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기 창조라는 믿음
1) 기도에서 친교로
지금 그대가 지닌 능력들은 그대의 참된 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 바 있다. 또 본질적으로 심판적인 지각은 오직 분리 이후에야 도입되었다고도 말했다. 그 이후로 아무도 그 무엇에도 확신을 갖지 못했다. 나는 또한 부활이 앎으로 돌아가는 수단이었으며, 이는 나의 뜻을 아버지의 뜻과 하나로 합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이어질 여러 진술을 분명히 해 줄 하나의 구분을 세울 수 있다.
분리 이후로 "창조하다"와 "만들다"라는 말은 혼동되어 왔다. 그대가 무언가를 만들 때, 그대는 특정한 결핍감이나 필요에서 그렇게 한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무엇이든 참된 보편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대가 지각된 결핍을 채우려고 무언가를 만들 때, 그대는 암묵적으로 자신이 분리를 믿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에고는 이런 목적을 위해 수많은 기발한 사고 체계를 고안해 냈다. 그 어느 것도 창조적이지 않다. 창의성은 아무리 기발한 형태를 띠어도 낭비된 노력이다. 발명의 매우 구체적인 성질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지닌 추상적인 창조력에 걸맞지 않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안다는 것은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대의 참된 창조와 그대가 스스로 만든 자기 자신 사이의 혼동은 너무나 깊어서, 그대는 사실상 그 무엇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앎은 언제나 안정되어 있으며, 그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대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는 완전히 안정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대의 행동이 불안정할 때 그대는 하나님이 지닌 그대의 창조에 대한 관념에 동의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선택한다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대가 바른 마음 상태에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물음은 애초에 그대 자신을 향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그대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계속 묻는다. 이는 그 답이 그대가 아는 것일 뿐 아니라 그대 자신이 마련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대는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지각할 수 없다. 그대에게는 지각될 이미지가 없다.
"이미지"라는 말은 언제나 지각과 관련되어 있으며, 앎의 일부가 아니다. 이미지는 상징적이며 다른 무언가를 대신한다. "자신의 이미지를 바꾼다"는 관념은 지각의 힘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알 만한 안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앎은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그대는 의미를 "해석"하려 할 수도 있지만, 해석은 의미에 대한 지각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므로 언제나 잘못될 수 있다.
이런 모순들은 그대 자신을 분리된 존재이면서 동시에 분리되지 않은 존재로 여기려는 시도의 결과다. 이토록 근본적인 혼동을 저지르면서 전체적인 혼란을 더욱 키우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대의 마음은 매우 기발해졌을 수도 있지만, 그 마음은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벗어나려는 헛된 시도에 쓰이고 있다. 방법과 내용이 분리될 때는 언제나 그렇다. 기발함은 앎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앎은 기발함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발한 생각은 그대를 자유롭게 할 진리가 아니지만, 그대가 기발한 생각을 기꺼이 내려놓을 때 그대는 그것에 매달릴 필요에서 자유로워진다.
기도는 무언가를 구하는 한 방식이다. 기도는 기적의 매개체다. 그러나 유일하게 의미 있는 기도는 용서를 구하는 기도다. 용서받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용서를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흔히 말하는 뜻에서의 기도는 완전히 무의미해진다.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다만 그대가 이미 지닌 것을 알아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일 뿐이다.
앎 대신 지각을 선택함으로써, 그대는 오직 기적적으로 지각함으로써만 그대의 아버지를 닮을 수 있는 자리에 자신을 두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앎을 잃어버렸다. 창조가 그대의 근원(Source)이자 그대의 유일한 참된 역할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말은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형상"은 "생각"으로, "모양"은 "비슷한 성질을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실제로 자신의 생각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성질을 지닌 영을 창조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반면에 지각은 "더 많음"과 "더 적음"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든 차원에서 지각은 선별을 동반한다. 지각은 받아들이고 거부하고, 정리하고 다시 정리하고, 옮기고 바꾸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평가는 지각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선별하려면 판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판단도 없이 오직 완전한 동등함만 있다면 지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지각은 불가능해진다.
진리는 오직 알 수 있을 뿐이다. 진리는 전부 똑같이 참이며, 그 일부를 아는 것이 곧 전체를 아는 것이다. 오직 지각만이 부분적인 자각을 동반한다. 앎은 지각을 지배하는 법칙을 초월한다. 부분적인 앎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앎은 온전히 하나이며 별개의 부분을 지니지 않는다. 앎과 참으로 하나인 그대는 다만 자기 자신을 알기만 하면 되며, 그러면 그대의 앎은 완전해진다. 하나님의 기적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용서는 분리라는 지각을 치유하는 것이다. 형제에 대한 올바른 지각은 반드시 필요한데, 마음들이 자기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보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영은 하나님을 완전하게 안다. 하나님을 완전히 앎이 영의 기적적인 힘이다.
모든 사람이 이 힘을 완전하게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의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조건이다. 세상은 누군가가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면 남는 것이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생각만큼이나 전면적이다. 그 기적이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지각이 지속되는 한 기도도 자리를 지닌다. 지각은 결핍에 근거하므로, 지각하는 사람은 아직 속죄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자신을 진리에 온전히 내맡기지 않은 것이다. 지각은 분리된 상태에 근거하므로, 조금이라도 지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유가 필요하다.
아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상태는 기도가 아니라 친교(Communion)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기적은 떼어 놓을 수 없다.
자신의 빛 안에 사는 하나님의 생각들은 참으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대의 가치는 지각을 넘어서 있다. 그 가치가 의심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서로 다른 빛으로 지각하지 말라. 그 하나의 빛(One Light) 안에서 그대 자신을 알라. 그곳에서는 그대인 그 기적이 완전히 또렷하다.
2) 심판 없는 만남
우리는 이미 최후의 심판에 관해 논의했지만, 충분히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다. 최후의 심판 이후에는 더 이상 심판이 없을 것이다. 심판은 상징적이다. 지각을 넘어서면 심판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심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때, 이는 그대가 다른 사람의 실재를 심판한다면 그대 자신의 실재를 심판하는 일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아는 것 대신 심판하기를 선택하는 것이 평화를 잃는 원인이다.
심판은 앎이 아니라 지각이 의지하는 과정이다. 나는 이를 앞서 지각의 선별성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하며, 평가가 그 명백한 전제 조건임을 지적한 바 있다.
심판은 언제나 거부를 동반한다. 심판은 그대 안에서든 다른 사람 안에서든, 심판받는 것의 긍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법이 없다. 지각되고 거부된 것, 또는 심판받아 부족하다고 판정된 것은, 그 대상이 지각되었기 때문에 그대의 마음 안에 남는다.
그대가 시달리는 환영 가운데 하나는, 그대가 반대로 심판한 것은 아무런 영향도 없다는 믿음이다. 그대가 반대로 심판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믿어야만 이는 참일 수 있다. 그대는 분명 그렇게 믿지 않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것에 반대하는 심판을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대의 심판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그대는 실재하지 않는 것에 자신의 믿음을 두고 있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에 믿음을 두는 일은 그 어떤 형태의 심판에서도 피할 수 없다. 그 심판이 실재를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기 자신과 형제들을 완전히 심판 없이 만나는 데서 오는 그 엄청난 풀려남과 깊은 평화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그대가 자신이 무엇이고 형제들이 무엇인지 알아볼 때, 그대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실 형제들의 의미는, 바로 그대가 그들을 심판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대에게서 사라진다.
모든 불확실함은 그대가 심판의 강요 아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대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데 심판이 필요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정리하는 데는 더더욱 필요하지 않다.
앎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심판이 저절로 멈추며, 이것이 바로 지각을 알아봄(recognition)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다.
그대는 지각했지만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모든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그대는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대는 그것을 악몽 속에서, 또는 더 행복해 보이는 꿈속에서 즐거운 가면을 쓴 모습으로 본다. 그대가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은 그 무엇도 자각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위험하지 않지만, 그대가 위험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대가 피곤함을 느낄 때, 이는 그대가 자신을 피곤해질 수 있는 존재로 심판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누군가를 비웃을 때, 이는 그대가 그 사람을 가치 없다고 심판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비웃을 때, 그대는 다른 사람도 비웃을 수밖에 없다. 이는 다만 그대가 그 사람들보다 더 가치 없다는 관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도 그렇다. 이 모든 것이 그대를 피곤하게 만든다. 이는 그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낙담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실제로 피곤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만, 스스로를 지치게 만드는 데는 매우 능하다. 끊임없는 심판이 주는 긴장은 사실상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토록 기력을 소진시키는 능력이 그토록 깊이 소중히 여겨진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그러나 그대가 실재의 저자가 되고 싶다면, 그대는 심판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대는 또한 그 심판이 언젠가 그대에게 불리하게 쓰이리라고 믿으며 심판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이 믿음은 오직 그대가 자신의 권위를 지키는 방어 무기로서 심판의 효력을 믿는 정도까지만 존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오직 자비만을 베푼다. 그대의 말은 오직 자비만을 반영해야 한다. 자비가 바로 그대가 받은 것이고 그대가 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일시적인 방편, 또는 그대에게 자비의 의미를 가르치려는 시도다. 정의가 심판적인 것은 오직 그대가 불의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3) 권위의 문제
나는 여러 다른 증상을 말해 왔으며, 증상의 차원에는 거의 끝없는 다양함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증상에는 오직 하나의 원인만이 있으니, 바로 권위의 문제다. 이것이 "모든 악의 뿌리"다.
에고가 만들어 내는 모든 증상에는 용어상의 모순이 담겨 있다. 이는 마음이 에고와 성령 사이에서 갈라져 있어서, 에고가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불완전하고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 지탱할 수 없는 입장은 권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다. 권위의 문제는 그 자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하나의 생각을 전제로 삼기 때문에, 오직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관념들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권위의 문제는 사실 창조주 지위(Authorship)의 문제다. 그대에게 권위의 문제가 있다면, 이는 언제나 그대가 자기 자신의 창조주라고 믿고 그 망상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대는 그 상황을, 다른 사람들이 그대의 창조주 지위를 두고 말 그대로 그대와 다투는 상황으로 지각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을 찬탈했다고 믿는 모든 사람이 저지르는 근본적인 잘못이다.
이 믿음은 그들에게는 매우 두렵지만,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는 자신의 자녀들을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 믿음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물에게는 참된 창조주 지위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의 창조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기로 선택할 때 익명으로 남기를 더 좋아한다. 자신의 참된 창조주 지위를 확신하지 못하기에, 그대는 자신의 창조가 익명이었다고 믿는다. 이는 그대를 자신이 스스로를 창조했다고 믿는 것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자리에 남겨 둔다.
창조주 지위를 둘러싼 이 다툼은 그대의 마음에 너무나 큰 불확실함을 남겨서, 그대가 정말로 존재하는지조차 의심하게 만들 수도 있다.
거부하려는 모든 바람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만이 자기 자신의 거부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대는 하나님의 권능을 찬탈한 것이 아니라, 그 권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다행히도,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그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다만 그대가 그 무언가가 어디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일 뿐이다. 그 무언가의 존재는 그대가 그 무언가를 알아보거나 심지어 위치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지 않다.
심판 없이 실재를 바라보며 다만 실재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가능하다. 평화는 영의 타고난 유산이다. 누구나 자신의 유산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자유가 있지만, 자신의 유산이 무엇인지를 정할 자유는 없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결정해야 하는 문제는 창조주 지위라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모든 두려움은 결국, 때로는 매우 우회적인 경로를 거쳐서라도, 창조주 지위(Authorship)를 부인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주 지위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향한 모욕이 아니며, 오직 그렇게 부인하는 사람 자신을 향한 모욕일 뿐이다. 하나님의 창조주 지위를 부인하는 것은 그대 자신에게서 평화의 이유를 부인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대는 자신을 오직 조각난 모습으로만 보게 된다.
이 기이한 지각이 바로 권위의 문제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갇혀 있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갇혀 있다는 이 느낌이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의 결과라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지 않은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입장에 담긴 순환 논리가 아주 분명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반드시 자유로 이어져야 한다.
심판은 언제나 가둔다. 심판이 욕망이라는 불안정한 저울로 실재의 조각들을 갈라놓기 때문이다.
소망은 사실이 아니다. 소망한다는 것은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러나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소망하는 것이 의지하는 것만큼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너희는 먼저 하늘나라를 구하라" 대신 "너희는 먼저 하늘나라를 의지하라"고 말하라. 그러면 그대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내가 무엇인지 알며, 나 자신의 유산을 받아들인다."
모든 사고 체계에는 반드시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사고 체계는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거나 창조하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이는 우리가 이미 논의한 차이다. 만드는 것과 창조하는 것, 이 둘의 닮은 점은 사고 체계의 힘이 토대로서 작용한다는 데 있다. 둘의 차이점은 사고 체계 위에 무엇이 세워지느냐에 있다. 둘 다, 사람이 그에 따라 살아가는 믿음 체계의 초석이다.
거짓에 근거한 사고 체계가 약하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만든 것 가운데 힘이 없는 것은 없다.
자신이 만든 것에 힘이 있음을 깨닫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마음이 지닌 힘을 얕봄으로써 권위의 문제를 풀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이는 그대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그대는 실은 마음의 힘을 참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또한 자신이 하나님을 약화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약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4) 반석으로 돌아감
"악마"는 두려운 관념이다. 악마가 극도로 강력하고 극도로 활동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악마는 하나님과 싸우며 하나님의 창조물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세력으로 지각된다. 악마는 거짓말로 속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왕국을 세운다. 그러나 악마는 사람들을 밀어내기보다 끌어당기며, 사람들은 아무런 참된 가치도 없는 선물을 받는 대가로 기꺼이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다." 이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앞서 타락, 곧 분리에 관해 논의했지만, 분리의 의미는 분명히 이해되어야 한다. 분리는 시간 안에서는 충분히 실재하지만 영원 안에서는 그렇지 않은 사고 체계다. 모든 믿음은 그 믿음을 믿는 사람에게는 실재한다.
그 상징적인 동산에서는 오직 한 나무의 열매만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열매를 금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금지했다면 그 열매를 먹을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을 안다고 그대에게 장담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을 그들 자신의 파멸이 가능한 자리에 두었겠는가?
"금지된 나무"는 "지식의 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앎을 창조했고 앎을 자신의 창조물에게 값없이 주었다. 여기 담긴 상징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지만,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창조물이 그들 자신의 목적을 파괴할 수 있다고 보는 그 어떤 해석도 잘못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라.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창조하는 능력을 찬탈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물이 공동 창조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찬탈이라는 의미에서다.
하나님과 창조물이 공동 창조자라는 믿음은 "자아상"(self-concept), 곧 자아가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려는 경향에 담겨 있다. 이미지는 지각되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다. 앎은 속일 수 없지만, 지각은 속일 수 있다.
그대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를 창조하는 존재로 지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믿는 것 이상은 할 수 없다. 그대는 그 지각을 참으로 만들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앞서 말했듯이, 그대가 마침내 올바르게 지각할 때, 그대는 다만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기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다는 그 믿음이 그대의 사고 체계의 초석이다. 그대의 모든 방어는 그 믿음을 드러낼 수도 있는 관념들을 공격하는 데 쓰인다. 그대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든 이미지라고 믿는다. 그대의 마음은 이 점에서 성령과 갈라져 있으며, 그대가 말 그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한 가지를 믿는 한 어떤 해결도 없다. 그래서 그대는 창조할 수 없고 자신이 만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은 분리에 대한 믿음을 매우 실재하고 매우 두렵게 만들 수 있으며, 이 믿음이 바로 "악마"다. 악마는 강력하고 활동적이며 파괴적이고 하나님과 분명히 대립한다. 이는 악마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아버지됨(Fatherhood)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삶을 보라, 그리고 악마가 무엇을 만들어 냈는지 보라. 그러나 이 만듦은 진리의 빛 안에서 반드시 사라지리라는 것을 깨달으라, 그 토대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의한 그대의 창조는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유일한 반석(Foundation)이다. 빛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출발점은 진리이며, 그대는 자신의 시작(Beginning)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 이후로 많은 것이 보였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의 마음이 갈등 속에 있어도, 그대의 참나(Self)는 여전히 평화 속에 있다.
그대는 아직 충분히 멀리까지 돌아가지 않았으며, 그것이 바로 그대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유다. 그대가 시작(Beginning)에 가까워질수록, 그대는 마치 시작이 죽음의 두려움인 것처럼 자신의 사고 체계가 파괴되리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죽음은 없지만, 죽음에 대한 믿음은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려 나가 시들어 버릴 것이다. 기뻐하라! 빛은 생명의 참된 반석(Foundation)에서 비추어 나올 것이고, 그대 자신의 사고 체계는 바로잡힌 채 서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 수 없다.
구원을 두려워하는 그대는 죽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 앎과 지각은 화해할 수 없다.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 앎과 지각이 화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 화해할 수 없다고 믿는 것과 같다. 오직 앎의 하나됨만이 갈등에서 자유롭다.
그대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나라가 이 세상 너머에서 그대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직 이 세상 안에서만 권위의 문제라는 관념이 의미를 지닌다.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진리이며, 진리는 그 나라가 자신을 위해 창조되었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다.
성경은 그대가 형제와 함께 그가 요청하는 것보다 두 배 멀리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결코 형제를 자신의 여정에서 뒤로 물러나게 하라는 뜻이 아니다. 형제에 대한 헌신 역시 그대를 뒤로 물러나게 할 수 없다. 헌신은 오직 서로의 진보로만 이어질 수 있다.
참된 헌신의 결과는 영감(inspiration)인데,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면 이는 피로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피로하다는 것은 영이 빠져나간(dis-spirited) 상태이지만, 영감을 받는다는 것은 영 안에 있는 상태다. 자기중심적(egocentric)이라는 것은 영이 빠져나간 상태이지만, 올바른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게 중심을 둔다는 것은 영감을 받거나 영 안에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영감을 받은 사람은 깨우친 사람이며 어둠 속에 머물 수 없다.
그대는 영에서 말할 수도 있고 에고에서 말할 수도 있으니, 그것은 그대의 선택이다. 그대가 영에서 말한다면, 그대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줄 알라"를 선택한 것이다. 이 말은 앎을 반영하기에 영감으로 가득하다. 그대가 에고에서 말한다면, 그대는 앎을 긍정하는 대신 부인하고 있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스스로에게서 영을 빠져나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쓸모없는 여정에 나서지 말라, 그 여정은 참으로 헛되기 때문이다. 에고는 그런 여정을 바랄 수도 있지만, 영은 결코 나설 수 없다. 영은 자신의 토대를 떠나기를 언제까지나 거부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향한 여정은 마지막 "쓸모없는 여정"이어야 한다. 십자가를 향한 그 여정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미 이루어진 일로 여기고 흘려보내라. 그대가 그 여정을 그대 자신의 마지막 쓸모없는 여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대는 나의 부활에 함께할 자유도 얻는다.
그 여정을 마지막으로 받아들이기 전까지 그대의 삶은 참으로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 삶은 다만 분리와 힘의 상실, 배상하려는 에고의 헛된 시도, 그리고 마침내 육체의 십자가형, 곧 죽음을 되풀이할 뿐이다. 이런 되풀이는 자발적으로 내려놓기 전까지는 끝이 없다.
"오래된 거친 십자가에 매달리는" 애처로운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십자가형이 주는 유일한 메시지는 그대가 그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전까지 그대는 원하는 만큼 자주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자유가 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내가 그대에게 주려 했던 복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떠맡아야 할 또 다른 여정이 있으며, 그대가 이 가르침들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그것들은 그대가 그 여정에 나설 준비를 갖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