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오류 너머의 거룩함

1) 죄와 실수의 차이

이성을 에고의 사고 체계 안에 들여오는 것은 에고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성과 에고는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 둘이 그대의 자각 안에 함께 있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이성의 목표는 명백하게, 따라서 뚜렷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성을 볼 수 있다. 이 말은 말장난이 아니다. 여기에 의미를 지닌 인식(vision)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식(vision)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감각(sense)이다. 인식이 육체의 시력이 아니라면, 이해되어야 한다. 인식은 명백하며, 뚜렷한 것은 모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식은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성과 에고는 갈라져 각자의 길을 간다. 에고의 존속 전체는 그대가 이 과정을 배울 수 없다는 에고 자신의 신념에 달려 있다. 이 신념을 함께 지니면, 이성은 그대의 오류를 보지 못하게 되고 오류를 바로잡을 길도 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성은 오류를 꿰뚫어 보아, 그대가 실재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재가 아니라고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성은 죄와 실수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성은 바로잡음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그대가 바로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말해 주며, 따라서 그것은 오류였음이 틀림없다고 말해 준다.

바로잡음에 대한 에고의 반대는 죄에 대한 고정된 신념과 실수에 대한 무시로 이어진다. 에고는 바로잡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보지 않는다. 그렇게 에고는 단죄하고 이성은 구원한다. 이성 자체가 구원은 아니지만 평화를 위한 길을 내며 그대에게 구원이 주어질 수 있는 마음 상태로 그대를 데려간다.

2) 형태에 붙들린 눈

죄는 하나의 장애물이다. 평화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잠겨 있어 열쇠도 없는, 무거운 문처럼 놓인 장애물이다. 이성의 도움 없이 죄를 바라보는 이는 아무도 그것을 지나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육체의 눈은 죄를 단단한 화강암으로 본다. 너무나 두꺼워서 지나가려는 시도 자체가 광기일 정도다. 그러나 이성은 죄를 쉽게 꿰뚫어 본다. 죄는 하나의 오류이기 때문이다.

죄가 취하는 형태는 이성의 눈으로부터 죄의 텅 빔을 감출 수 없다. 오직 오류의 형태만이 에고를 끌어당긴다. 의미는 에고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며, 의미가 거기 있는지 없는지도 보지 못한다. 육체의 눈이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실수이며, 지각의 오류이고, 전체가 주었을 의미를 잃은 채 전체에서 떨어져 나와 일그러진 조각이다. 그러나 실수는 어떤 형태를 지녔든 바로잡힐 수 있다.

죄는 다만 에고가 떠받드는 특별한 형태를 지닌 오류일 뿐이다. 에고는 모든 오류를 보존하여 그것들을 죄로 만들려 한다. 죄 안에 에고 자신의 안정성이, 그것이 만든 흔들리는 세상 속의 무거운 닻이 있기 때문이다.

죄는 에고의 교회가 세워진 반석이며, 그 위에서 예배자들은 육체에 묶인 채 육체의 자유가 자신의 자유라고 믿는다. 이성은 그대에게, 오류의 형태가 오류를 실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줄 것이다.

그 형태가 감추고 있는 것이 실수라면, 그 형태는 바로잡음을 막을 수 없다. 육체의 눈은 오직 형태만을 본다. 이 눈은 보도록 만들어진 것 너머를 볼 수 없다. 그리고 이 눈은 오류를 바라보되 그 너머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졌다.

이 눈의 지각은 참으로 이상한 지각이다. 이 눈은 오직 환영만을 볼 수 있고, 죄라는 화강암 덩어리 너머를 보지 못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의 겉모습에서 멈추어 서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그러진 형태의 인식에게는 모든 것의 겉면, 곧 그대와 진리 사이에 놓인 그 벽이 온전히 참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마치 단단한 벽인 양 여기고 그 앞에서 멈추어 서는 시력이 어떻게 참되게 볼 수 있겠는가?

육체의 눈은 형태에 붙들려 있다. 오직 형태만이 지각되도록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이 눈은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육체의 눈이 나타내는 그 관념은 그 관념을 만든 이를 떠난 적이 없으며, 그 눈을 통해 보는 이가 바로 그 만든 이이기 때문이다.

그 관념을 만든 이의 목표가 보지 않는 것 말고 무엇이었겠는가? 이를 위해서라면 육체의 눈은 완벽한 수단이지만, 보기 위한 수단은 아니다. 육체의 눈이 어떻게 겉모습에 머물며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는지 보라.

그것들이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멈추어 서서, 형태를 넘어 의미로 나아가지 못하는지 지켜보라. 형태에 대한 지각만큼 눈멀게 하는 것은 없다. 형태를 본다는 것은 이해가 가려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직 실수만이 저마다 다른 형태를 지니며, 그렇기에 속일 수 있다.

그대는 형태를 바꿀 수 있다. 형태는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뀔 수 있기에 실재일 수 없다. 이성은 그대에게, 형태가 실재가 아니라면 환영일 수밖에 없으며, 볼 것으로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형태를 본다면 그대는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실재일 수 없는 것을 실재인 양 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 없는 것 너머를 보지 못하는 것은 일그러진 지각일 수밖에 없으며, 환영을 진리로 지각할 수밖에 없다.

3) 하나로서 치유됨

그렇다면 일그러진 지각이 진리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 형제의 실수의 형태가, 그의 거룩함이 곧 그대의 거룩함인 그를 그대가 만나지 못하게 가로막지 않게 하라. 그의 거룩함에 대한 인식, 곧 그것을 봄으로써 그대의 용서를 보여 줄 그 인식이, 육체의 눈이 볼 수 있는 것에 가로막혀 그대에게서 감추어지지 않게 하라.

그대의 형제에 대한 자각이 그의 죄와 그의 육체에 대한 그대의 지각에 가로막히지 않게 하라. 그의 안에서 그대가 공격하려는 것이 있다면, 그대가 그의 육체와 연결시키는 것, 곧 죄를 지을 수 있다고 그대가 믿는 그것 말고 무엇이겠는가?

그 형제의 오류 너머에 그의 거룩함과 그대의 구원이 있다. 그대는 그에게 그의 거룩함을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하려고 그의 안에서 그대 자신의 죄를 보려 했다. 그런데도 그의 거룩함은 그대의 용서다. 그의 거룩함이 곧 그대의 구원인 그를 죄인으로 만듦으로써 그대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거룩한 관계는 아무리 갓 태어난 것일지라도 무엇보다 거룩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거룩하지 않은 가치는 자각 안에 혼란을 낳을 것이다. 거룩하지 않은 관계에서는, 각자가 상대의 죄를 정당화해 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진다.

각자는 상대 안에서 자신을 뜻에 반하여 죄짓도록 몰아가는 것을 본다. 그렇게 하여 각자는 자신의 죄를 상대에게 지우고, 자신의 죄를 이어 가려고 상대에게 이끌린다. 그리고 그래서 각자는 죄가 실재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욕구로 자신이 죄를 일으키고 있음을 스스로 보기란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성은 거룩한 관계를 있는 그대로 본다. 거룩한 관계는 공통의 마음 상태이며, 그 안에서 둘 다 기꺼이 오류를 바로잡음에 내주어, 둘 다 기쁘게 하나로서 치유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