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몸이 아닌 그대

1) 소망의 겉모습

땅 위의 모든 것에 대한 시험은 단순히 이것이다 —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답이 그것이 그대에게 무엇인지를 정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지만, 그대가 섬기는 목적에 따라 그대는 그것에 실재성을 부여할 수 있다. 여기서 그대는 그것과 마찬가지로 다만 수단일 뿐이다.

하나님은 목적이면서 또한 수단이다. 천국에서는 수단과 목적이 하나이며, 하나님과도 하나다. 이것이 참된 창조의 상태이며, 시간 안이 아니라 영원 안에서 발견된다. 여기서는 그 누구에게도 이 상태가 묘사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울 방법도 없다. 그대가 배움을 지나 주어진 것으로 나아가기 전까지는, 그대가 그대의 창조물들을 위해 다시 거룩한 집을 만들기 전까지는, 이 상태는 이해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함께 창조하는 이는 아들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아들은 아버지를 닮게 창조되었을 수밖에 없다. 그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 모든 것에 아울러지는 완전한 존재이다. 더할 것도 없고 빼앗길 것도 없으며, 크기에서도 장소에서도 시간에서도 태어나지 않고, 그 어떤 종류의 한계나 불확실함에도 붙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수단과 목적은 하나로 합쳐지며, 이 하나에는 그 어떤 끝도 전혀 없다. 이 모든 것은 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자신의 기억 속에 배우지 못한 교훈 하나를, 목적이 여전히 불확실한 생각 하나를, 또는 나뉜 목표를 지닌 소망 하나를 여전히 지니고 있는 이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이 과정은 쉽게 배울 수 없는 것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이 과정의 범위는 그대 자신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다만 그대의 것은 그대가 준비되었을 때 그대에게 오리라고 말할 뿐이다. 여기서 수단과 목적은 분리되어 있다.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도록 만들어졌고 그렇게 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수단과 목적을 실제로 분리된 것처럼 다룬다. 모든 지각은 그 목적이 이해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거꾸로 뒤집혀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지각은 하나의 수단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지각이 그대가 무엇을 위해 보는지에 얼마나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지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지각은 그대가 보는 것을 그대에게 가르쳐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대가 가르친 것을 증언할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소망의 겉모습이다 — 그대가 참이기를 원했던 하나의 형상이다.

그대 자신을 바라보라. 그러면 그대는 육체를 볼 것이다. 이 육체를 다른 빛 안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다르게 보인다. 그리고 빛이 없으면 그것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대는 여전히 손으로 육체를 느끼고 그것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그것이 거기 있다고 다시 안심한다. 여기에 그대가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하나의 형상이 있다. 그 형상은 그대의 소망을 실현시킬 수단이다. 그 형상은 자신을 바라볼 눈과, 자신을 느낄 손과, 자신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일 귀를 내준다.

그 형상은 그대에게 자기 자신의 실재성을 증명해 보인다. 그렇게 육체는 그대 자신에 대한 하나의 이론이 된다. 그 자체 너머의 증거를 위한 여지는 마련되어 있지 않고, 육체의 시야 안에는 벗어날 길도 없다. 그 자신의 눈을 통해 보면, 그것의 경로는 확실하다.

육체는 자라고 시들며, 번성하고 죽는다. 그리고 그대는 그것과 떨어진 그대 자신을 생각할 수 없다. 그대는 그것을 죄스럽다고 낙인찍고 그것의 행위를 미워하며, 그것을 악하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대의 특별함은 이렇게 속삭인다 — "여기에 내가 기뻐하는 나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있다." 그렇게 이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목적을 섬기는 수단이 된다. 동일하지도, 닮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그에게 내주는 수단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흉내다. 하나님의 아들의 창조가 하나님에게 기쁨을 주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했으며 그 목적을 나누었던 것처럼, 육체도 자신을 만든 그 관념을 증언하며 그것의 실재성과 진리성을 대변한다.

그리고 그렇게 두 아들이 만들어지며, 둘 다 만남의 자리도 마주침도 없이 이 땅을 걷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그대 자신의 밖에서 지각된다 — 그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다른 하나는 안에 머문다 — 그의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대 안에 있는 것처럼 그대의 형제 안에 있다. 두 아들의 차이는 그것들이 어떻게 보이는지에도, 어디로 가는지에도, 심지어 무엇을 하는지에도 있지 않다.

두 아들은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닌다. 바로 이 목적이 두 아들을 각자 자신을 닮은 것들과 하나로 잇고, 각각을 다른 목적을 지닌 모든 측면들로부터 분리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간직한다.

인간의 아들은 낯선 뜻을 지각하며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그의 지각은 그것에 진리의 겉모습을 부여함으로써 그의 소망을 섬긴다. 그러나 지각은 다른 목표를 섬길 수 있다.

지각은 그대의 선택에 의하지 않고는 특별함에 묶여 있지 않다. 그리고 다른 선택을 내려 지각을 다른 목적을 위해 쓰는 것이 그대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그대가 보는 것은 그 목적을 잘 섬길 것이며, 그대에게 자기 자신의 실재성을 증명해 보일 것이다.

2) 형제를 자신으로

그대 안의 그리스도는 몸에 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대 안에 있다. 따라서 그대는 몸 안에 있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그대 안에 있는 것은 밖에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 삶의 바로 그 중심에 있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대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죽음 안에 거할 수 없다. 그대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는 거룩함의 틀 안에 있다. 이 틀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며, 그들이 자신의 몸이 있다고 생각한 그 자리로 와서 그를 보라고 그들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몸은 녹아 사라져, 그들 안에 그의 거룩함을 담는 틀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지닌 사람은 누구나 어디에서든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몸 안에서만은 예외다. 그리고 자신이 몸 안에 있다고 믿는 한, 그 사람이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그리스도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른 채 그리스도를 지니고 다니며, 그리스도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리스도가 있는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의 아들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 있는 바로 그곳에 머물며, 사람의 아들의 특별함이 몸 안에 드러나 있는 것만큼이나 뚜렷이 볼 수 있게, 자신의 거룩함 안에서 그와 함께 걷는다.

몸은 치유가 필요 없다. 그러나 자신을 몸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참으로 병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는 치유책을 내놓는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몸을 그의 빛으로 감싸고, 그에게서 비치는 거룩함으로 그것을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몸이 하는 말과 행동은 무엇이든 그리스도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몸은 그들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온유함과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를 실어 나른다. 이것이 그대의 형제가 그대를 위해 지닌 사명이다. 그리고 그대의 사명도 그렇게 형제를 위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스도가 그대에게 맡긴 일을 하는 것이 힘들 리 없다. 그 일을 하는 이는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가운데 그대는 몸이 그 일을 하는 수단처럼 보일 뿐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마음은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대의 것이기도 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그와 하나 된 마음을 통해 몸을 이끈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의 거룩한 형제에게 드러나 보이며, 그도 그대에게 그러하다.

여기 거룩한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과 만나는 자리가 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의 여러 측면 사이에는 지각되는 차이가 없다. 이 측면들은 만나고 합쳐져 그리스도를 온전하고 순수하며 그의 영원한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로서 그의 아버지에게로 들어 올린다.

거룩함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그를 보는 것 말고 어떻게 그대 안의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겠는가? 지각은 그대가 보는 것 안에 그대가 드러나 있다고 말한다. 몸을 보라, 그러면 그대는 자신이 거기에 있다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보는 모든 몸은 그대에게 그대 자신을 상기시킨다 — 그대의 죄스러움, 그대의 사악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대의 죽음을.

그리고 그대는 이것을 그대에게 말하는 자를 경멸하며 그 사람의 죽음을 구하고 싶지 않겠는가? 메시지와 전달자는 하나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의 형제를 그대 자신으로 보아야 한다. 그 형제의 몸이라는 틀 안에서 그대는 그대의 죄스러움을 볼 것이며, 그 몸 안에서 그대는 유죄 선고를 받은 채 서 있다. 형제의 거룩함 안에 놓이면, 그 형제 안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서 선포한다.

3) 하나 됨의 스승

지각은 그대 자신이 어떤 존재이기를 바라는지에 대한 선택이다 — 그대가 살고 싶은 세상, 그리고 그대의 마음이 만족하고 흡족해하리라고 생각하는 상태에 대한 선택이다. 지각은 그대의 결정에 따라, 그대가 안전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을 선택한다. 그것은 그대가 되고 싶은 대로 그대 자신을 그대에게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그대의 목적에 충실하여 그 목적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으며, 그대 마음속의 목적이 떠받치지 않는 그 무엇에도 조금의 증거조차 내주지 않는다.

지각은 그대가 보아야 할 목적의 일부다. 수단과 목적은

결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대는 따로 떨어진 생명이 있는 듯 보이는 것에는 사실 아무 생명도 없음을 배우게 된다.

그대는 하나님을 위한 수단이지, 그와 분리되거나 그와 따로 떨어진 생명을 지닌 것이 아니다. 그의 생명은 그의 아들인 그대 안에 드러나 있다.

하나님의 각 측면은 거룩함과 완전한 순수함으로 틀 지어져 있다. 또한 천상의 사랑으로도 틀 지어져 있는데, 그 사랑은 자신이 바라보는 모든 것을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풀어 주고자 하는 것 말고는 바라는 바가 없을 만큼 완전하다.

그 사랑의 광채는 그 사랑이 바라보는 모든 몸을 뚫고 비치며, 그 몸의 어둠을 지나쳐 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어둠을 온통 빛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 온유함을 통해 베일이 걷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와 그대의 형제는 이제 그 앞에 서 있으며, 그대를 분리되고 떨어져 있게 하는 듯 보이는 그 베일을 그가 걷어 내도록 한다.

그대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천국도 그대에게 분리된 것으로 나타난다. 천국이 진리 안에서도 분리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대가 진리와 이어지도록 주어진 연결 고리가 그대가 이해하는 바를 통해 그대에게 닿게 하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이며, 그대의 모든 형제가 진리 안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는 결코 분리된 적이 없으며, 그리스도는 그대의 이해 안에, 곧 그대 안에서 그의 아버지의 뜻을 함께하는 그 부분 안에 머문다.

성령은 그대의 다른 부분 — 분리되고 다르고 특별해지고 싶어 하는 작고 미친 욕망 — 을 그리스도와 이어, 참으로 하나인 것에게 그 하나 됨을 분명히 밝혀 준다.

이 세상에서는 이것이 이해되지 않지만, 가르칠 수는 있다. 성령은 그대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목적을 섬기며, 그렇게 하여 특별함의 목표가 오류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잡힐 수 있게 한다. 성령의 목적은 여전히 아버지와 아들 둘 다와 하나이기에, 성령은 하나님의 뜻과 그대가 참으로 원하는 바를 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로 지각되고, 하나임을 자각하며, 그렇게 경험되는 마음에 의해서만 이해된다.

이 하나 됨이 어떻게 경험되는지, 그것이 경험되려면 그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그대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성령의 기능이다. 이 모든 가르침은 시간과 장소를 마치 따로 떨어진 것인 양 다룬다. 그대가 자신의 일부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하나로 합쳐진 하나 됨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갈라진 마음은 결코, 모든 것을 그 자체 안에서 하나로 묶는 하나 됨의 스승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마음 안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 그 스승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스승은 이 마음이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상태에서, 그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 스승은 모든 배움을 사용하여 환영을 진리로 옮겨야 한다. 그대에 대한 모든 거짓된 생각을 거두어, 그 생각들 너머에 있는 진리로 그대를 이끌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아주 간단히 다음과 같이 줄일 수 있다 — 같은 것은 다를 수 없고, 하나인 것은 따로 떨어진 부분들을 가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