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앎이 아닌 지각

1) 확신의 자리

우리는 지금까지 지각을 강조해 왔고, 앎에 대해서는 아직 거의 말하지 않았다. 이는 그대가 무엇이든 알기 전에 먼저 지각이 바로잡혀야 하기 때문이다.

안다는 것은 확신한다는 것이며, 확신은 힘이다.

지각은 일시적이다. 시공간에 대한 믿음의 한 속성으로서, 지각은 두려움에 좌우되거나 사랑에 좌우된다. 잘못된 지각은 두려움을 낳고 참된 지각은 사랑을 길러 내지만, 둘 다 확신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모든 지각은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각은 앎이 아니다. 참된 지각은 앎의 토대이지만, 안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긍정이며 모든 지각을 넘어선 것이다.

그대의 모든 어려움은, 그대가 그대 자신과 그대의 형제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알아본다는 것은 "다시 안다"는 뜻이며, 이는 그대가 전에 알았다는 의미다.

그대는 여러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지각은 해석을 동반하기 때문이며, 이는 지각이 온전하지도 일관되지도 않다는 뜻이다.

지각의 한 방식인 기적은 앎이 아니다. 기적은 물음에 대한 올바른 답이지만, 그대는 알 때는 묻지 않는다. 환영에 물음을 던지는 것이 환영을 되돌리는 첫걸음이다. 기적, 곧 올바른 답은 환영을 바로잡는다.

지각은 변하므로, 지각이 시간에 의존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어느 시점에 그대가 어떻게 지각하느냐가 그대가 무엇을 하느냐를 결정하며, 행동은 시간 안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앎은 시간을 초월한다. 확신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더 이상 물음을 던지지 않을 때 안다.

물음을 던지는 마음은 자신을 시간 안에서 지각하며, 그래서 미래의 답을 찾는다. 닫힌 마음은 미래와 현재가 같으리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겉보기에 안정된 상태를 세우는데, 이런 안정은 대개 미래가 현재보다 나빠지리라는 밑바탕의 두려움에 맞서려는 시도다. 이 두려움은 애초에 묻고자 하는 성향 자체를 억누른다.

참된 봄은 영적 봄의 자연스러운 지각이지만, 참된 봄은 여전히 사실이라기보다는 교정이다. 영적 봄은 상징적이며, 그러므로 앎의 수단은 아니다. 그러나 영적 봄은 올바른 지각의 수단이며, 이것이 영적 봄을 기적의 합당한 영역 안으로 데려온다. "하나님의 봄(vision)"은 계시라기보다는 기적일 것이다. 지각이 조금이라도 관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봄의 경험을 앎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래서 아무리 거룩한 봄이라도 오래가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그대에게 그대 자신을 알라고, 곧 확신하라고 말한다. 확신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며, 이는 그대가 그 사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먼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그 사람에 관해 물음을 던지는 동안, 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확신은 행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대가 앎에 근거해 행동하고 있다고 말할 때, 그대는 실은 앎을 지각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앎은 창조적인 생각을 위한 힘을 주지만, 올바른 행동을 위한 힘을 주지는 않는다. 지각과 기적과 행동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앎은 계시의 결과이며 오직 생각만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영성화된 형태의 지각조차도 육체를 동반한다. 앎은 내면의 제단에서 나오며, 확신에 차 있기에 시간을 초월한다.

진리를 지각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과 같지 않다.

올바른 지각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들 안에 세운 자신의 제단에 직접 소통할 수 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확신을 소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앎은 물음 없이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낯선 이가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들도 서로에게 낯선 이가 아니다.

앎은 지각과 시간보다 앞섰으며, 결국에는 그 둘을 대신할 것이다. 그 앎이 바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말과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다"는 말의 참된 의미다.

지각은 안정될 수 있고 또 반드시 안정되어야 하지만, 앎은 이미 안정되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는 말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확신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된다.

2) 낯선 이를 만듦

그대가 다른 사람 안의 잘못을 공격한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그대는 형제를 공격하면서 그 형제를 알 수는 없다. 공격은 언제나 낯선 이에게 가해진다. 그대는 그 형제를 잘못 지각함으로써 그를 낯선 이로 만들고 있으며, 그래서 그대는 그 형제를 알 수 없다. 그대가 그 형제를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대가 그를 낯선 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형제를 올바르게 지각하라, 그러면 그대는 그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안에는 낯선 이가 없다. 하나님이 창조한 대로 창조하려면 그대는 오직 그대가 아는 것, 그러므로 그대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을 창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완전한 확신으로 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앎으로써 창조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하게 알아본다.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때, 그들은 하나님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그대가 지닌 능력들은 그대의 참된 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그대의 모든 기능은 나뉘어 있고 물음과 의심에 열려 있다. 이는 그대가 그대의 기능을 어떻게 쓸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대는 앎을 지닐 수 없다. 그대는 또한 여전히 사랑 없이 지각할 수 있기 때문에도 앎을 지닐 수 없다.

지각은 분리가 정도와 측면과 간격을 끌어들이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에는 차원이 없으며, 모든 갈등은 차원이라는 관념에서 비롯된다. 오직 삼위일체의 차원들만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 분리가 만들어 낸 차원들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는 그 차원들이 서로에게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각의 차원인 의식(Consciousness)은 분리 이후 마음 안에 도입된 첫 번째 분열이었다. 이 분열은 마음을 창조주가 아니라 지각자로 만들었다. 의식은 에고의 영역으로 정확히 규정된다.

에고는 그대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대가 되고 싶은 대로 지각하려는 그릇된 마음의 시도다. 그러나 그대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자신만을 알 수 있다. 그것만이 그대가 확신할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물음에 열려 있다.

에고는 분리 이후 자아가 지닌 물음을 던지는 측면이며, 창조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에고는 물음을 던질 수는 있지만 의미 있는 답을 지각할 수는 없다. 의미 있는 답에는 앎이 동반되며 앎은 지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혼란스럽다. 오직 하나로 통합된 마음(One-mindedness)만이 혼란이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분리되거나 나뉜 마음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뉜 마음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나뉜 마음은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에 갈등할 수밖에 없다. 이 갈등은 마음의 여러 측면을 서로에게 낯설게 만들며, 이것이 바로 공격이 언제나 가능한 두려움에 취약한 상태의 본질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지각하는 방식을 볼 때, 그대에게는 두려워할 온갖 이유가 있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이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고 창조할 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의 잘못된 지각을 결코 참으로 만들 수 없으며, 그대의 창조는 그대 자신의 잘못을 넘어선 곳에 있다.

그래서 그대는 결국 분리를 치유하기로 선택해야 한다.

3) 온전한 선택으로

바른 마음 상태는 아는 마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른 마음 상태는 오직 올바른 지각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바른 마음일 수도 그릇된 마음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이것조차 정도의 문제인데, 이는 여기에 앎이 관여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바른 마음 상태"라는 말은 "그릇된 마음 상태"에 대한 교정으로서 올바르게 쓰이며, 정확한 지각을 이끌어 내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바른 마음 상태는 잘못된 지각을 치유하기에 기적적인데, 그대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생각하면 이는 참으로 기적이다.

지각은 언제나 마음의 어떤 오용을 동반한다. 이는 마음을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마음은 매우 활동적이다. 마음은 분리되기를 선택할 때 지각하기를 선택한다. 그 전까지 마음은 오직 알기만을 뜻한다. 그 이후 마음은 오직 모호하게만 선택할 수 있으며, 모호함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명료한 지각이다. 마음은 오직 알기를 뜻할 때에만 자신의 참된 기능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돌아가면 마음은 영의 섬김 안에 놓이며, 그곳에서 지각은 바뀐다.

마음은 자신의 차원을 만들기로 선택할 때 자신을 나누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자신을 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었다. 마음이 만들거나 창조하는 온전한 힘을 얻는 곳이 바로 영이기 때문이다. 그릇된 창조 안에서조차 마음은 자신의 근원(Source)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마음은 그저 존재하기를 멈출 것이다. 이는 불가능하다. 마음은 하나님이 창조했고 그러므로 영원한 영에 속하기 때문이다.

지각하는 능력이 육체를 가능하게 했다. 그대는 무언가를 무언가로 지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각은 앎에는 필요하지 않은 교환이나 번역을 동반한다. 지각의 해석 기능은 창조의 왜곡된 형태로서, 그대가 그대 자신이 불러온 갈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육체를 그대 자신으로 해석하도록 허용한다.

아는 영은 이런 힘의 상실과 화해할 수 없었다. 영은 어둠을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을 마음에게는 거의 다다를 수 없는 존재로, 육체에게는 완전히 다다를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그 후로 영은 위협으로 지각된다. 빛이 단지 그대에게 어둠이 거기 없음을 보여 줌으로써 어둠을 없애기 때문이다. 진리는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잘못을 이겨 낼 것이다.

진리가 잘못을 이겨 내는 일은 능동적인 교정의 과정일 수 없다. 내가 이미 강조했듯이 앎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앎은 공격자로 지각될 수는 있지만, 공격할 수는 없다. 그대가 앎의 공격이라고 지각하는 것은, 앎이 결코 파괴된 적이 없기에 언제나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을 그대가 어렴풋이 알아본 것일 뿐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물은 확실함 안에 머물며, 그러므로 어떤 그릇된 창조도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진리는 그대가 원하는 잘못을 다룰 수 없다.

나는 영과 영의 앎을 기억한 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으로서 나는 앎으로 잘못에 맞서려 하지 않고, 오히려 밑바닥에서부터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다. 나는 육체의 무력함과 마음의 힘을 둘 다 보여 주었다. 나의 뜻을 나의 창조주의 뜻과 하나로 합침으로써, 나는 자연스럽게 영과 영의 참된 목적을 기억했다.

나는 그대의 뜻을 그대 대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로 합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나의 인도 아래 둔다면 나는 그대의 마음에서 모든 잘못된 지각을 지워 낼 수 있다. 오직 그대의 잘못된 지각만이 그대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 잘못된 지각이 없다면 그대의 선택은 확실하다.

온전한 지각은 온전한 선택을 이끌어 낸다. 나는 그대 대신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대가 스스로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울 수는 있다.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받은 사람은 적다"는 말은 이렇게 고쳐야 한다. "모든 사람이 부름받았으나 귀 기울이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적다." 그러므로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올바르게 선택하지 않는다. "택함받은 사람들"은 다만 더 일찍 올바르게 선택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바른 마음은 지금 이렇게 할 수 있으며, 택함받은 사람들의 영혼은 안식을 찾을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평화 안에서만 그대를 알며, 이것이 그대의 실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