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혼돈의 법칙 너머

1) 혼돈의 네 법칙

혼돈의 "법칙들"은 빛 앞으로 끌려 나올 수는 있지만, 결코 이해될 수는 없다. 혼돈의 법칙은 거의 의미가 없으며, 따라서 이성의 영역 밖에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성과 진리에 대한 장애물처럼 보인다. 그러니 그 법칙들을 침착하게 바라보자.

그것들이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이해함으로써, 그것들 너머를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무의미하게 만들고 진리를 공격하는 것이 그것들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대가 만든 세상을 다스리는 법칙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무것도 다스리지 않으며, 깨뜨릴 필요도 없다. 다만 바라보고 그 너머로 나아가면 될 뿐이다.

혼돈의 첫 번째 법칙은 진리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 모든 원리가 그러하듯, 이것도 각자가 분리되어 있으며 다른 이들과 자신을 구별 짓는 저마다 다른 일련의 생각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이 원리는 환영들 사이에 위계가 있다는 신념, 곧 어떤 것들이 더 가치 있으며 따라서 더 참되다는 신념에서 자라난다.

각자는 이 위계를 스스로 확립하고, 다른 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공격함으로써 참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가치가 서로 다르고, 그것들을 지닌 이들이 서로 다르게 보이며, 따라서 적처럼 보이기에 정당화된다.

혼돈의 첫 번째 법칙이 기적의 첫 번째 원리를 어떻게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생각해 보라. 이것은 환영들 사이에 진리의 정도를 세워, 어떤 환영은 다른 환영보다 극복하기 더 어려운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환영들이 모두 같으며 똑같이 참이 아니라는 것이 깨달아진다면, 기적이 그것들 모두에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 어떤 종류의 오류든 바로잡힐 수 있다.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가 아니라 진리 앞으로 옮겨지면, 환영들은 그저 사라질 뿐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그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보다 진리에 더 잘 저항할 수는 없다.

혼돈의 두 번째 법칙은, 죄를 떠받드는 모든 이에게 참으로 소중한 법칙으로, 각자가 반드시 죄를 지어야 하며 따라서 공격과 죽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원리와 밀접하게 연관된 이 원리는, 오류가 바로잡음이 아니라 처벌을 요구한다는 주장이다. 오류를 저지른 이의 파멸은 그를 바로잡음의 범위와 용서의 범위 너머에 두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은 그렇게 자신에게 내려진 되돌릴 수 없는 선고로 해석되며, 하나님 자신도 그 죄를 극복할 힘이 없는 것으로 해석된다. 죄는 사면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실수를 저지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파멸이 불가피해진다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무슨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생각해 보라. 이제 그 둘은 결코 다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언제나 단죄받아야 하며, 그것도 다른 하나에 의해 단죄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다르며, 적이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는 대립의 관계다. 이는 아들의 분리된 여러 측면들이 하나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갈등하려고 만나는 것과 같다.

하나는 약해지고, 다른 하나는 그 하나의 패배로 강해진다. 그리고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두려움은 이제 분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창조주 모두에게 저지른 일에 의해 실재하게 된 것이다.

혼돈의 법칙들이 서 있는 그 오만함은 여기서 드러나는 것보다 더 뚜렷할 수 없다. 여기에 하나의 원리가 있다. 이 원리는 실재의 창조주가 반드시 어떠해야 하는지, 그가 반드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신념을 믿으며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려 든다. 그의 신념을 위해 확립된 것의 참됨에 대해 그에게 물어보는 것조차 필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에게 이것을 말해 줄 수 있으며, 그에게는 다만 아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잘못 생각하거나 하는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곧장 세 번째의 터무니없는 신념으로 이어지며, 이 신념은 혼돈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잘못 생각할 수 없다면, 그는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들의 신념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 때문에 아들을 미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원리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강화하는지 보라.

이제 비참함 속에서 도움을 얻고자 그에게 돌아서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이제 그는 그 비참함을 일으킨 "적"이 되었고, 그에게 호소하는 것은 소용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은 아들 안에 있을 수도 없다. 아들의 모든 측면이 그와 전쟁 중인 것처럼 보이며, 그 공격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갈등은 하나님의 도움 너머에서 불가피한 것이 된다. 이제 구원은 불가능한 채로 남을 수밖에 없다. 구원자가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풀려남도 없고 벗어남도 없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속죄는 하나의 신화가 되며, 용서가 아니라 복수가 하나님의 뜻이 된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되는 그 자리에서는, 성공할 수 있는 도움이 보이지 않는다. 파멸만이 그 결과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아들을 이기려고 그 파멸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인다.

에고가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부터 그대가 벗어날 길을 찾도록 해 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일은 이 과정의 기능이며, 이 과정은 에고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에고는 오직 자신이 빼앗은 것만을 소중히 여긴다.

이것은 혼돈의 네 번째 법칙으로 이어진다. 다른 법칙들이 받아들여진다면 이 법칙도 참일 수밖에 없다. 이 겉보기의 법칙은 그대가 빼앗은 것을 그대가 지니고 있다는 신념이다.

이로써 다른 이의 손실이 그대의 이득이 되며, 그렇게 이 신념은 그대가 오직 그대 자신에게서만 빼앗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법칙은 이것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적들은 서로에게 기꺼이 내주지 않으며,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나누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의 적들이 그대에게서 지키려는 것은 지닐 만한 가치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그대의 눈에 보이지 않게 숨기기 때문이다.

여기에 광기의 모든 기제가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는 그대의 것이어야 할 그 소중한 유산을 숨겨 강해진 "적"이다. 둘째는 억류된 것에 대한 그대의 정당화된 입장과 공격이다. 셋째는 그대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 적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불가피한 손실이다.

그렇게 죄지은 이들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한다. "적의 파렴치한 행동이 자신들을 이 추악한 공격으로 몰아넣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은 오직 친절로만 응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만적인 세상에서 친절한 이는 살아남을 수 없으므로, 죄지은 이들은 빼앗거나 아니면 빼앗겨야만 한다.

그리고 이제 아직 "설명되지" 않은, 막연히 답해지지 않은 물음이 하나 있다. "가장 배신적이고 교활한 이 적에게서 의로운 분노로 빼앗아 낼, 이 소중한 것, 이 값을 매길 수 없는 진주, 이 숨겨진 비밀의 보물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가 원하지만 결코 찾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그대는 자신이 그것을 찾지 못한 이유를 "이해한다." 이 적이 그것을 그대에게서 빼앗아, 그대가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할 곳에 숨겼기 때문이다.

그 적은 그것을 자신의 육체 안에 숨겨, 그 육체를 자신의 죄책감을 가리는 덮개로, 그대에게 속한 것을 숨기는 장소로 만들었다. 이제 그대가 자신에게 속한 것을 가질 수 있도록, 그의 육체는 파괴되고 희생되어야 한다. 그대가 살 수 있도록, 그의 배신은 그의 죽음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대는 오직 자기방어로만 공격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필요로 하는, 그대가 원하는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한, 그대의 살인적인 공격이 정당하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여기서 혼돈의 마지막 원리가 "구원"하러 온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대체물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대의 모든 고통을 치료할 마법이며, 그대의 광기를 "제정신"으로 만들어 줄 그 빠진 요소다.

이것이 그대가 반드시 공격해야 하는 이유다. 여기에 그대의 복수를 정당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보라, 베일이 벗겨진 채, 그대의 형제의 육체에서 뜯겨져 나와, 그 선물이 속한 이에 대한 악의와 증오 속에 그 안에 숨겨진 에고의 비밀 선물을.

그 형제는 그대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그 비밀의 요소를 그대에게서 빼앗으려 할 것이다. 그대의 형제에 대한 그대의 적개심에서 태어난 그 사랑의 대체물은 구원일 수밖에 없다. 그것에는 대체물이 없으며, 오직 하나만이 있다.

그리고 그대의 모든 관계는 다만 이 대체물을 붙잡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목적만을 지닌다. 그대의 소유는 결코 완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의 형제는 그대가 훔쳐 간 것 때문에 그대에 대한 공격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도 둘 모두에 대한 자신의 복수를 끝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광기 안에서 그는 이 사랑의 대체물을 반드시 지녀야 하며, 그대들 둘 다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2) 제정신의 뒤바뀜

그대는 단단한 땅 위에 발을 딛고 제정신으로 걷고 있으며,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을 지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 그대여, 이것을 생각해 보라. 이것들이 그대의 "제정신"이 기대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법칙들이다. 이것들이 그대의 발 아래 땅을 단단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원리들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그대는 의미를 찾는다.

이것들이 그대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만든 법칙들이다. 이 법칙들은 그대가 더 선호하는 천국의 대체물을 제자리에 붙들어 둔다. 이것이 그것들의 목적이다. 그것들은 이것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봐야 소용없다. 그 의미는 뚜렷하다. 광기의 수단은 미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대는 그 목표가 광기임을 자신이 깨닫고 있다는 것도 그만큼 확신하는가?

그 누구도 광기를 원하지 않으며, 광기가 무엇인지 본다면 그 누구도 자신의 광기에 매달리지 않는다. 광기를 지켜 주는 것은 광기가 참이라는 신념이다.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미친 상태의 기능이다.

광기는 믿어지려면 진리로 보여야만 한다. 그리고 광기가 진리라면, 이전에는 진리였던 그 반대편은 이제 광기일 수밖에 없다. 혼돈의 법칙들이 섬기는 목표는 이런 뒤바뀜이다. 곧 완전히 뒤집혀, 광기가 제정신이 되고, 환영이 참이 되며, 공격이 친절이 되고, 증오가 사랑이 되며, 살인이 축복이 되는 것이다.

이것들이 하나님의 법칙이 뒤집힌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수단들이다. 여기서 죄의 법칙은 사랑을 포로로 붙잡고 죄를 풀어 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들은 혼돈의 목표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위대한 뒤바뀜에 의해 그것들이 질서의 법칙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혼돈은 무법함이며, 아무 법칙도 지니지 않는다. 믿어지려면, 그것의 겉보기 법칙들은 실재하는 것으로 지각되어야 한다. 그것들의 광기라는 목표는 제정신으로 보여야 한다.

그리고 잿빛 입술과 보지 못하는 눈을 지닌, 눈멀고 바라보기에 끔찍한 두려움이, 사랑의 왕좌로 들어 올려진다 — 사랑을 죽이는 정복자로서, 사랑의 대체물로서, 구원으로부터의 구원자로서. 두려움의 법칙들은 죽음을 얼마나 사랑스러워 보이게 만드는가. 사랑의 왕좌에 앉아 하나님의 아들을 두려움과 죽음을 위해 구해 낸 그 영웅에게 감사하라!

3) 환영은 형태일 뿐

그러나 이런 법칙들이 어떻게 믿어질 수 있는가? 이 믿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낯선 장치가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장치는 낯설지도 않다. 우리는 이전에도 그것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을 여러 번 보았다.

진리 안에서는 그 장치가 작동하지 않지만, 오직 그림자들만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꿈속에서는 그것이 가장 강력한 것처럼 보인다. 형태를 강조하고 내용을 무시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혼돈의 법칙도 믿음을 강요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법칙들 중 하나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그 누구도 그것이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것이 취하는 어떤 형태들은 의미가 있어 보이며, 그것이 전부다.

어떤 형태의 살인이 어떻게 죽음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형태의 공격이든 사랑일 수 있겠는가? 어떤 형태의 단죄가 축복인가? 자신의 구원자를 무력하게 만들고서 구원을 찾는 이가 누구인가? 그에 대한 공격의 형태가 그대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그대는 그를 해치려 하면서 구원받을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찾을 수 있는 이가 누구인가? 이 광기가 어떤 형태를 취하는지가 어떻게 중요할 수 있겠는가? 이 광기는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판단이다. 자신이 구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단죄하는 판단이기 때문이다.

광기가 그대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형태를 취할 때 속지 말라. 그대의 파멸을 뜻하는 것은 그대의 친구가 아니다. 그대는 자신이 이 무의미한 법칙들을 믿지 않으며 그것들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며, 그 법칙들을 참이라고 생각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혼돈의 법칙들이 말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것들은 믿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형제여, 그대는 정말로 그것들을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어떻게 이런 내용을 지닌 그것들의 형태를 지각할 수 있겠는가?

이런 내용의 그 어떤 형태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는 그것들이 취하는 형태 때문에 그것들을 믿으며, 그 내용은 알아보지 못한다.

그 내용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대는 해골에 장밋빛 입술을 그려 넣고, 사랑스럽게 옷을 입히고, 어루만지고 애지중지하여, 해골을 살아 있게 만들 수 있는가? 그리고 그대가 살아 있다는 환영에 그대는 만족할 수 있는가?

천국 밖에는 생명이 없다.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한 그곳에 생명이 있을 수밖에 없다. 천국에서 떨어진 그 어떤 상태에서도 생명은 환영이다.

잘해야 그것은 생명처럼 보이고, 최악의 경우 죽음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 다 생명이 아닌 것에 대한 판단이며, 부정확함과 의미 없음에 있어 똑같다.

천국에 있지 않은 생명은 불가능하며, 천국에 있지 않은 것은 그 어디에도 있지 않다. 천국 밖에는 오직 환영의 갈등만이 서 있다.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며 모든 이성 너머에 있지만, 그런데도 천국에 대한 영원한 장벽으로 지각된다.

환영은 다만 형태일 뿐이다. 그것들의 내용은 결코 참이 아니다. 혼돈의 법칙은 모든 환영을 다스린다.

그것들의 형태는 서로 갈등하며, 그로 인해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충분히 가능해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각각의 형태는 다른 형태들만큼이나 확실하게, 혼돈의 법칙이 곧 질서의 법칙이라는 신념 위에 기대어 있다. 각각의 형태는 이 법칙들을 완전히 떠받치며, 이 법칙들이 참이라는 확실한 증언을 내놓는다.

겉보기에 더 부드러워 보이는 형태의 공격도 그 증언이나 결과에 있어 조금도 덜 확실하지 않다. 환영이 두려움을 가져오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들 안에 담긴 신념 때문이지, 그것들의 형태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어떤 형태로든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혼돈이 실재라는 것을 증언한다. 죄에 대한 신념으로부터, 혼돈에 대한 믿음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뒤따르기 때문에 혼돈에 대한 믿음은 논리적인 결론처럼, 곧 질서 잡힌 생각의 타당한 단계처럼 보인다.

혼돈으로 가는 단계들은 그것들의 출발점으로부터 깔끔하게 이어진다. 그것들 각각은 진리의 뒤바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형태이며, 여전히 더 깊은 공포로, 진리에서 더 멀리로 이끈다. 한 단계가 다른 단계보다 작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느 한 단계에서 돌아오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지도 말라. 천국으로부터의 하강 전체가 각 단계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대의 생각은 시작된 그곳에서 끝날 수밖에 없다. 형제여, 지옥으로의 하강에서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말라. 한 걸음을 내디딘다면, 그대는 나머지 걸음들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뒤따를 것이다.

그 어떤 형태의 공격이든 그대의 발을 천국에서 이어지는 그 뒤틀린 계단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든 이 모든 것이 풀리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대가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택했는지 지옥으로 가는 길을 택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그대는 어떻게 느끼는가? 평화가 그대의 자각 안에 있는가? 그대는 자신이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확신하는가? 그리고 그대는 천국이라는 목표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홀로 걷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벗에게 그대와 함께해 달라고, 그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달라고 청하라.

4) 공격의 의도는 살인

공격이 취할 수 있는 어떤 형태들을 그대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참이지 않은가? 어떤 형태의 공격이든 그대를 해치고, 그대가 알아보는 다른 형태의 공격만큼이나 똑같이 해친다면, 그대가 늘 고통의 근원을 알아보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형태의 공격이든 똑같이 파괴적이다.

공격의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그 유일한 의도는 살인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살인이 살인자가 반드시 느낄 수밖에 없는 막대한 죄책감과 처벌에 대한 격렬한 두려움을 가려 줄 수 있는가?

그 살인자는 자신이 살인자임을 부인하고 공격하면서 미소로 자신의 잔혹함을 정당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고통받을 것이며, 미소가 사라진 악몽 속에서 자신의 의도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악몽 속에서 그 살인 목적은 그의 공포에 질린 자각을 마주하려고 떠올라 여전히 그를 뒤쫓는다. 살인을 생각하고서 그 생각이 동반하는 죄책감을 벗어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의도가 죽음이라면, 그 의도가 어떤 형태를 취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 어떤 형태의 죽음이든, 아무리 사랑스럽고 자비로워 보인다 해도, 그것이 축복이며 하나님을 대변하는 음성이 그대를 통해 그대의 형제에게 말하고 있다는 표지이겠는가?

포장이 그대가 내주는 선물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빈 상자는 아무리 아름답고 정중하게 내밀어져도 여전히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 그리고 받는 이도 주는 이도 오래도록 속지 않는다.

그대의 형제에게서 용서를 거두면, 그대는 그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그대가 준 것 말고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5) 구원은 타협이 아님

구원은 그 어떤 종류의 타협도 아니다. 타협한다는 것은 그대가 원하는 것 중 일부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조금을 취하고 나머지는 포기하는 것이다. 구원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이에게 완전하다.

타협이라는 관념이 조금이라도 들어오게 하면, 구원의 목적에 대한 자각은 사라진다. 알아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타협이 받아들여진 곳에서 그 자각은 부인된다. 타협은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타협은 그대가 조금 공격하고 조금 사랑하면서도 그 차이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게 그것은 같은 것의 일부가 여전히 다를 수 있으면서도 하나로서 그 같음이 온전히 남을 수 있다고 가르칠 것이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그것이 이해될 수 있는가?

이 과정이 쉬운 것은 바로 아무런 타협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타협이 가능하다고 여전히 믿는 이들에게는 어려워 보인다. 그들은 만약 타협이 가능하다면 구원이 곧 공격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신념이 그것이 이미 왔다는 고요하고 차분한 확신을 떠받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용서는 조금만 거두어질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공격하고 저것을 위해서는 사랑하면서 용서를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대는 그대의 평화에 대한 그 어떤 형태의 습격이든 알아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야만 용서를 시야에서 놓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면 말이다.

평화를 방어하지 않는다면, 평화는 그대의 인식 앞에서 영원히 뚜렷하게, 결코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빛나도록 지켜질 수 있다. 평화가 방어될 수 있으며 그것을 위한 공격이 정당하다고 믿는 이들은 평화가 자신들 안에 있다는 것을 지각할 수 없다.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살인이 자신들의 평화를 구해 주는 어떤 형태를 취한다는 신념을 지닌 채, 그런 이들이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그 잔혹한 목적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겠는가? 그 누구도 적과 하나가 되지 않으며, 목적에 있어서도 적과 하나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적과 타협하는 사람은 누구든, 적이 자신에게 내주지 않고 붙들어 둔 것 때문에 여전히 그 적을 미워한다.

휴전을 평화로 착각하지 말고, 타협을 갈등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착각하지도 말라. 갈등에서 풀려난다는 것은 갈등이 끝났다는 것을 뜻한다. 문이 열려 있고, 그대는 싸움터를 떠났다. 그대는 총성이 잠시 멈추었다고,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 붙어 다니는 두려움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두려움이 되돌아오지 않기를 겁먹은 채 바라며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싸움터에는 안전이 없다. 그대는 위에서 싸움터를 안전하게 내려다보며 그곳에 닿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그대가 그 어떤 안전도 찾을 수 없다. 여전히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도 그대를 지켜 주지 못할 것이다.

보호에 대한 그 어떤 환영도 살인에 대한 믿음에 맞서 서 있지 못한다. 여기에 소통하려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살해하고 죽으려는 부자연스러운 의도 사이에서 찢긴 채 육체가 서 있다. 그대는 살인이 취하는 형태가 안전을 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싸움터에 죄책감이 없을 수 있겠는가?

갈등 속에 머물지 말라. 공격 없는 전쟁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에 대한 두려움이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유일한 안전의 자리다.

하나님 안에는 공격이 없으며, 그 어떤 형태의 환영도 천국을 배회하지 않는다. 천국은 온전히 참되다. 그 어떤 차이도 들어오지 않으며, 온전히 같은 것은 갈등할 수 없다.

6) 형태 너머의 의도

그대는 살해하려는 자신의 소망에 맞서 싸우라고 요청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는 살인이 취하는 형태가 언제나 같은 의도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요청받는다. 그리고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의도이지, 형태가 아니다.

사랑이 아닌 것은 살인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공격일 수밖에 없다. 모든 환영은 진리에 대한 습격이며, 그 환영이 사랑이라는 관념과 동등하게 참인 것처럼 보이기에 사랑이라는 관념에 폭력을 가한다.

진리와 동등하면서도 진리와 다를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살인과 사랑은 함께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둘이 다 참이라면, 그것들은 같을 수밖에 없으며 서로 구별될 수 없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을 육체로 보는 이들에게는 살인과 사랑이 그렇게 보일 것이다. 아들의 창조주를 닮은 것은 육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것은 생명의 아들일 수 없다.

육체가 어떻게 우주를 담을 만큼 확장될 수 있겠는가? 육체가 창조하면서 자신이 창조하는 것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창조물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주면서도 결코 손실을 겪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기능을 육체와 나누지 않는다. 하나님은 창조하는 기능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었다. 창조 기능이 그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의 기능이 살인이라고 믿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미친 것이다. 같은 것은 서로 다른 기능을 지닐 수 없다. 창조는 하나님이 확장하는 수단이며, 그의 것은 그의 아들의 것이기도 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와 아들 둘 다 살인자이거나, 아니면 둘 다 살인자가 아니다. 생명은 죽음을 만들지 않고, 자신을 닮은 것을 창조한다. 그대의 관계의 사랑스러운 빛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다.

그것은 아직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에게 준 그 거룩한 기능을 떠맡을 수 없다. 그대의 형제에 대한 그대의 용서가 아직 완전하지 않기에, 그것이 아직 모든 창조에게로 확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를 여전히 끌어당기며 그대가 그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살인과 공격의 형태 하나하나는, 그대가 모두에게 확장할 힘을 지닌 치유와 기적을 제한한다.

그러나 성령은 그대의 작은 선물들을 늘려 그것들을 강력하게 만드는 법을 안다. 또한 그는 그대의 관계가 싸움터 위로 들어 올려져, 더 이상 그 안에 있지 않게 되는 방식도 안다. 이것이 그대의 역할이다 — 그 어떤 형태의 살인도 그대의 뜻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