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잃는 자 없는 구원

1) 오직 하나인 결정

앞서 말한 것으로 돌아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미쳤거나, 아니면 이 세상이 광기의 자리이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생각 가운데 이 세상 안에서 조금이라도 말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세상이 참이라고 믿는 것 가운데 그의 마음 안에서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는 것은 없다.

말이 되지 않고 의미가 없는 것은 광기다. 그리고 광기인 것은 진리일 수 없다.

여기서 그토록 깊이 소중히 여겨지는 어떤 신념 하나가 참이라면, 하나님이 지녔던 모든 생각은 환영이 된다. 그리고 그의 생각 가운데 단 하나만이라도 참이라면, 세상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신념은 거짓이며 조금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그대가 내리는 선택이다. 이 선택을 다르게 보려 하거나 다른 무언가로 비틀려고 하지 말라. 그대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오직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그대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세상이 떠받치는 가치 하나를 정당화하는 것은 그대의 아버지의 온전한 정신과 그대의 온전한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은 서로 다르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이 자신을 창조한 생각을 지닌 마음과 함께 창조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아들의 생각의 일치다.

그러므로 아들이 진리에 반하는 생각 하나를 믿기로 선택한다면, 그는 자신이 자기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고 결정한 것이다. 아들이 미쳤고 온전한 정신은 아버지와 아들 둘 다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것을 믿는다. 이 신념은 어떤 형태를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말라. 세상이 어떤 식으로든 온전하다고, 무엇을 생각하든 정당하다고, 어떤 형태의 이성으로든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자는, 이것이 참이라고 믿는 것이다.

2) 성령이 바꾸는 토대

아버지와 아들이 미치지 않았기에 죄는 실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죄에 근거하기에 무의미하다. 진리에 근거하지 않고서 변함없는 것을 누가 창조할 수 있겠는가?

성령은 그대가 보는 세상의 토대 전체를 미치지 않은 토대로 바꿀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위에서는 온전한 지각이 세워질 수 있고 또 다른 세상이 지각될 수 있다. 그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온전한 정신과 기쁨으로 이끌 것을 그 무엇도 거스르지 않는다. 그 무엇도 죽음과 잔인함을, 분리와 차이를 증언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하나로 지각되며, 각자가 얻을 수 있도록 누구도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믿는 모든 것을 이 하나의 요구에 비추어 시험해 보고, 이 하나의 요건을 충족하는 모든 것이 그대의 믿음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이해하라. 그러나 그 밖의 것은 아니다. 사랑이 아닌 것은 죄이며, 사랑과 죄는 서로를 미쳤고 무의미하다고 지각한다.

사랑은 한 세상의 토대이며, 자신들의 길이 온전한 정신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 죄인들에게 그 세상은 완전히 미친 것으로 지각된다. 그러나 광기를 넘어 진리 위에 평화롭게 머물고자 하는 그 온화한 눈을 지닌 사랑이 보기에는, 죄도 똑같이 미친 것이다. 사랑과 죄는 각각, 그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변함없고 영원한 진리를 자신이 규정하는 대로 변경 불가능한 세상을 본다.

그리고 사랑과 죄는 각각 아버지와 아들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그 관점을 의미 있고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 반영한다. 그대의 특별한 기능은, 하나님이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대에게 가장 이치에 맞고 의미 있게 나타나는 특별한 형태다.

내용은 같다. 형태는 그대의 특별한 필요에, 그리고 그대가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 맞추어져 있다. 그곳에서 그대는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그리고 그대를 제한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그대가 믿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시간에도 장소에도, 하나님이 뜻하지 않은 그 무엇에도 매일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광기로 보인다면, 그 뜻을 미친 이들에게 가장 받아들이기 쉽게 만드는 온전한 정신의 형태는 특별한 선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선택은 미친 이들이 내릴 수 없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선택이 자유롭지 않고 감각의 빛 안에서 이성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미친 이들에게 맡기는 것은 광기일 것이다.

하나님은 미치지 않았기에, 자신만큼 온전한 정신을 지닌 한 존재를 세워, 자신의 구원으로 광기를 선택한 모든 이의 시야를 맞이할 더 온전한 세상을 일으키게 했다. 이 존재에게는 미친 이에게 가장 알맞은 형태의 선택이 주어진다. 그 형태는 미친 이가 보는 세상을 공격하지 않고 고요히 그 안으로 들어가 그가 미쳤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존재는 다만 하나의 대안을 가리킬 뿐이다. 곧 미친 이가 전에 보았고 자신이 사는 세상으로 알아보며 전에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것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이제 그는 이것을 의심해야 한다. 그 대안의 형태가 그가 부정할 수도, 지나칠 수도, 조금도 지각하지 못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에게 그의 특별한 기능은 가능한 것으로, 그리고 그 기능이 각자가 참으로 원하는 대안임을 증명해 줄수록 점점 더 바라는 것으로 지각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자리로부터 그의 죄스러움, 그리고 그가 세상 안에서 보는 모든 죄는 그에게 점점 더 적게 내준다. 그렇게 마침내 그는 죄가 자신의 온전한 정신을 대가로 치르게 했으며, 그와 그가 지닌 온전한 정신에 대한 어떤 희망 사이에 가로놓여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광기로부터 벗어날 길 없이 남겨지지도 않는다. 그가 모든 이의 탈출에서 특별한 역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못 보고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평화의 희망 안에서 특별한 기능 없이 밖에 남겨질 수 없다.

3) 잃을 수 없는 참나

하나님의 사랑 말고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안이 아니라면 온전한 정신은 어디에 머무는가? 하나님을 대변하는 성령은 그대를 위해 특별히 선택한 그 대안 안에서 그대에게 이것을 보여 줄 수 있다.

그대가 이것을 기억하여 가장 깊은 애도에서 완전한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지옥과 천국이 같지 않고 다르다는 것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보여 주려는 하나님 자신의 계획 안에서 그대에게 맡겨진 기능을 받아들이라. 그 기능은 또한, 그런 광기가 가능했다면 천국을 지옥으로, 지옥을 천국으로 만들었을 차이들 없이 천국 안에서는 모두가 똑같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누군가 잃는다는 그 신념 전체는 하나님이 미쳤을 것이 틀림없다는 근본 전제를 반영할 뿐이다. 이 세상에서는 한쪽이 잃어야 다른 쪽이 얻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참이라면, 하나님은 참으로 미친 것이다!

그러나 이 신념이 "죄는 실재하며 세상을 지배한다"는 더 근본적인 전제의 한 형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주 작은 이득 하나마다 누군가는 잃어야 하고, 정확한 만큼의 피와 고통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악이 승리하고, 어떤 이득이든 그 대가가 온통 파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미쳤다고 믿는 그대여, 이것을 주의 깊게 보고, 하나님이거나 이것이거나 둘 중 하나는 미친 것이 틀림없고, 둘 다 미쳤을 수는 거의 없음을 이해하라.

구원이란 아무도 다른 이가 얻기 위해 잃을 수 없다는 생각의 재탄생이다. 그리고 누구든 얻는 자가 되려면 모두가 얻어야 한다. 여기에 온전한 정신이 회복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진리라는 하나의 반석 위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온전한 정신에 대한 믿음은 완전한 확신과 완전한 평화 안에 머물 수 있다. 이성은 만족한다. 모든 미친 신념이 여기서 바로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참이라면 죄는 불가능한 것이 틀림없다. 이것이 구원이 놓인 반석이며, 성령이 그대의 특별한 기능이 한 역할을 담당하는 그 계획에 의미와 방향을 주는 유리한 자리다. 여기서 그대의 특별한 기능은 전체의 기능을 함께 나누기에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유혹은 다만 이런 신념뿐임을 기억하라. 곧 하나님의 광기가 그대를 온전하게 만들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줄 것이라는 미친 신념이며, 그대의 목표들이 화해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나 그대 둘 중 하나가 광기에 져야 한다는 신념이다. 죽음은 생명을 요구하지만, 생명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누구도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니, 그대가 그 뜻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그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참나(Self)를 위해서다.

참나는 잃을 수 없다. 참나가 잃을 수 있다면 그 손실은 그의 아버지의 것이 될 텐데, 아버지 안에서는 어떤 손실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이기에 온전한 정신이다.

성령은 그대가 자신에게 주는 모든 것을 그대의 구원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대가 내주지 않는 것은 사용할 수 없으니, 그대의 자발적 동의 없이는 그것을 그대에게서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성령이 그렇게 한다면, 그대는 그가 그대의 뜻에 반하여 그것을 그대에게서 억지로 빼앗았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그것 없이 지내는 것이 그대의 뜻임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붙들고 있는 그것을 성령에게 온전히 기꺼이 내줄 필요는 없다. 그렇게 내줄 수 있다면 그대에게는 애초에 그가 필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그대 혼자만 간직하기보다는 그가 가져가기를 더 바라며, 누구에게도 손실을 가져오지 않는 것을 그대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도 그대가 얻기 위해 잃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만큼이다. 그 이상은 없다. 구원에 필요한 원리는 오직 이것뿐이다.

그 원리에 대한 그대의 믿음은 강하지 않아도 되고, 흔들려도 되며, 그것에 반대되는 모든 신념의 공격을 받아도 된다. 그대에게는 고정된 충성이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에게는 구원이 필요 없음을 기억하라. 그대는 여전히 자기 자신에 맞서 나뉜 자라면 불가능하다고 여길 일을 하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그런 마음 상태에서 지혜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조금만 가지라. 그러나 그대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주 작은 믿음뿐임에 감사하라. 여전히 죄를 믿는 이들에게 아주 작은 믿음 말고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죄인들이 천국과 구원받은 자의 정의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