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형제의 거룩함이 구원
1) 특별함을 내려놓기
그대는 특별하지 않다. 그대가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그대가 참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진리에 맞서 자신의 특별함을 방어하려 든다면, 그대가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겠는가? 그대가 귀 기울이는 것이, 그리고 묻고 답하는 것이 그대의 특별함이라면, 성령이 내주는 그 어떤 답이 그대에게 이를 수 있겠는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대에게 영원히 흘러나와 그대가 무엇인지를 사랑으로 찬미하는 그 선율 속에서 소리 없는, 특별함의 하찮은 대답이 그대가 귀 기울이는 전부다. 그리고 그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그 광대한 영광과 사랑의 노래는 특별함의 "위대함" 앞에서 고요하고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특별함의 소리 없는 목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지만, 하나님 자신의 부름은 그대에게 소리가 없다. 그대는 자신의 특별함을 방어할 수 있지만, 특별함과 나란히 하나님을 대변하는 음성을 결코 듣지 못할 것이다. 특별함과 진리는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며 서로 다른 귀에 가닿는다.
특별한 이 하나하나에게는 저마다 다른 메시지, 곧 저마다 다른 의미를 지닌 메시지가 진리다. 그러나 진리가 어떻게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는가? 특별한 이들이 듣는 그 특별한 메시지들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서로 다르며 떨어져 있다고 확신시킨다. 또한 각자 자신의 특별한 죄 안에서, 자신의 특별함을 전혀 보지 않는 사랑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확신시킨다.
그리스도의 인식(vision)은 특별한 이들의 "적"이다. 그것은 그들이 바라보려는 것을 보지 않으며, 자신들이 본다고 생각하는 그 특별함이 환영임을 그들에게 보여 주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신 무엇을 보게 되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의 그 빛나는 광채를, 그의 아버지를 너무나 닮아 그에 대한 기억이 즉시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그 광채를 볼 것이다.
그리고 이 기억과 함께, 아들은 자신의 창조물들을 기억한다. 자신이 자신의 아버지를 닮은 것만큼이나 그 창조물들도 자신을 닮았다. 그리고 그가 만든 세상 전체와, 그의 모든 특별함과, 그 특별함을 방어하려고 자신에 맞서 그가 붙들었던 모든 죄가 사라질 것이다. 그의 마음이 자신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가 돌아와 그것들의 자리를 대신할 때 그렇게 된다.
이것이 진리의 유일한 "대가"다 — 그대는 결코 있었던 적이 없는 것을 더 이상 보지 않을 것이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을 더 이상 듣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받는 것이 희생인가?
자신의 구원자를 자신의 특별함에 사슬로 묶어 그것에 그의 자리를 내준 그대여, 이것을 기억하라 — 그는 그대가 그와, 그대를 위해 그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능 사이에 놓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죄를 그대에게 용서할 힘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는 그의 기능을 바꾸지 못할 것이며, 이는 그의 안과 그대 자신의 안에 있는 진리를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진리가 둘 안에서 똑같다는 것을 확신하라. 그것은 서로 다른 메시지를 내주지 않으며, 하나의 의미만을 지닌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와 그대의 형제 둘 다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이며, 그대들 둘 다에게 풀려남을 가져다주는 하나다.
여기에 그대의 형제가 천국의 열쇠를 손에 든 채, 그것을 그대에게 내밀며 서 있다. 특별함이라는 꿈이 그대들 사이에 남아 있지 못하게 하라. 하나인 것은 진리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대가 그를 벗으로서 바라보았을 때, 그대 자신 안에서 그대가 보게 될 그 사랑스러움을 생각해 보라.
그 형제는 특별함의 적이지만, 그대 안의 실재하는 것에게는 오직 벗일 뿐이다. 그대가 그에게 가했다고 생각한 그 어떤 공격도, 하나님이 그가 그대에게 내주기를 뜻하는 그 선물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했다. 그 선물을 내주려는 그의 필요는 그 선물을 지니려는 그대의 필요만큼이나 크다. 그가 그대의 모든 특별함을 그대에게 용서하고, 그대를 마음 안에서 온전하게 만들고 그와 하나로 만들게 하라.
그 형제는 오직 그대의 용서를 그대에게 되돌려 주려고 그대의 용서를 기다린다. 자신의 아들을 단죄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대다. 그의 특별함을 구하고 그의 참나를 죽이려고 말이다. 그대는 진리의 길을 따라 멀리까지 왔다 — 이제 와서 흔들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다만 한 걸음만 더 가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모든 흔적이 사랑 안에서 녹아 사라질 것이다. 그대의 형제의 특별함과 그대의 특별함은 서로 적이며, 서로를 죽이고 서로 같음을 부인하도록 증오 안에 묶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천국을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 보이게 만드는 이 마지막 장애물에 이른 것은 환영이 아니다. 여기 이 거룩한 자리에서 진리는 고요한 축복 속에서, 그리고 그 무엇도 밖에 서 있지 않을 만큼 참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평화 속에서 그대와 그대의 형제를 맞이하려고 기다리며 서 있다.
그대 자신에 대한 모든 환영을, 그대가 희망과 정직함으로 다가오는 이 자리 밖에 남겨 두라. 여기에 그대의 특별함으로부터 그대를 구할 그대의 구원자가 있다. 그 구원자는 그대가 그를 그대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필요로 하며, 이는 그대가 그대에 대한 그의 받아들임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대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그러하듯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은 특별하지 않다. 그는 자신이 무엇인지의 한 부분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자신의 아들에게 주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붙들어 두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특별하지 않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닮기를 뜻한 것이며, 그렇다면 그대의 형제는 그대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대를 포함한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다만 그가 지닌 것을 그에게 내주라.
하나님이 그대와 그대의 형제에게 똑같은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주었음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그대들 둘 다가 하나님과 함께 우주를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택한 것은, 사랑이 결코 나뉠 수 없고 사랑이 지금의 모습으로부터, 그리고 영원히 그러할 모습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형제의 것이다. 사랑의 일부가 그에게서 거부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완전하기에 그대가 잃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 형제에게 주어진 것은 그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처럼 그대도 완전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대를 그에게, 그를 그대에게 주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같은 것은 그와 하나다. 그리고 오직 특별함만이, 하나님과 그대가 하나라는 진리가 마침내 시야에 들어온 평화의 희망과 함께 있는 천국이 아닌 다른 무엇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특별함은 사랑이라는 선물 위에 찍힌 배신의 인장이다.
특별함의 목적을 섬기는 것은 무엇이든 죽이는 데 내주어질 수밖에 없다. 특별함의 인장을 지닌 선물은 그 무엇이든 주는 이와 받는 이 모두에게 배신을 내줄 수밖에 없다.
특별함이 가리는 눈에서 나오는 그 어떤 눈길도 죽음의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 힘을 믿는 그 어떤 이도, 죄를 사랑의 대체물로 세우고 특별함을 충실히 섬길 흥정과 타협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특별함의 목적을 소중히 여기는 그 어떤 관계도, 안전의 무기로서, 그리고 사랑이라는 "위협"으로부터 모든 환영을 지키는 위대한 수호자로서 살인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
특별함에 대한 희망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자신에게서 떼어 놓는 감옥으로서 육체를 만들었다는 것이 가능해 보이게 만든다. 특별함은 하나님이 들어갈 수 없는 특별한 자리와, 그대의 하찮은 자아 말고는 그 누구도 맞아들여지지 않는 숨을 자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 무엇도 신성하지 않다. 오직 그대에게만, 그대 혼자에게만, 그대의 모든 형제들로부터 떨어지고 분리된 채로만 신성할 뿐이다.
환영에 대한 제정신의 그 어떤 침입으로부터도 안전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안전하고, 영원한 갈등을 위해서는 안전하다. 여기에 그대가 자신에게 닫아 건 지옥의 문들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고 진리와 구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광기와 외로움 속에서 그대의 특별한 왕국을 다스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대가 던져 버린 그 열쇠를 하나님은 그대의 형제에게 주었다. 그대가 그대 자신의 계획 대신 그대의 구원을 위한 그의 계획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그의 거룩한 손이 그 열쇠를 그대에게 내밀 것이다. 그대의 모든 비참함을 보고, 그대의 계획이 실패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대에게 그 어떤 종류의 평화와 기쁨도 가져다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자각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이 준비된 상태에 어떻게 이를 수 있겠는가?
그대가 지금 지나 여행하고 있는 이 절망은 다만 절망의 환영일 뿐이다. 특별함의 죽음은 그대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깨어나는 것이다. 그대는 다만 그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환영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그대를 창조한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아갈 뿐이다.
용서는 특별함의 끝이다. 오직 환영만이 용서될 수 있으며, 그러면 그것들은 사라진다. 용서는 모든 환영으로부터의 풀려남이며, 그렇기에 부분적으로만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환영에 매달리는 이는 그 누구도 자신을 죄 없는 존재로 볼 수 없다. 그는 하나의 오류를 여전히 사랑스럽게 자신에게 붙들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오류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죄로 만든다.
그렇다면 자신을 위해서는 용서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서, 그가 어떻게 자신의 용서를 온전히 내줄 수 있겠는가? 그가 용서를 온전히 내주는 순간, 그가 용서를 온전히 받으리라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의 은밀한 죄책감은 그 자신에게 용서받아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소중히 여기는 그 어떤 형태의 특별함이든, 그대는 그 특별함을 죄로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서, 그대의 보잘것없는 힘을 다해 강력하게 방어된 채, 침해되지 않고 서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것은 그대 자신에 맞서 서 있다 — 하나님의 적이 아니라 그대의 적이다. 그렇게 그것은 그대를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고, 그 특별함을 방어하는 이로서 그대를 하나님과 분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는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것을 지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힘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이 우상은 그것을 빼앗아 갔다. 그대는 그대의 형제의 생득권을 특별함에 내주어, 그를 홀로 용서받지 못한 채 남겨 두었고, 그대 자신도 그의 곁에서 죄 안에 남겨 두었다. 그대를 구할 수 없는 그 우상 앞에서 둘 다 비참함 속에 있는 것이다.
상처받기 쉽고 공격에 열려 있는 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그저 하나의 말, 하나의 작은 속삭임, 그대에게 맞지 않는 하나의 상황, 또는 그대가 예상하지 못한 하나의 사건이 그대의 세상을 뒤흔들어 혼돈 속으로 내던질 정도로 말이다. 진리는 연약하지 않다. 환영은 그것을 완전히 흔들리지 않고 어지럽혀지지 않은 채로 놓아둔다.
그러나 특별함은 그대 안의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 무엇에 의해서든 균형을 잃을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위에 놓여 있는 것은 결코 안정될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크고 부풀려 보인다 해도 여전히 산들바람 하나하나에도 흔들리고 돌고 소용돌이칠 수밖에 없다.
토대 없이는 그 무엇도 안전하지 않다. 하나님이 안전이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상태에 자신의 아들을 남겨 두었겠는가? 아니다, 그의 아들은 그에게 기대어 안전하다.
걷고 숨 쉬는 모든 것에, 또는 기어 다니는 모든 것에, 또는 그저 살아 있는 그 무엇에게든 공격받는 것은 그대의 특별함이다. 그것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도 그 무엇으로부터도 안전하지 않다. 특별함은 영원토록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특별함의 정체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그대를 위해 원하는 것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대가 영원히 그의 뜻에 맞설 것이라는 은밀한 맹세다.
그리고 특별함이 하나님의 뜻과 그대의 뜻 사이에 죽음의 불타는 검처럼 서서 둘을 적으로 만드는 한, 두 뜻이 결코 같아질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대의 용서를 청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그대를 위해 뜻하는 것과 그대가 뜻하는 것 사이에 낯선 뜻과도 같은 분리가 일어나지 않기를 원한다. 그 둘은 같다.
둘 중 어느 쪽도 특별함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둘이 어떻게 사랑 자체의 죽음을 뜻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둘은 환영에 대한 공격을 가할 힘이 없다. 그 둘은 육체가 아니다. 하나의 마음으로서 그 둘은 모든 환영이 자신들 앞으로 옮겨져 뒤에 남겨지기를 기다린다.
구원은 죽음에조차 도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이 그대의 뜻이 아님을 아는 하나님 자신도, 그대가 죽음이 그대의 뜻이라고 생각하기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주의 위대한 창조주를, 생명과 사랑과 거룩함의 근원을, 완전한 아들의 완전한 아버지를, 그대의 특별함에 대한 그대의 환영으로 인해 용서하라. 여기에 그대가 자신의 집으로 삼기로 택한 지옥이 있다.
아버지는 이것을 그대를 위해 택하지 않았다. 그가 이곳에 들어오라고 청하지 말라. 사랑과 구원으로 가는 길은 막혀 있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의 형제를 지옥의 깊은 곳에서 풀어 주려 한다면, 그대는 하나님을 용서한 것이다 — 그의 뜻은 그대가 평화의 품 안에서, 완전한 안전 속에서, 그리고 그대의 쉼을 망칠 그 어떤 특별함의 생각의 열기와 악의도 없이 영원히 쉬는 것이다. 그가 줄 수 없었던, 그리고 그대가 대신 만들어 낸 그 특별함을 거룩한 이에게 용서하라.
특별한 이들은 모두 잠들어 있으며,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사랑스러움의 세상에 둘러싸여 있다.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그들이 잠들어 누워 있는 관 옆에 서서, 그들에게 나와서 자신들의 죽음이라는 꿈에서 깨어나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그들은 특별함이라는 꿈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깨우려는 그 부름을 미워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의 꿈을 실재로 만들지 않았다고 그를 저주한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그러나 죽음을 만들지 않은 그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꿈 안에서 그러할 뿐이다.
눈을 조금 떠 보라. 그대가 그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그 구원자를 보고, 그의 생득권을 그에게 돌려주라. 그 생득권은 그대의 것이다. 특별함의 노예들도 결국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뜻이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지옥과 저주로 단죄하겠는가? 그리고 그대는 이것이 그대의 구원자에게 행해지기를 뜻하는가? 하나님은 그대들 둘 다를 지옥에서 구하려고 그의 뜻과 하나가 되라고 그를 통해 그대를 부른다.
그 구원자가 그대의 용서를 위해 내미는 손에 남은 못 자국을 바라보라.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그대의 자비를 청한다. 그 둘을 부인하지 말라. 그 둘이 그대에게 청하는 것은 다만 그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뿐이다.
그 둘은 그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대의 사랑을 구한다. 그 둘 대신 그대의 특별함을 사랑하지 말라. 못 자국은 그대의 손에도 있다. 그대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그의 뜻이 아니었음을 그대의 아버지에게 용서하라.
특별함은 그대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오직 그대 자신에게만 투입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그대의 적이 된다 — 두려움의 대상이자 공격의 대상, 치명적이고 위험하며, 미움받아 마땅하고 오직 파괴될 가치만이 있는 것이 된다.
그 밖의 모든 것, 곧 그 세상이 내주는 그 어떤 부드러움도 다만 기만일 뿐이지만, 그 세상의 증오는 실재한다. 파괴의 위험 속에서 그 세상은 죽일 수밖에 없으며, 그대는 그 세상보다 먼저 죽이려고 그 세상에 이끌린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죄책감의 끌림이다. 여기에 구원자로 왕좌에 오른 죽음이 있다 — 십자가에 못 박힘이 이제 해방이 되고, 구원은 오직 그대 자신을 제외한 세상의 파괴만을 의미할 수 있게 된다. 육체의 목적이 특별함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바로 이것이 육체를 그 자신의 방어에 있어 연약하고 무력하게 만든다. 육체는 그대를 연약하고 무력하게 만들려고 고안되었다.
분리라는 목표가 분리의 저주다. 그러나 육체는 아무 목표도 지니지 않는다. 목적은 마음에 속한다. 그리고 마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뀔 수 있다.
마음은 자신이 무엇인지도, 자신의 모든 속성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이 목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은 바뀔 수 있으며, 육체의 상태는 그에 따라 옮겨질 수밖에 없다. 육체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육체를 해치는 수단으로 보면, 그것은 해쳐진다. 그것을 치유하는 수단으로 보면, 그것은 치유된다. 그대는 다만 그대 자신을 해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여러 번 되풀이해 말해졌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특별함에 몰두한 마음은 이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공격하지 않고 치유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이것은 아주 뚜렷하다.
공격의 목적은 마음 안에 있으며, 그 결과는 오직 그 목적이 있는 곳에서만 느껴진다. 그리고 마음은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해로운 목적은 마음을 하나로서 해칠 수밖에 없다.
특별함에게 이보다 덜 말이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기적에게 이보다 더 말이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기적은 다만 해침에서 치유로의 목적 변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목적의 옮겨감은 특별함을 "위태롭게" 하지만, 이는 오직 모든 환영이 진리에 의해 "위협받는다"는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그것들은 진리 앞에서 서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환영들 안에 대체 어떤 위안이 있었기에, 그대는 그대의 아버지가 그로부터 청하는 그 선물을 붙들어 두고 대신 환영들에게 내주려 하는가?
아버지에게 내주면, 우주가 그대의 것이 된다. 환영들에게 내밀면, 그 어떤 선물도 되돌려질 수 없다. 그대가 특별함에 내준 것은 그대를 파산시켰고 그대의 보물 창고를 메마르고 텅 비게 만들었으며, 그대의 평화를 어지럽힐 그 무엇이든 들어와 파괴하도록 초대하는 열린 문을 남겨 두었다.
2) 그리스도와 동일시
앞서 나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수단이나 그것에 이르는 방법을 고려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의 형제를 죄 없는 이로 볼 수 있기를 바라는지는 고려하라. 그것도 잘 고려하라.
특별함에게 그 답은 "아니다"일 수밖에 없다. 죄 없는 형제는 그것의 적이며, 죄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의 벗이 될 것이다. 그대의 형제의 죄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진리가 부인하는 의미를 특별함에 부여할 것이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그의 죄 없음을 선포한다. 거짓인 모든 것은 그의 죄가 실재한다고 선포한다. 그가 죄인이라면, 그대의 실재는 실재가 아니라, 순식간에 지속되다 먼지로 부스러지는 특별함의 꿈에 불과한 것이 된다.
하나님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빼앗기고 그대가 구원 너머에 남아 있게 되는 이 무의미한 꿈을 방어하지 말라. 실재 안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평화가 그대와 온전히 함께 있지 않을 때, 그리고 그대가 그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겪을 때, 그대는 그대의 형제 안에서 어떤 죄를 보았고, 거기 있다고 생각한 것에 기뻐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그대의 특별함은 안전해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그대는 자신의 구원자로 지명한 것을 구했고, 대신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그 형제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렇게 그대는 그 형제와 하나로 묶여 있다. 그대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특별함은 그의 "적"이며, 그대의 적이기도 하다.
그대 안의 그리스도는 매우 고요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 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자신이 보는 것에 기뻐한다. 그 보는 것이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하나임을 알기 때문이다.
특별함도 자신이 보는 것에서 기쁨을 얻는다. 비록 그것이 참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대가 추구하는 것은 그대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기쁨의 근원이다. 그대가 바라는 것은 그대에게 참이다.
그리고 그대가 무언가를 바란다면, 그것이 사실이라고 반드시 믿게 된다. 바람은 뜻이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실재를 만든다. 바람의 힘은 사랑이 스스로를 확장하는 것만큼이나 강력하게 환영을 떠받친다. 다만 하나는 미혹하고, 다른 하나는 치유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형태가 아무리 숨겨지거나 위장되어 있든, 그것이 아무리 사랑스러워 보이든, 그것이 아무리 섬세하게 평화의 희망과 고통으로부터의 벗어남을 내주는 것처럼 보이든, 그대가 자신에 대한 단죄를 겪지 않는 특별함의 꿈은 없다.
꿈 안에서는 결과와 원인이 뒤바뀐다. 여기서 꿈을 만든 이는 자신이 만든 것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여기서 실 한 가닥을, 저기서 조각 하나를 집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하나의 그림을 짜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 그림의 부분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으며, 전체는 그 부분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려고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의 평화가 용서로부터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대 안의 그리스도는 오직 진리만을 바라보며, 용서가 필요할 그 어떤 단죄도 보지 않는다. 그는 죄를 보지 않기에 평화롭다.
그리스도와 자신을 동일시하라. 그러면 그가 지니고 있으면서 그대가 지니지 못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는 그대의 눈이며, 그대의 귀이며, 그대의 손이며, 그대의 발이다. 그가 보는 광경과 그가 듣는 소리는 얼마나 부드러운가.
그의 형제의 손을 붙잡은 그의 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그는 얼마나 사랑스럽게 그의 곁을 걸으며, 보이고 들릴 수 있는 것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을 소리가 없는 곳을 그에게 보여 주는가.
그러나 그대의 특별함이 그의 길을 이끌게 하면, 그대는 따라갈 것이다. 그리고 둘 다 위험 속을 걸을 것이다.
각자 몰두한 채, 보지 못하는 이들의 어두운 숲 속을 걸을 것이다. 그 숲은 죄라는 반딧불이에서 순간 반짝였다가 꺼져 버리는 흔들리는 작은 빛 말고는 아무것도 밝혀 주지 않는다. 그 숲을 걸어, 서로를 이름 없는 절벽으로 이끌어 그 너머로 밀어 떨어뜨릴 것이다.
특별함이 죽이는 것 말고 무엇을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죽음의 광경 말고 무엇을 추구하겠는가? 그것이 파괴 말고 어디로 이끌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그대의 형제를 먼저 바라보았다거나, 그대를 미워하기 전에 그를 미워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특별함의 눈이 그의 안에서 보고 바라보기를 사랑하는 그 죄를, 특별함은 그대 안에서 이미 보았고, 여전히 기쁨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부패와 광기를 바라보며, 살이 이미 뼈에서 떨어져 나가고 눈 대신 보지 못하는 구멍이 있는 이 부스러져 가는 것이 그대 자신을 닮았다고 믿는 것이 기쁨인가?
그대에게 볼 눈이 없고, 들을 귀가 없으며, 붙잡을 손도 이끌 발도 없음을 기뻐하라. 그대에게 그것들이 필요한 동안,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대에게 자신의 것을 빌려줄 수 있음을 기뻐하라. 그리스도의 눈과 귀와 손과 발도 그대의 것만큼이나 환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른 목적을 섬기기에, 그것들의 목적이 지닌 힘이 그것들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그것들이 보고 듣고 붙잡고 이끄는 것에는 빛이 주어진다. 그대가 이끌어졌던 대로 이끌 수 있도록 말이다.
그대 안의 그리스도는 매우 고요하다. 그리스도는 그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며, 온 길 내내 부드러움과 축복 속에서 그대를 그곳으로 이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대가 자신 안에서 보았다고 생각한 모든 두려움을 대신한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그대가 손을 붙잡고 있는, 그리고 그대가 그에게로 이끌어 가는 그 안에서 그대에게 자기 자신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대가 보는 것은 그대 자신을 닮았다. 그리스도 말고 무엇이 보고 듣고 사랑하고 따라가 집으로 삼을 것으로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먼저 그대를 바라보았지만, 그대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바라보고 사랑하는 살아 있는 것 하나하나 안에서 그대의 완성을 찾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 완성을 찾고 있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그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내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그는 고요하다. 사랑이 이제 그대 안에 있으며, 그대의 손 안에서 그대의 형제의 손을 붙잡고 있는 그 같은 손에 의해 그대 안에 안전하게 붙들려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손은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의 모든 형제를 붙들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보지 못하는 눈에 인식(vision)을 주고, 그들의 귀가 더 이상 전쟁과 죽음의 소리를 듣지 않도록 그들에게 천국을 노래해 준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밀며 그들을 통해 손을 뻗는다. 모든 이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축복하고 그것들의 거룩함을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 광경들이 그대의 것임을, 그와 함께 바라보고 그의 기쁨을 나눌 그대의 것임을 기뻐한다. 그의 완전한 특별함 없음을 그는 그대에게 내준다. 그대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음에서 구하고, 그것들 하나하나로부터 그대의 용서가 그대의 참나(Self)에게 내주는 그 생명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스도의 광경이 볼 것의 전부다. 그리스도의 노래가 들을 것의 전부다. 그리스도의 손이 붙잡을 것의 전부다. 그와 함께 걷는 것 말고 다른 여정은 없다.
특별함에 만족하며 사랑과의 전쟁 속에서 구원을 구하려는 그대여, 이것을 생각해 보라. 천국의 거룩한 주가 그대 자신의 완성을 내주려고 몸소 그대에게 내려왔다. 그리스도의 것은 그대의 것이다. 그대의 완성 안에 그 자신의 완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들 없이 있기를 뜻하지 않은 그는 그대가 형제 없이 있기를 결코 뜻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그대만큼 완전하지 않고, 거룩함에 있어 그대가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만큼 그를 닮지 않은 형제를 그대에게 주었겠는가?
갈등이 있기 전에는 의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의심은 그대 자신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에게는 의심이 없으며, 그의 고요함은 그의 확신으로부터 온다. 그대가 다음을 받아들이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확신을 그대의 모든 의심과 맞바꿀 것이다. 곧 그리스도가 그대와 하나이며, 이 하나됨은 끝이 없고 시간을 넘어서며, 그대의 손이 그의 손이기에 그대가 붙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대 안에 있지만, 그대의 곁에서, 그리고 그대의 앞에서 걸으며, 자기 자신을 완전한 상태로 찾기 위해 반드시 가야 할 그 길을 이끈다. 그리스도의 고요함이 그대의 확신이 된다. 그리고 확신이 왔을 때 의심이 어디에 있겠는가?
3) 형제의 거룩함
그대의 형제의 거룩함 앞에서 세상은 고요하며, 평화가 부드러움과 완전한 축복 속에서 세상 위로 내려와, 밤의 어둠 속에서 그대를 계속 괴롭힐 갈등의 흔적은 단 하나도 남지 않는다. 그는 두려움의 꿈으로부터 그대를 구할 그대의 구원자다. 그는 희생의 느낌과, 그대가 지닌 것이 바람과 함께 흩어져 먼지로 변하리라는 두려움의 느낌을 치유하는 이다.
그 형제 안에 하나님이 여기, 지금 그대와 함께 있다는 그대의 확신이 있다. 그대의 형제가 자신인 그대로인 한, 그대는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그가 그대에게 알려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창조물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러하다는 표지는 그대의 형제 안에 있으며, 그의 거룩함 앞에서 그대 자신에 대한 그대의 모든 의심이 사라지도록 그대에게 내밀어졌다.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라. 그 안에서 그의 아버지는 그가 그대를 자신의 일부로 창조했다는 그대의 인정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 없이는 하나님 안에 결핍이 있을 것이며, 천국은 불완전할 것이고, 아들은 아버지 없이 있을 것이다. 우주도 실재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뜻하는 것은 온전하며, 그의 뜻이 하나이므로 그가 뜻하는 것은 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의 일부가 아니면서 살아 있는 것은 없으며, 그 안에서 살아 있지 않으면서 있는 것도 없다.
그대의 형제의 거룩함은 하나님이 그와 그대와 하나임을, 그대가 그로부터도 그의 아버지로부터도 분리되어 있지 않기에 그가 지닌 것이 그대의 것임을 그대에게 보여 준다. 우주 전체에서 그대에게 잃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 중, 그가 사랑스럽게 그대 앞에 놓아 영원히 그대의 것이 되게 하는 데 실패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의 마음 안의 그 어떤 생각도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빠져 있지 않다.
그대가 그대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누고,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가 그대를 마음에 품었던 것만큼, 그리고 지금도 그가 그대를 아는 것만큼 사랑스럽게 그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그의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머무는, 그리고 그대가 그와 함께 머무는 영원 안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지나가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아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그대의 형제는 하나님이 그를 창조한 그대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가 창조하지 않은 세상으로부터 그대를 구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치유가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의 전부임을 잊지 말라. 그 치유가 성령이 이 세상에서 보는 유일한 목적이며, 그렇기에 이 세상이 지닌 유일한 목적이다.
그대가 세상과 시간과 모든 겉모습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들의 치유뿐임을 보기 전까지는, 그대는 아버지도 그대 자신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세상을 그 목적이 아닌 것을 위해 쓸 것이고, 폭력과 죽음이라는 그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모든 면에서, 모든 방식과 모든 상황 속에서, 거기 없는 것을 지각하려는 모든 유혹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자신을 보기에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모든 신념 속에서, 그 법칙들 너머에 있는 것이 주어져 있다. 그대의 형제를 바라보고, 그의 안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는 법칙들의 완전한 역전을 보라. 그의 자유 안에서 그대의 자유를 보라. 그대의 자유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형제의 특별함이 그의 안의 진리를 가리지 못하게 하라. 그대가 그를 묶는 죽음의 법칙 중 그 어느 하나로부터도 그대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의 안에서 보는 죄 중, 그대들 둘 다를 지옥에 붙들어 두지 않는 죄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의 완전한 죄 없음은 그대들 둘 다를 풀어 줄 것이다.
거룩함은 아주 공정하여, 자신이 바라보는 모든 것에 대해 하나의 판단만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그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으며 그의 존재를 나누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그 음성을 통해 내려진다. 볼 수 있는 눈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죄 없음이다. 그 눈들이 모든 것 안에서 보는 것은 그의 사랑스러움이다.
그리고 그 눈들이 어디에서나 찾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며, 그가 없는 광경도 자리도 시간도 찾지 못한다. 그대의 형제의 거룩함 안에, 곧 그대의 구원과 세상의 구원을 위한 완전한 틀 안에, 그대의 형제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고 그대도 그와 함께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에 대한 빛나는 기억이 자리 잡혀 있다.
그로부터, 그리고 그대로부터도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리는 그 특별함의 베일에 그대의 눈이 눈멀지 않게 하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더 이상 그대가 보도록 정해진 그 인식을 그대에게서 붙들어 두지 못하게 하라. 그대의 형제의 육체는 그대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그 형제의 거룩함 안에서 드러난다. 그러니 그대가 보고 싶은 것으로서 그의 육체나 그의 거룩함 중 하나를 택하라. 그리고 그대가 택하는 것이 그대가 바라볼 것이 된다. 그러나 진리가 그대의 결정이 될 때까지, 그대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 그리고 끝이 없어 보이는 시간을 지나며 계속 선택할 것이다.
영원은 그 형제의 안의 그리스도를 또 한 번 부인함으로써 되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다만 육체일 뿐이라면, 그대의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거룩함 안이 아니라면 그대의 평화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그 일부를 그대의 형제의 거룩함 안에 영원히 두어, 그대가 마침내 알아보고 이해한 방식으로 드러난 그대 자신에 대한 진리를 볼 수 있게 한 그곳이 아니라면, 하나님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의 형제의 거룩함은 그대에게 성사이자 축복이다. 그의 오류는 그 자신으로부터도, 그를 참되게 보는 그대로부터도 하나님의 축복을 거두어 갈 수 없다. 그의 실수는 지체를 일으킬 수 있으며, 그 지체를 그에게서 거두어 가는 일이 그대에게 주어져 있다. 결코 시작된 적이 없으며 끝이 필요하지도 않은 여정을 둘 다 끝낼 수 있도록 말이다.
결코 있었던 적이 없는 것은 그대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이 그대 곁에 서 있는 형제의 일부가 아님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대의 일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그대 자신의 거울이며, 그 안에서 그대는 그대들 둘 다에게 내린 그 판단을 본다.
그대 안의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함을 바라본다. 그대의 특별함은 그의 육체를 바라볼 뿐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대의 구원이 오래 걸리지 않도록, 그 형제를 있는 그대로의 그로 보라.
목적도 없고 그 어떤 종류의 성취도 없는 무의미한 방황이, 다른 선택이 그대에게 내줄 수 있는 전부다. 그대의 형제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 이루어지고 그가 과거에서 일어날 때까지, 완수되지 않은 기능의 헛됨이 그대를 계속 괴롭힐 것이다. 자기 자신을, 그리고 그대까지도 단죄한 그가, 그대와 함께 단죄로부터 구해 낼 존재로서 그대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대들 둘 다 자신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가 육신으로 착각하고, 자신에게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한 법칙들에 묶인 것으로 착각했던 그 아들 안에서 말이다.
그대는 이 법칙들이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님을 기꺼이 깨닫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대의 형제를 그것들의 죄수로 보지 말라. 하나님의 일부를 다스리는 것이 나머지 전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대는 그를 다스린다고 보는 그 법칙들 아래에 그대 자신을 둔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대를 위한 사랑이 얼마나 커야 했는지 생각해 보라. 그는 고통에서 구해 내어 그대에게 행복을 줄 자신의 한 부분을 그대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대의 특별함이, 자신의 각 부분을 똑같은 사랑과 돌봄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사라지리라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말라.
그대 안의 그리스도는 그대의 형제를 참되게 볼 수 있다. 그대는 그가 보는 그 거룩함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려는가? 특별함은 그대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기능이다. 그것은 오직 그대만을 위해 서 있다.
특별함은 스스로 창조되고 스스로 유지되며,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육체를 넘어선 그 무엇과도 이어져 있지 않은 것으로서 그렇게 서 있다. 특별함의 눈에 그대는 하나의 분리된 우주다. 자기 자신을 자기 안에서 완전하게 붙들어 둘 모든 힘을 지녔으며, 침입에 맞서 모든 입구가 닫혀 있고, 빛에 맞서 모든 창문에 빗장이 걸려 있는 우주로서 말이다.
언제나 공격받으며 언제나 분노한 채, 그 분노가 언제나 온전히 정당화된 채, 그대는 결코 양보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경계심과 결코 멈추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노력으로 이 목표를 추구해 왔다.
그리고 이 모든 지독한 결의는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 — 그대는 특별함이 진리이기를 원했다. 이제 그대에게 요청되는 것은 다만 훨씬 적은 경계심으로, 적은 노력과 적은 시간으로, 그리고 그 목표를 유지하며 성공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힘과 함께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두 목표 중, 그대가 더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뒤의 목표다. 자아의 "희생"은 그대가 이해하는 것이며, 그대는 이 대가가 너무 무겁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작은 기꺼움, 하나님을 향한 고갯짓, 그대 안의 그리스도를 향한 인사, 작은 기꺼움을 그대는 짊어질 수 없을 만큼 무겁고 지치고 지루한 짐으로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이 확립한 그대로의 진리에 대한 헌신에는 그 어떤 희생도 요구되지 않으며, 그 어떤 부담도 불려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천국의 모든 힘과 진리 그 자체의 위력이 그 수단을 마련하고 그 목표의 성취를 보증하기 위해 주어진다. 그대의 형제의 거룩함보다 그대의 형제의 육체를 보는 것이 더 쉽다고 믿는 그대여, 무엇이 이 판단을 만들어 냈는지 반드시 이해하라.
여기에 뚜렷이 들리는 특별함의 목소리가 있다. 그리스도에게 불리한 판단을 내리며, 그대가 이룰 수 있는 목적과 그대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대에게 제시하는 목소리다. 이 판단은 그대가 그 판단을 동맹으로 삼아 하는 일에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 판단은 그대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이 판단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오직 그의 아버지가 뜻하는 것만이 가능하며, 그가 볼 다른 대안은 없기 때문이다. 그의 갈등 없음으로부터 그대의 평화가 나온다. 그리고 그의 목적으로부터 애쓰지 않는 성취와 쉼을 위한 수단이 나온다.
이 세상에 묶인 모든 이가, 진리이기를 바라는 자신의 특별함을 얼마나 쓰라리게 방어하는가! 그런 사람의 바람은 그에게 법이며, 그는 그 바람을 따른다. 그의 특별함이 요구하는 것 중 그가 거두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특별함이 필요로 하는 것 중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게 거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 특별함이 그에게 부르는 동안 그는 다른 그 어떤 음성도 듣지 못한다.
그런 사람의 특별함을 가장 작은 무시로부터, 가장 사소한 공격으로부터, 속삭이는 의심으로부터, 위협의 낌새로부터, 또는 가장 깊은 경외 말고 그 무엇으로부터든 지켜 내려면, 그 어떤 노력도 지나치지 않고, 그 어떤 대가도 과하지 않으며, 그 어떤 값도 너무 비싸지 않다. 이것이 그대의 아들이다. 그대가 그대의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만큼 그대에게 사랑받는 아들이다.
그러나 그 특별함은 그대에게 아들인 그대의 창조물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서 있다. 그대가 하나님의 아버지 됨을 그로부터 낚아채는 것이 아니라 그와 나눌 수 있도록 그대에게 주어진 그 창조물들 말이다.
그대가 자신의 힘이 되도록 만든 이 아들은 대체 무엇인가? 그토록 많은 사랑이 아낌없이 쏟아지는 이 땅의 자식은 대체 무엇인가? 그대의 창조물의 자리를 차지하는 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흉내는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을 품은 이가 그 창조물들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아들을 찾아낸 지금, 그 창조물들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홀로 빛나지 않는다. 그대의 형제 안에 있는 것은 여전히 모든 창조를, 창조된 모든 것과 창조하고 있는 모든 것을, 태어난 것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을, 여전히 미래에 있는 것과 겉보기에 지나가 버린 것을 모두 담고 있다. 그 형제 안에 있는 것은 변함이 없으며,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그대의 변함없음이 알아보아진다. 그대 안의 거룩함은 그에게 속한다.
그리고 그 거룩함을 그의 안에서 봄으로써, 그 거룩함은 그대에게 되돌아온다. 그대가 특별함에 바친 그 모든 찬사는 그에게 속하며, 그렇게 그대에게 되돌아온다. 그 모든 사랑과 돌봄, 그 굳센 보호, 밤낮으로의 생각, 그 깊은 관심, 이것이 그대라는 그 강력한 확신,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속한다. 그대가 특별함에 준 것 중 그의 몫이 아닌 것은 없다.
그리고 그의 몫인 것 중 그대의 몫이 아닌 것도 없다. 특별함이 대신 그대를 요구하는 동안 그대가 어떻게 자신의 가치를 알 수 있겠는가? 그의 거룩함 안에서 그대가 어떻게 그 가치를 알지 못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특별함을 진리로 만들려 하지 말라. 그것이 진리라면 그대는 참으로 길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대의 형제의 거룩함이 진리이기에 그대가 그의 거룩함을 볼 수 있도록 그대에게 주어졌음에 감사하라. 그리고 그대의 형제 안에서 참인 것은 그대 안에서도 그만큼 참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 그대가 마음을 지킬 수 있는가? 육체는, 그렇다, 조금은 지킬 수 있다. 시간으로부터는 아니지만, 일시적으로는 지킬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지킨다고 생각하는 것의 많은 부분을, 그대는 해친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 육체를 지키려는가? 그 선택 안에 육체의 건강과 해로움이 둘 다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육체를 부패와 죽음에 단죄하는 것이다. 육체를 과시를 위해, 다른 물고기를 낚을 미끼로, 그대의 특별함을 더 나은 방식으로 담아 둘 집으로 지키거나, 그대의 증오 주위에 사랑스러움의 틀을 짜 두려고 지킨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대의 형제의 육체에서 이 목적을 본다면, 그것이 바로 그대 자신에 대한 그대의 단죄다.
그러니 오히려 그대의 형제의 주위에 거룩함의 틀을 짜라. 진리가 그의 위에 빛나고, 그대에게 부패로부터의 안전을 줄 수 있도록 말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창조한 것을 안전하게 지킨다. 그대는 그를, 그대가 만든 그 거짓된 관념들로 건드릴 수 없다. 그는 그대가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의 어리석은 공상이 그대를 겁먹게 하지 못하게 하라. 불멸하는 것은 공격받을 수 없으며, 다만 일시적일 뿐인 것은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 일시적인 것 안에서 그대가 보는 목적만이 의미를 지니며, 그 목적이 참이라면 그것의 안전은 확고히 놓여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에는 아무 목적도 없으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한 수단이다.
진리를 위한 수단으로 지각되는 것은 무엇이든 진리의 거룩함을 나누며, 진리 자체만큼이나 안전하게 빛 안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일시적인 것이 사라져도 그 빛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의 거룩한 목적이 그것에게 불멸성을 주어, 천국에 또 하나의 빛을 두었다. 그곳에서 그대의 창조물들은 그대로부터의 선물을, 그대가 그것들을 잊지 않았다는 표지를 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