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용서가 세우는 세상

1) 믿는 대로 보기

그대가 죄책감을 소중히 여기는 정도만큼, 그대는 공격이 정당화되는 세상을 지각할 것이다. 그대가 죄책감이 무의미함을 알아보는 정도만큼, 그대는 공격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각할 것이다. 이는 지각의 근본 법칙과 일치한다 — 그대는 그대가 거기 있다고 믿는 것을 보며, 그대가 그것이 거기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이 거기 있다고 믿는다.

지각에는 이것 말고 다른 법칙이 없다. 나머지는 모두 이것에서 나와 이 법칙을 떠받치고 뒷받침할 뿐이다.

이것은 지각의 형태로서, 하나님의 더 근본적인 법칙을 이 세상에 맞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 법칙은 사랑이 자기 자신을, 오직 자기 자신만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칙은 지각이 지배하는 세상에 직접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세상은 지각이 아무 의미도 없는 마음이 창조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어디에나 반영되어 있다. 그렇다고 이 반영이 있는 세상이 실재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며, 아들의 그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은 자신을 온전히 분리시켜 둘 수 없었을 뿐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광기 속으로 아들과 함께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한 정신이 아들과 함께 그 광기 속으로 들어가도록 확실히 함으로써, 아들이 자신의 소망이라는 그 광기 속에서 영원히 길을 잃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지각은 선택에 근거하지만, 지식은 그렇지 않다. 지식에는 오직 하나의 법칙만 있다. 그 법칙에는 오직 하나의 창조주만 있기 때문이다.

2) 두 창조주

그러나 이 세상을 만든 이는 둘이며, 그 둘은 이 세상을 같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각자에게 이 세상은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니며, 각자에게 이 세상은 자신이 세상을 지각하는 목표를 섬기는 완벽한 수단이다.

특별함에게 이 세상은 특별함을 돋보이게 하는 완벽한 액자이며, 전쟁을 치를 완벽한 싸움터이고, 실재로 만들고자 하는 환영을 위한 완벽한 은신처다. 특별함이 자신의 지각 안에서 떠받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온전히 정당화될 수 없는 것도 하나 없다.

이 세상에는 또 다른 창조주가 있다. 이 창조주는 동시에 미친 믿음을 바로잡는 이다. 그 믿음이란, 무엇이든 하나님의 법칙 안에 여전히 붙들어 두는 어떤 연결 고리 없이도 세울 수 있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창조주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의 우주를 떠받치는 그 법칙 자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필요에 맞추어진 어떤 형태로 그렇게 한다. 바로잡힌 오류는 오류의 끝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오류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아들을 지켰다.

오류가 만든 이 세상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그 목표를 창조주의 목적과 화해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창조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 창조주가 이 세상을 지각할 때는, 용서와 완전한 죄 없음의 광경을 정당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즉각적이고 완전한 용서로 맞이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특별함은 죄 없음을 있어야 할 마음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 대신 몸을 밝히려 하지만, 그 가련한 시도를 넘어 변함없이 빛나는 죄 없음을 단 한순간도 가리는 것은 남아 있지 않다.

3) 유혹이 기회로

하늘의 등불은 마음이 원하는 곳에서 마음대로 보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등불을, 등불이 결코 있을 수 없는 곳을 밝히기라도 하듯 본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보기로 선택한다면, 세상의 창조주는 그대가 등불이 없는 어둠 속에 남아 있지 않도록 그대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여기 있는 모든 이가 어둠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 누구도 홀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한순간 이상 머물 필요가 없다. 모든 이는 자기 안에 하늘의 도움을 지니고 왔으며, 그 도움은 언제든 그 사람을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선택하는 시간은 언제든 될 수 있다. 도움은 그저 그 사람의 선택을 기다리며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이용하기로 선택할 때, 그 사람은 전에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수단이라고 여겼던 각 상황이 이제 자신의 사랑을 정당화하는 사건으로 바뀐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은 전에 들었던 전쟁의 부름이 실은 평화의 부름임을 분명히 듣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공격을 가했던 그 자리가 다만 또 하나의 제단일 뿐이며, 거기서 그는 똑같이 쉽게, 그리고 훨씬 더 큰 행복으로 용서를 베풀 수 있음을 지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모든 유혹을 그저

자신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또 하나의 기회로 다시 해석할 것이다. 잘못된 지각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겠는가? 그대의 형제의 모든 오류가 그대에게는, 그대에게 주어진 조력자의 작용을 볼 수 있는 기회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게 하라. 그 조력자는 그대가 만든 세상 대신 조력자 자신이 만든 세상을 그대가 보도록 주어졌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당화되는가?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두 질문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 두 질문을 같은 것으로 볼 때, 그대의 선택은 이루어진다. 보는 방식이 둘 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두 질문을 하나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그대의 평화에 내놓을 것이 많으며, 그대 자신의 용서를 확장할 기회도 많다. 평화와 용서가 자신에게 내려와 빛을 내주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이 세상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온유함의 세상을 만든 창조주는 그대와 그의 온유함 사이에 가로놓인 듯 보이는 폭력과 증오의 세상을 지워 버릴 완전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 폭력과 증오의 세상은 용서하는 그의 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세상은 그대의 눈에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