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결백함이라는 힘
1) 약함의 오류
세상의 안녕은 그대의 배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대의 뜻이 지닌 힘을 부인하려 드는 것은 오직 오만뿐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뜻이 힘없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겸손인가? 그대는 이 신념이 무엇을 저질렀는지 보지 못한다.
그대는 자신을 상처받기 쉽고 연약하며 쉽게 무너지는 존재로, 그대보다 강한 수많은 공격자들의 처분에 맡겨진 존재로 본다. 이 오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똑바로 살펴보자. 여기에 무거운 닻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 닻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바위처럼 움직일 수 없고 단단하게 붙들어 두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오류가 남아 있는 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그렇게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공격하면서 그의 아버지를 공격하지 않을 수 있는 이가 누구이겠는가? 그의 아버지가 그렇지 않은데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약하고 연약하며 쉽게 무너질 수 있겠는가?
그대는 자신이 지각하고 정당화하는 모든 죄와 모든 단죄가 그대의 아버지에 대한 공격임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그 공격은 일어난 적이 없으며 실재할 수도 없다. 그대는 아버지와 아들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 공격이 그대의 시도임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대는 두려움 때문에 그 둘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대가 아버지의 힘을 아는 우주의 위대한 창조주를 공격하는 것보다 다른 이나 그대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 더 안전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님과 하나이며 이 하나됨을 알아본다면, 그대는 그의 힘이 그대의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어떤 종류의 공격이든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믿는 한, 그대는 그 하나됨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공격이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대들 각자가 서로 분리되어 있고, 모두가 그대들의 창조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경우뿐일 것이다.
오직 그럴 때만 전체 없이 창조의 한 부분을, 아버지 없이 아들을 공격할 수 있고, 다른 이를 공격하되 자신은 그 공격에서 빠지거나, 자신을 해치되 상대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분리 신념을 원한다. 그러나 안전하게 공격하려는 욕구 말고 그것의 가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2) 하나됨의 경험
공격은 안전하지도 위험하지도 않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주가 하나이기에 그러하다. 우주를 그것을 만든 이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보기 위해 공격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면, 그대는 우주의 실재성에 대한 공격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마치 사랑이 공격하여 두려운 것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다른 것만이 공격할 수 있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이 공격할 수 있기에 자신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성령은 공격을 다르게 설명한다. 그대가 다르지 않기에, 그대는 공격할 수 없다. 둘 중 어느 쪽 입장도 논리적인 결론이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유지될 수 있지만, 결코 둘 다는 아니다.
어느 쪽이 참일 수밖에 없는지 결정하기 위해 답해야 할 유일한 물음은 그대가 다른가 하는 것이다. 그대가 자신이라고 이해하는 그 입장에서 보면, 그대는 다른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공격할 수 있다. 여러 대안 중에서, 분리 입장이 더 자연스럽고 그대의 경험에 더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대에게 무엇이 자연스럽고 참된지를 가르쳐 줄, 진리에 더 들어맞는 다른 경험들이 그대에게 필요하다. 이런 경험을 주는 것이 그대의 거룩한 관계의 기능이다. 한쪽이 생각하는 것을 다른 쪽이 그와 함께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이 그대들의 마음이 하나라는 것 말고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는가? 이 행복한 사실을 두려움으로 바라보지 말고, 그것이 그대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생각하지도 말라. 그대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때, 그대는 자신의 관계가 창조주와 그의 아들의 하나됨을 비추는 반영임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들 사이에는 분리가 없다. 그리고 한쪽 안의 모든 생각은 다른 쪽에 기쁨을 가져다준다. 그것들이 같기 때문이다. 기쁨은 한계가 없다.
사랑의 빛나는 생각 하나하나가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여 자신과 같은 것을 더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 안 어디에도 차이는 없다. 모든 생각은 그 자체와 같기 때문이다. 그대들을 하나로 잇는 그 빛은 우주 전체에 걸쳐 빛나며, 그대들을 하나로 잇기에 그대들의 창조주와도 하나로 만든다.
그리고 그 빛 안에서 모든 창조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대의 관계는 또한 사랑의 힘이 그곳에 있어 모든 두려움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런데도 그대가 홀로 두려워할 수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겠는가? 이 선물과 함께 에고의 일부를 조금이라도 붙들어 두려 하지 말라.
그 선물은 쓰이도록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지, 가려지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분리될 수 없다고 가르쳐 주는 것은 에고를 부인한다. 그대가 다른지 같은지를 진리가 결정하게 하고, 어느 쪽이 참인지 진리가 그대에게 가르쳐 주게 하라.
3) 하찮음 너머 걷기
그대는 연약함과 나약함의 반대가 죄 없음임을 보지 못하는가? 결백함이 힘이며, 그 밖의 그 무엇도 강하지 않다. 죄 없는 이는 두려워할 수 없다.
그 어떤 형태의 죄든 나약함이기 때문이다. 공격이 연약함을 가리려고 내세우는 힘의 겉모습은 그것을 감추지 못한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감추어질 수 있겠는가?
적을 지닌 이는 아무도 강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아무도 공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적이 있다는 신념은 나약함에 대한 신념이며, 약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서 있기에, 약한 것은 하나님의 "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맞서는 뜻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자신을 향한 이 전쟁은 참으로 얼마나 이상한 것이 되는가! 그대는 자신이 죄를 위해 쓰는 모든 것이 그대를 해칠 수 있으며 그대의 적이 될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 적에 맞서 싸우고, 그 때문에 그것을 약화시키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신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공격할 것이다.
그대가 죄 없다고 지각하는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만큼이나, 그대가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리라는 것도 확실하다. 사랑이 보여 주는 길을 죄 없이 걸어가는 이는 평화 속에서 걷는다. 사랑이 그곳에서 그와 함께 걸으며 그를 두려움에서 지켜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오직 죄 없는 이들만을 볼 것이며, 그들은 공격할 수 없다.
고개를 높이 들고 영광 속에서 걸으라, 그리고 그 어떤 악도 두려워하지 말라. 결백한 이들은 자신의 결백함을 나누기에 안전하다. 그들이 보는 것 중 어느 것도 해롭지 않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자각이 모든 것을 해롭다는 환영에서 풀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로워 보였던 것은 이제 그들의 결백함 안에서, 죄와 두려움에서 풀려나 기쁘게 사랑으로 되돌아간 채로 빛나며 서 있다. 그들은 결백함을 바라보았기에 사랑의 힘을 나눈다. 그리고 모든 오류가 사라진 것은 그들이 그것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광을 찾는 이는 영광이 있는 그곳에서 영광을 찾아낸다. 결백한 이들 안이 아니라면 영광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작은 방해자들이 그대를 하찮음으로 끌어당기지 못하게 하라. 결백함 안에는 죄책감의 끌림이 있을 수 없다. 진리를 곁에 두고 그대가 걷는 세상이 얼마나 행복한 세상인지 생각해 보라!
겉보기의 죄로 인한 작은 한숨 때문에, 또는 죄책감의 끌림이 작게 일렁이는 것 때문에, 이 자유의 세상을 포기하지 말라. 이 모든 무의미한 산만함을 위해, 그대는 천국을 제쳐 두겠는가?
그대의 운명과 목적은 이 모든 무의미한 산만함 훨씬 너머, 하찮음이 존재하지 않는 그 깨끗한 자리에 있다. 그대의 목적은 그 어떤 종류의 하찮음과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것은 죄와도 맞지 않는다.
하찮음이 하나님의 아들을 유혹으로 이끌지 못하게 하자. 아들의 영광은 하찮음 너머에 있으며, 영원처럼 헤아릴 수 없고 시간을 넘어서 있다. 시간이 그대의 시야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그를 유혹 속에 두려워하며 홀로 남겨 두지 말고, 그가 하찮음을 넘어서 일어나 자신이 속한 그 빛을 지각하도록 도우라.
그대의 결백함이 그의 결백함으로 가는 길을 밝힐 것이며, 그렇게 그대의 결백함도 지켜져 그대의 자각 안에 간직된다. 그의 영광을 알면서 그의 주위에서 하찮고 약한 것을 지각할 수 있는 이가 누구이겠는가? 두려운 세상에서 떨며 걸으면서 천국의 영광이 자신 위에 빛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이가 누구이겠는가?
그대 주위의 모든 것은 그대의 일부다. 그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그 안에서 천국의 빛을 보라. 그렇게 그대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애로운 용서 안에서 세상은 반짝이고 빛날 것이며, 한때 그대가 죄스럽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이제 천국의 일부로 다시 해석될 것이다. 그대의 결백함이 내려 주는 해방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세상을 깨끗하고 해방된 행복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보다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 여기에 그대의 구원과 그대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구원과 자유를 알아보려 한다면 그것은 완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