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적 아닌 구원자
1) 공격과 죄의 환영
죄 없음의 상태란 그저 이런 것이다. 공격하려는 소망 전체가 사라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존재로 지각할 이유가 더는 없다. 죄책감의 필요는 죄책감이 아무 목적도 없고 죄라는 목표 없이는 무의미하기에 사라진다.
공격과 죄는 하나의 환영으로 묶여 있으며, 각각이 서로의 원인이자 목표이자 정당화 근거가 된다. 각각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지만, 서로에게서 의미를 끌어오는 듯 보인다. 각각은 자신이 지닌 듯 보이는 그 어떤 뜻이든 그 뜻을 서로에게 의존한다. 그리고 죄가 진리가 아니라면 누구도 공격을 믿을 수 없고, 공격이 진리가 아니라면 누구도 죄를 믿을 수 없다. 각각이 서로가 참임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공격은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와 함께 하나님을 그대의 적으로 만든다. 이런 "적들"과 함께라면 그대는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대 자신을 해쳤고, 그대의 참나(Self)를 그대의 "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대는 그대가
그대가 아니라, 그대 자신에게 낯선 어떤 존재, "그 밖의 다른 무엇", 사랑받는 대신 두려워해야 할 어떤 "무엇"이라고 믿어야 한다. 자신이 온전히 순수하다고 지각하는 그 무엇을 누가 공격하려 하겠는가? 그리고 순수함을 바라면서도 공격하고 싶어 하는 자가, 그 소망을 유지하려면 자신이 죄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을 순수하다고 보면서 그가 죽기를 바랄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대가 그대의 형제를 바라볼 때마다 그리스도는 그대 앞에 서 있다. 그대의 눈이 감겨 있다고 해서 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2) 용서와 정죄 사이
그러나 그대가 보지 못하는 눈으로 구원자를 바라보며 찾는다면, 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봄으로써 그대가 보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대가 바라보는 것은 그리스도와 혼동된 "적"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 "적" 안에서 볼 죄가 없기 때문에 미워한다. 또한 그대는 그 형제의 애처로운 부름을 듣지 못한다. 그 부름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든 내용이 변함없으니, 그대가 그와 하나 되어 순수함과 평화 안에서 합쳐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의 무의미한 비명 아래에는 하나님이 그 형제에게 준 그런 부름이 있다. 하나님이 그 부름을 준 것은, 그대가 그 안에서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돌려줌으로써 응답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대에게 청하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 그에게 마땅한 것을 그에게 돌려주어, 그대가 그와 함께 그것을 나눌 수 있게 하는 것.
그 마땅한 것은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지니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둘 모두에게 쓸모없는 채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함께라면, 그것은 각자에게 서로를 구하고 자기 자신도 그와 함께 구할 동등한 힘을 줄 것이다.
그대에게 용서받으면, 그대의 구원자는 그대에게 구원을 내준다. 그대에게 정죄받으면, 그는 그대에게 죽음을 내준다. 그대가 모든 이에게서 보는 것은 그대가 그가 그대에게 어떤 존재이기를 선택하는가에 대한 반영일 뿐이다. 그대가 그의 참된 기능, 곧 그가 실제로 지닌 유일한 기능에 반하여 결정한다면, 그대는 그가 하나님이 그에게 준 역할을 다했다면 찾았을 모든 기쁨을 그에게서 빼앗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이 그 한 사람에게만 잃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그대를 통해 그 구원자에게 길이 보여지지 않는다면 천국은 되찾아질 수 없으니, 그래야 그대도 그의 곁을 걸으며 천국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구원자가 구원받는 것은 아무 희생도 아니다. 그의 자유로 인해 그대도 그대 자신의 자유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기능이 다해지도록 하는 것은 곧 그대의 기능이 다해지도록 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렇게 하여 그대는 천국을 향해서든 지옥을 향해서든 걸어가지만, 혼자가 아니다.
3) 빛을 보는 소망
그대가 그 구원자의 죄 없음을 지각할 때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그대를 위해 그에게 준 봄의 선물을 그가 자유로이 그대에게 내줄 때, 그대의 기쁨이 얼마나 클 것인가!
그대의 형제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 하나님이 그에게 준 그 일을 완수할 자유를 그대가 그에게 허락하는 것. 오직 이것만을 기억하라 — 그가 하는 일을 그대도 그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가 그를 보는 방식이 곧 그가 그대를 위해 지닐 기능을 규정한다. 그대가 그대의 형제를 다르게 보고 하나님이 그가 그대에게 되라고 정한 그대로 그가 되게 할 때까지는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자신을 향해 품을 수 있는 미움에 맞서,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지옥의 고통에서 구할 힘이 없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유로워진다.
그대는 그대의 형제 안에서 그림 하나를 본다. 하나님의 뜻이 그대를 위해 어떠해야 한다고 그대 자신이 믿는 바를 그려 낸 그림이다. 그대의 용서 안에서 그대는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공격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그대를 미워한다고 믿으며 천국이 지옥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형제를 다시 한번 보되, 그대가 지각하는 대로 그가 천국으로 가는 길이거나 지옥으로 가는 길임을 이해하고 보라. 그러나 이것을 잊지 말라 — 그대가 그에게 주는 역할은 그대에게도 주어지며, 그 역할은 그대 자신에 대한 그대의 심판이므로, 그대는 자신이 그에게 가리켜 보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용서하는 눈 위에 부드럽게 머물며, 그런 눈이 바라보는 모든 것은 바라보는 이에게 그에 대해 말해 준다.
그 용서하는 이는 아무 악도 보지 못하며,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도, 자신과 다른 그 누구도 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 용서하는 이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듯 사랑과 온유함으로 자기 자신도 바라본다.
그 용서하는 이는 다른 이를 벌하지 않는 만큼이나 자신의 실수를 두고 자기 자신을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그 용서하는 이는 복수를 판가름하는 자도, 죄를 벌하는 자도 아니다. 그 용서하는 이의 시선이 지닌 친절함은 다른 이들에게 내주는 온갖 부드러움을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도 준다.
그 용서하는 이는 오직 치유하고 오직 축복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뜻하는 바와 일치하기에, 그 용서하는 이는 하나님의 은총을 자신의 시선 위에 지니고서 자신이 바라보는 모든 이를 치유하고 축복할 힘을 지닌다.
눈은 어둠에 익숙해지며, 황혼 녘에 지각되는 흐릿한 빛에 오랫동안 길든 눈에는 눈부신 대낮의 빛이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눈은 햇빛과 그 눈이 바라보는 것에 가져다주는 선명함으로부터 돌아선다. 흐릿함이 더 나아 보인다 — 더 보기 쉽고 더 잘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어쩐지 모호하고 흐릿한 것이 더 보기 쉬워 보이며, 온전히 또렷하고 분명한 것보다 눈에 덜 고통스러운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눈이 있는 목적이 아니다. 자신이 어둠을 더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보고 싶어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보고자 하는 소망은 그대의 눈 위로 하나님의 은총을 불러내리며, 봄을 가능하게 하는 빛의 선물을 가져다준다.
그대는 그대의 형제를 보고 싶은가? 하나님은 그대가 그를 바라보기를 기뻐한다. 그는 그대의 구원자가 그대에게 알아보이지 않은 채로 남기를 뜻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그 구원자가, 하나님 자신이 그에게 준 기능 없이 남아 있기를 뜻하지도 않는다.
그 형제가 더는 외롭지 않게 하라. 외로운 이들이란 자신이 채울 세상 속 기능을 보지 못하는 이들, 자신이 필요한 자리도, 오직 자신만이 완전히 이룰 수 있는 목표도 보지 못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