 문 말고 그가 그들에게 내줄 탈출구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정의는 처벌을 요구하는 이들을 벌할 수 없다. 처벌을 요구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진리 안에서 온전히 순수함을 아는 재판관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안에서 그 재판관은 그들을 자유롭게 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들이 받을 자격이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공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순수함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스스로에게서 부인해 온 그 모든 영예를 그들에게 줄 수밖에 없다.
사랑은 죄인들에게 이해될 수 없다. 죄인들은 정의가 사랑에서 갈라져 나와 다른 무언가를 나타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약하게, 복수는 강하게 지각된다. 심판이 그 곁을 떠났을 때 사랑은 진 것이며, 처벌로부터 구할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 없는 복수는 사랑에서 갈라져 떨어져 나옴으로써 힘을 얻었다. 그리고 사랑이 정의와 활기를 빼앗긴 채 무력한 두 손으로 힘없이 옆에 서서 구할 힘도 없는 지금, 복수 말고 무엇이 돕고 구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참이라고 생각하는 그대에게 사랑이 무엇을 청할 수 있겠는가? 정의와 사랑 안에서, 그대의 혼란 속에 그대가 내줄 것이 많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사랑을 크게 신뢰하라고 요구받지 않는다. 사랑이 그대에게 내놓는 것으로 그대가 보는 것, 그리고 그대 스스로는 자신에게 줄 수 없었던 것으로 그대가 알아보는 것 이상은 아니다.
3) 사랑과 정의가 하나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 안에서 그대가 받을 자격이 있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만, 그대가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또한 이해한다. 순수한 이가 받을 자격이 있는 선물을 그대에게 내미는 것이 그의 특별한 기능이다.
그리고 그대가 받아들이는 하나하나가 그대만큼이나 하나님에게도 기쁨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은 그대가 받아들이는 하나하나로 인해 천국이 더 풍요로워짐을 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랑스러운 정의가 그의 정당한 몫임을 아는 것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기뻐한다.
사랑과 정의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같기에 자비는 하나님의 오른손에 서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에게 자기 자신의 죄를 용서할 힘을 준다.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그에게서 어떻게 무언가가 보류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부당함이며, 그 자신이 얼마나 알아보지 못하든 그 안에 있는 모든 거룩함에 대해 참으로 불공정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부당함을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그 아들의 죽음을 바라며 그 아들의 가치를 전혀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심판받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를 대신해 말해 줄 정직한 증인을 어디서 불러올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의 목숨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해 탄원하러 올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대에게서는 어떤 정의도 아들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그리고 복수가 아들의 정당한 몫이라 믿으며 그대가 내놓으려 할지 모를 모든 부당함으로부터 아들을 지키도록 확실히 했다.
특별함은 죄의 대가를 누가 치르든 오직 그 대가가 치러지기만 하면 상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순수함을 마침내 누가 바라보든 순수함이 보이고 인정되기만 한다면 상관하지 않는다. 단 한 명의 증인이라도 진실로 본다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정의는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성령은 각자에게, 정의가 사랑으로 돌아가 그 안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각자가 바로 그 증인이 되어 주겠는지 묻는다. 성령이 나누어 주는 각각의 특별한 기능은 오직 이것을 위한 것이다. 곧 사랑과 정의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각자가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둘 다 서로 결합함으로써 강해진다. 사랑이 없으면 정의는 편파적이고 약하다. 그리고 정의 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공정하며, 이유 없이 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한 이를 공격할 만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사랑은 정의 안에서 실수를 바로잡지, 복수 안에서 바로잡지 않는다. 복수로 바로잡는다면 순수함에 부당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이 복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이해한다면, 사랑과 정의의 힘에 대한 완전한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대는 모든 상황에서 아들이 복수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 참임을 지각할 필요는 없다. 또한 그대는 사실 그대 자신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의 그림자에 불과한, 세상 안에서의 그대의 경험을 바라볼 필요도 없다.
그대에게 필요한 이해는 그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순수함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거룩한 더 큰 참나로부터 온다. 그대의 특별한 기능은 더 큰 참나에 대한 부름이니, 그 참나가 함께 나누는 그대의 죄 없음에 미소 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참나의 이해는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령의 특별한 기능은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죄 없음에 대한 증인을 찾았다.
4) 죄에서 풀려나기
단순한 정의가 그대에게 주어지도록 그대가 성령에게 내주어야 할 것은 얼마나 적은가. 공평함 없이는 정의도 없다. 특별함이 어떻게 정의로울 수 있겠는가?
심판하지 말라. 그대가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대 또한 가련한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다.
특별한 이가 정의가 모든 이에게 똑같다는 것을 어떻게 참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한쪽에게서 빼앗아 다른 쪽에게 주는 것은 둘 모두에게 부당한 일일 수밖에 없다. 둘은 성령의 눈에 동등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둘 모두에게 똑같은 유산을 주었다. 더 갖거나 덜 갖고 싶어 하는 자는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박탈당했다고 생각하기에 다른 이에게 마땅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그는 시기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이 심판하는 자에게서 빼앗으려 한다. 그는 공평하지 않으며, 자신의 권리가 자신에게 가려져 있기에 다른 이의 권리를 공정하게 볼 수 없다.
그대에게는 온 우주에 대한 권리가 있다. 곧 완전한 평화, 죄의 모든 결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한 아들을 위해 정한 대로 모든 면에서 기쁘고 완전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권리다. 이것이 천국이 아는 유일한 정의이며, 성령이 이 땅에 가져오는 전부다.
그대의 특별한 기능은 오직 완전한 정의만이 그대를 위해 이길 수 있음을 그대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그대는 어떤 형태의 복수로부터도 안전하다. 세상은 속이지만, 하나님의 정의를 자신만의 버전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
이는 오직 사랑만이 정의롭고, 정의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마땅히 부여해야 할 것을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결정하게 하고, 그대의 그 불공정함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그대에게 나누어 준 것을 그대 스스로 빼앗기게 되리라고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의 작은 오류들이 천국의 정의로 되돌려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그대의 작은 오류들이 실수가 아니라 죄이며, 영원히 바로잡을 수 없고 정의가 아니라 복수로 맞아야 한다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을 뜻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죄의 모든 결과로부터 풀려나기를 원하는가? 그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지 그 전부를 보기 전까지는 답할 수 없다. 그대가 "그렇다"고 답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천국의 평화를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포기하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 하나의 죄도 간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죄를 제자리에 남겨 두려고, 이것이 가능하다는 데 대한 의심을 단 하나도 소중히 붙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는 그대의 답은 이제 진리가 모든 환영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대는 진리가 무엇인지 그대가 알지 못하기에 그것이 그대에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마지못해 내주는 것은 그 선물을 얻는 것이 아닌데, 그대가 그 선물을 받아들이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받으려는 꺼림이 사라지고 그대가 받는 데 기꺼워질 때까지, 그 선물은 그대를 위해 보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대가 내주는 그 선물은 그대에게도 누구에게도 잃어지지 않고, 천국에서 소중히 간직되고 보존된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진 모든 보물이 그를 위해 보관되어 있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뜻으로 손을 내미는 누구에게든 내주어진다. 또한 그 보물은 나누어 준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각 선물은 오직 그 보물창고를 더할 뿐이다.
이는 하나님이 공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구원을 자신에게서 오는 선물로 지각하기를 꺼리는 자신의 아들에게 맞서 싸우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이가 구원을 받을 때까지 그의 정의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5) 잃는 자 없는 답
성령이 푸는 문제에 대한 어떤 답이든 언제나 누구도 잃지 않는 답임을 확신하라. 그리고 이것은 참일 수밖에 없다. 그가 누구에게도 희생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든 조금이라도 손실을 요구하는 답은 그 문제를 풀지 못한 것이며,
오히려 그 문제를 더하여 더 크게 만들고, 풀기 더 어렵게 하며 더 부당하게 만든 것이다. 성령이 부당함을 해결책으로 볼 수는 없다. 그에게 부당한 것은 부당하기 때문에 바로잡혀야 한다.
그리고 모든 오류는 적어도 한 사람이 부당하게 보이는 지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정의가 주어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잃는 것으로 보일 때, 그 사람은 정죄받은 것이다. 그리고 정의 대신 처벌이 그 사람의 몫이 된다.
순수함을 보는 시야는 처벌을 불가능하게 하고 정의를 확실하게 한다. 성령의 지각은 공격의 어떤 근거도 남기지 않는다. 오직 손실만이 공격을 정당화할 수 있는데, 그는 어떤 종류의 손실도 볼 수 없다.
세상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푼다. 세상은 해결을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 이긴 자가 얼마를 가져가고 진 자가 여전히 얼마를 지킬 수 있을지가 결정되는 상태로 본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는다. 오직 정의만이 지는 자가 없는 상태, 곧 아무도 부당하게 취급받고 박탈당해 복수의 근거를 갖게 되지 않는 상태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이 복수일 수는 없다. 복수는 기껏해야 첫 번째 문제에 또 다른 문제를 더할 뿐이며, 그 안에서 살인은 드러나지 않는다. 성령의 문제 해결은 그 문제가 끝나는 방식이다. 그 문제는 정의로 맞아졌기에 풀린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 그 문제는 되풀이될 것이다.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의란 누구도 잃을 수 없다는 뜻이라는 원리는 이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기적은 정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눈을 통해 보이는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는 정의이며, 그 지식이 성령이 주는 시야에 반영된 정의다.
누구도 잃을 자격이 없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부당한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치유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누구도 어떤 종류의 공격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더 고통받고 다른 이는 덜 고통받아야 마땅하지 않다면, 기적에 무슨 질서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온전히 순수한 이에게 정의인가? 기적은 정의다. 그것은 일부에게만 주어지고, 다른 이들은 덜 가치 있고 더 정죄받아 치유에서 제외된 이들이라며 그들에게서 보류되는 특별한 선물이 아니다.
구원의 목적이 특별함의 끝이라면,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어떤 오류는 용서받을 수 없어서 치유와 평화의 회복 대신 복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면, 구원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까지 부당해지고자 해 온 것보다 더 부당해지도록 돕고자 할 수 없다. 성령의 선물인 기적이 선택받은 특별한 무리에게만 특별히 주어지고 덜 받을 자격이 있다며 다른 이들에게서 떨어져 보관된다면, 성령은 특별함의 동맹이 되는 것이다.
성령이 지각할 수 없는 것에는 성령은 증언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이는 성령의 치유와 구원과 평화의 선물을 받을 동등한 자격이 있다. 성령에게 그대를 위해 풀어 달라고 문제를 내주는 것은 그대가 그 문제가 풀리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성령의 도움 없이 스스로 풀려고 문제를 간직하는 것은 그 문제가 미결인 채로, 풀리지 않은 채로, 부당함과 공격이라는 힘을 지닌 채로 지속되어야 한다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대가 먼저 부당해지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누구도 그대에게 부당할 수 없다. 그러면 문제들이 일어나 그대의 길을 막을 수밖에 없고, 평화는 미움의 바람에 흩날릴 수밖에 없다.
그대의 모든 형제가 그대와 동등하게 기적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대는 동등한 권리를 지닌 이에게 그대가 부당했기에 그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부인하려 하면 그대는 부인당했다고 느낄 것이다. 박탈하려 하면 그대는 박탈당한 것이다. 다른 이가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기적을 받지 못하는 일은 결코 없다.
오직 용서만이 기적을 내준다. 그리고 용서는 모든 이에게 공정해야 한다.
그대가 간직하고 감추는 작은 문제들은 그대의 비밀스러운 죄가 된다. 그대가 그 문제들이 그대를 위해 치워지도록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문제들은 먼지를 쌓으며 자라나 마침내 그대가 지각하는 모든 것을 뒤덮고 그대를 누구에게도 공정하지 못한 자로 남겨 둔다.
그대는 자신에게 단 하나의 권리도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리고 쓰라림은 복수를 정당화하고 자비를 잃은 채로 그대를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정죄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게는 다른 이에게 내줄 자비가 없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유일한 책임이 그대 자신을 위해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하는 이유다.
그대가 받는 기적을 그대는 내준다. 그 기적들 각각은 구원이 놓인 법칙 — 누군가 치유되려면 정의가 모두에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법칙 — 을 보여 주는 예가 된다.
누구도 잃을 수 없으며, 모두가 이득을 얻어야 한다. 각 기적은 모두에게 똑같이 내주어질 때 정의가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예다.
기적은 동등하게 받아지고 내주어진다. 기적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이 같다는 자각이다. 같은 것을 다르게 만들지 않기에, 차이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 차이도 보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이 안에서 차이를 보지 않기에 모두에게 똑같다. 기적의 내줌은 보편적이며, 오직 하나의 메시지만을 가르친다. 곧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모두에게 속하며, 모두의 정당한 몫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