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환영의 반대는 진리
1) 비참함 속의 기쁨 찾기
환영의 반대는 환멸이 아니라 진리다. 환영과 환멸은 오직 에고에게만 유일한 대안처럼 보이며,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인다. 에고에게는 진리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서는 이 둘이 같다. 둘 다 똑같은 양의 비참함을 가져오지만, 저마다 다른 쪽이 가져오는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길처럼 보인다.
모든 환영은 자신의 아무것도 아님을 무거운 옷으로 감추고 있으며, 그 옷의 어두운 주름 속에 고통과 괴로움을 담고 있다. 그러나 환영을 찾는 이들은 이 어둡고 무거운 옷에 뒤덮여, 진리의 기쁨으로부터 감추어진다. 진리는 기쁨을 내주기에 환영의 반대다. 비참함의 반대가 기쁨 말고 무엇이겠는가?
한 종류의 비참함을 떠나 다른 종류를 찾는 것은 결코 벗어남이 아니다. 환영을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것이다. 비참함 속에서 기쁨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비참함 속에서 어떻게 기쁨을 찾을 수 있겠는가?
비참함의 어두운 세상에서 가능한 일이라고는 그중 몇몇 측면을 골라내어 다르다고 보고 그 차이를 기쁨이라고 정의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차이를 지각하는 것은 반드시 아무 차이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환영은 환영을 믿는 이들에게 오직 죄책감과 괴로움, 질병과 죽음만을 가져다준다. 환영이 받아들여지는 형태는 상관없다. 이성의 눈에는 어떤 형태의 비참함도 기쁨과 혼동될 수 없다. 기쁨은 영원하다. 지속되지 않는 겉보기의 행복은 무엇이든 실은 두려움임을 그대는 확신할 수 있다.
기쁨은 슬픔으로 바뀌지 않는다. 영원한 것은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수 있다. 시간이 영원한 것에 자리를 내주기 때문이다.
오직 시간 없는 것만이 변함없이 남아야 하지만, 시간 안의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상상이 아니라 참된 것이라면, 환영은 진리에 자리를 내주어야지, 그저 똑같이 실재하지 않는 다른 꿈들에 자리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다른 꿈에 자리를 내주는 것은 차이가 아니다. 이성은 그대에게,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비참함을 알아보고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해 줄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같고 비참함도 언제나 같지만, 이 둘은 모든 면에서, 예외 없이 모든 경우에 서로 다르다. 예외가 하나라도 있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같은 것을 다른 것과 혼동하는 것이다. 하나의 환영을 소중히 여기며 진리에 맞서 지킨다면 모든 진리가 무의미해지고 모든 환영이 실재하게 된다.
2) 믿음은 타협할 수 없음
이것이 바로 믿음의 힘이다. 믿음은 타협할 수 없다. 그리고 결백함에 대한 믿음이 살아 있는 것 하나라도 배제하고 그 살아 있는 것을 용서 바깥에 붙들어 둔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믿음이다. 이성도 에고도 그대에게 이것을 말해 주겠지만, 이성과 에고가 이것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는 서로 다르다.
에고는 이제 그대에게, 누구에게서도 죄책감을 전혀 보지 않는 것은 그대에게 불가능하다고 확언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누구에게서도 죄책감을 보지 않는 것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면, 죄에 대한 믿음은 영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성은 이것을 다르게 바라본다.
이성은 어떤 관념의 근원을, 그 관념을 참이나 거짓으로 만들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관념이 자신의 근원을 닮았다면 이것은 그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성은 말한다 —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성령에게 그의 목적으로 주어졌고, 자신이 뜻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가능한 이가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을 주었다면, 그것을 이루는 수단은 가능함을 넘어선다. 그것들은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 하며, 그대는 반드시 그것들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지금은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시기다. 여기서 그대와 에고의 분리가 완전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성령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할 수단이 있다면, 그것들은 쓰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씀으로써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믿음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에고에게 이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으며, 이루어질 희망이 전혀 없는 일을 떠맡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대는 자신의 창조주가 뜻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대가 만든 환영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이제 그대는 그대 자신과 그대 자신에 대한 환영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둘 다가 아니라 하나만을.
이 하나의 결정을 피하려 애써 봐야 소용없다. 그것은 반드시 내려져야 한다. 믿음과 신념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 수 있지만, 이성은 그대에게 비참함은 오직 한쪽에만 있고 기쁨은 다른 쪽에만 있다고 말해 준다.
이제 그대의 형제를 저버리지 말라. 그대들은 같기에 홀로 결정하지도, 다르게 결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서로에게 생명을 주거나 죽음을 주거나 둘 중 하나다 — 그대들은 서로의 구원자이거나 심판자이며, 서로에게 피난처를 내주거나 단죄를 내준다.
이 과정은 전적으로 믿어지거나 전혀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과정은 온전히 참이거나 온전히 거짓이며, 부분적으로만 믿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비참함에서 완전히 벗어나거나 전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성은 그대에게, 천국의 기쁨과 지옥의 비참함 중 하나를 선택하기를 기다리며 불확실하게 멈추어 있을 수 있는 중간 지대는 없다고 말해 줄 것이다.
3) 위대한 투사
그대가 천국을 선택할 때까지, 그대는 지옥과 비참함 안에 있다. 그대가 가져다가 환영으로 엮어 넣을 수 있는 천국의 조각은 없다. 그대가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환영도 하나도 없다.
구원자는 심판자가 될 수 없으며, 자비는 단죄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인식(vision)은 저주할 수 없고 오직 축복할 수 있을 뿐이다.
구하는 것이 자신의 기능인 이는 구할 것이다. 구원자가 어떻게 구할지는 그대의 이해를 넘어서지만, 언제 구할지는 그대의 선택이어야 한다. 그대가 시간을 만들었기에 그대는 시간을 다스릴 수 있다. 그대는 자신이 만든 세상의 노예가 아닌 것처럼 시간의 노예도 아니다.
그대가 만든 것이 자신을 만든 이를 노예로 삼을 힘을 지녔다는 그 환영 전체를 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이것은 분리를 일으켰던 것과 같은 믿음이다. 이 믿음은 생각이 생각하는 이의 마음을 떠나 그 마음과 달라지고 그 마음에 맞설 수 있다는 무의미한 관념이다.
이것이 참이라면, 생각은 마음의 확장이 아니라 마음의 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시, 우리가 이전에도 여러 번 보았던 그 같은 근본적인 환영의 또 다른 형태를 본다. 그가 만든 자아와 그 자아가 만든 모든 것이 그의 주인이 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의 마음을 떠나 스스로를 다르게 만들고 아버지의 뜻에 맞설 수 있어야만 한다.
그 위대한 투사를 바라보라. 그러나 두려움이 아니라, 반드시 치유되어야 한다는 결정으로 바라보라. 그대가 만든 그 무엇도, 그대가 여전히 자신의 창조주에게서 떨어져 그의 뜻에 맞서려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대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적일 수 있다고 믿을 때에만, 그대가 만든 것이 그대의 것일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들의 기쁨에 비참함을 선고하고 아들을 다르게 만들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만든 모든 비참함은 바로 그대 자신의 것이었다. 그 비참함이 참이 아님을 알게 되어 기쁘지 않은가? 그대가 만든 환영 중 어느 것도 진리를 대신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반갑지 않은가?
오직 그대의 생각들만이 불가능했다. 구원이 불가능할 리는 없다. 그대의 구원자를 그대의 적으로 보고서 그를 알아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4) 거룩한 관계의 힘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되기를 뜻한다면, 구원자가 참으로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은 가능하다. 하나님이 그대의 거룩한 관계에 내준 것은 바로 거기에 있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내주라고 성령에게 내준 것을 하나님이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주어진 그 구원자를 그대는 바라보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대가 구원자에게 씌운 사형 집행인이라는 역할을, 감사히, 그가 진리 안에서 지닌 그 역할과 맞바꾸지 않겠는가? 그대가 스스로에게 내주려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대를 위해 그에게 내준 것을 그에게서 받으라.
그대들 사이에 가로놓은 육체 너머에 그대의 거룩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하는 이 관계는, 영원히 뻗어 나가는 그 밝고 끝없는 원에서 자신에게 이르는 황금빛 안에서 빛난다. 그것은 시간 안에 있으면서도 시간을 넘어서, 땅 위에 있으면서도 불멸인 채 얼마나 고요히 쉬고 있는가. 그 안에 담긴 힘이 얼마나 큰가.
시간은 이 관계의 뜻을 기다리며, 땅은 이 관계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여기에는 따로 떨어진 뜻도, 무언가가 분리되기를 바라는 원함도 없다. 이 관계의 뜻에는 예외가 없으며, 뜻하는 것은 참이다. 이 관계의 용서는 자신에게 가져온 모든 환영을 부드럽게 못 본 체 지나치고, 그 환영은 사라진다. 그 중심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태어나, 세상을 못 본 체 지나치는 인식(vision)으로 자신의 집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 거룩한 집이 그대의 것이기도 하기를 바라지 않는가? 이곳에는 비참함이 없고 오직 기쁨만이 있다. 그대가 이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요히 머물기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는 오직 그의 인식(vision)을 나누는 것뿐이다.
형제를 죄 없는 이로 보려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에게든 그리스도의 인식(vision)은 빠르고 기쁘게 주어진다. 그리고 그대가 죄의 모든 결과에서 완전히 풀려나려 한다면, 누구도 형제를 죄 없는 이로 보려는 이 기꺼움 너머에 남을 수 없다.
그대는 자신을 위해 부분적인 용서를 원하는가? 단 하나의 죄가 여전히 그대를 비참함 속에 남아 있도록 유혹하는데 그대가 천국에 이를 수 있겠는가? 천국은 완전한 순수함의 집이며, 하나님이 그대를 위해 창조했다. 그대 자신처럼 죄 없는 그대의 거룩한 형제를 바라보고, 그가 그대를 그곳으로 이끌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