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시 태어난 아기의 언어
1) 그대 것 아닌 눈
이성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라. 그대가 하나님이 치유하려는 이를 공격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를 미워한다면, 그대와 그대의 창조주는 서로 다른 뜻을 지닌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대가 그때 믿어야 할 것은 그대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대는 실로 이것을 믿을 수 있으며, 실제로 믿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이것을 믿으며 그대의 뜻을 뒷받침하는 많은 증거를 본다.
그런데 그대의 그 낯선 불안함, 단절되어 있다는 그 느낌, 자신 안에 의미가 없다는 그 끈질긴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마치 그대가 아무 계획도 없이, 그저 헤매어 다니는 것 말고는 아무 목적도 없이 들어온 것과도 같다. 오직 그 목적 없음만이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에도 이것과 매우 비슷한 묘사를 들었지만, 그 묘사는 그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대는 여전히, 그 묘사가 정확히 들어맞는 이 낯선 관념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은 그대에게, 그대의 것이 아닌 눈을 통해 그대가 보는 세상은 그대에게 아무 의미도 없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 줄 것이다. 이렇게 보는 일이 누구에게 자신의 소식을 되돌려 보내겠는가? 분명 그대에게는 아니다. 그대의 시력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 눈들과는 완전히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대의 인식(vision)이 아니라면, 그대에게 무엇을 보여 줄 수 있겠는가? 뇌는 그대의 인식(vision)이 보는 것을 해석할 수 없다. 그대는 이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뇌는 자신이 일부로 속해 있는 육체에게 해석해 준다.
그러나 뇌가 말하는 것을 그대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대는 뇌에 귀 기울여 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애써 그 소식을 이해하려 했다. 그대는 자신에게 전혀 닿지 못하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대는 자신이 이해하는 소식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결코 소통할 수 없는 뇌에 귀 기울여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라. 그대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부인하고 자신이 다른 무언가라는 믿음을 굳게 지닌다. 그러면 그대가 자기 자신이라고 만들어 낸 이 "다른 무언가"가 그대의 시력이 된다. 그러나 보는 것은 반드시 그 "다른 무언가"여야 하며, 그 "다른 무언가"는 그대가 아니기에 자신의 시력을 그대에게 설명해 준다.
물론 그대의 인식(vision)이라면 이런 일은 전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눈이 감겨 있어 그 "다른 무언가"를 불러내어 그대를 이끌게 하고, 그 "다른 무언가"가 보는 세상을 설명해 달라고 청했다면, 그대는 귀 기울이지 않을 이유도, 그 말이 참이 아니라고 의심할 이유도 없다. 이성은 그대에게, 그대가 그 "다른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 "다른 무언가"가 참일 수 없다고 말해 줄 것이다.
2) 은밀함의 감정
하나님에게는 비밀이 없다. 그는 여정의 끝에 가서야 자신이 왜 그대에게 이런 일을 했는지 말해 주려고 그대를 고통의 세상으로 이끌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에서 무엇이 비밀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대는 자신에게 비밀이 있다고 믿는다. 그대의 비밀이 하나님의 뜻과 떨어진, 그대 자신의 또 다른 "뜻" 말고 무엇일 수 있겠는가?
이성은 그대에게, 그대의 또 다른 "뜻"이 죄로 감추어 둘 필요가 있는 비밀이 아니라고 말해 줄 것이다. 그러나 실로 오류다! 죄에 대한 그대의 두려움이 그 오류를 바로잡음으로부터 지키게 하지 말라.
죄책감의 매력은 오직 두려움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대가 만든 그 유일한 감정이 있다 — 그 감정이 무엇으로 보이든 말이다. 그 감정은 은밀함의 감정이며, 사적인 생각과 육체의 감정이다.
그 감정은 사랑에 맞서는 그 유일한 감정이며, 언제나 차이를 보는 것과 같음을 잃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그대를 눈멀게 하는 그 유일한 감정이 있다. 그 감정은 그대가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는 자아에 그대를 의존하게 만든다. 그대는 그 자아가 그대를 위해 만든 세상을 통해 자신을 이끌도록 그 자아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대의 시력은 그대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과 함께 그대에게 주어졌다. 그대는 이 인식(vision)이 그대에게 말해 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지각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오직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의 시력이 그대에게 보여 주려는 것을 그대는 이해할 것이다. 그대의 시력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대의 인식(vision)만이 그대가 볼 수 있는 것을 그대에게 전달할 수 있다. 그 인식은 해석될 필요 없이 곧바로 그대에게 이른다. 해석이 필요한 것은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대가 이해할 수 없는 해석자가 낯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그대가 받고도 이해하지 못한 그 모든 소식 중에서, 오직 이 과정만이 그대의 이해에 열려 있으며 이해될 수 있다. 이 과정이 그대의 언어다. 그대가 아직 이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그대의 소통 전체가 아기의 소통과도 같기 때문이다.
3) 직접적인 지각
아기가 내는 소리와 그가 듣는 소리는 매우 불안정하며, 때에 따라 그에게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가 듣는 소리도 보는 광경도 아직 안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아기가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그의 모국어가 될 것이며, 그 모국어를 통해 그는 주위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고 그들도 그와 소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주위에서 보는 그 낯설고 계속 바뀌는 것들이 그에게는 위안을 주는 이들이 될 것이며, 그는 자신의 집을 알아보고 그들이 자신과 함께 그곳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저마다의 거룩한 관계 안에서 분리 대신 소통하는 능력이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거룩하지 않은 관계에서 이제 막 다시 태어난 거룩한 관계는, 자신이 대체한 그 오래된 환영보다도 더 오래되었으면서도 이제 막 다시 태어난 아기와도 같다. 그런데도 이 아기 안에는 그대에게 되돌아온 그대의 인식(vision)이 있으며, 그는 그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할 것이다.
그 아기는 그대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그 "다른 무언가"에게서 양육받지 않는다. 그는 그곳에서 주어지지도, 그대 자신 말고는 그 무엇에게서도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두 형제도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인식(vision)은 그들을 하나로 본다. 나의 거룩한 형제여, 그대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 생각해 보라. 이 아이는 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분명하게 해 줄 것이다.
그 아기의 말은 낯선 언어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에게 통역자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는 것을 그에게 가르친 것이 바로 그대였기 때문이며, 그대가 그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아기는 그대 말고는 누구에게도 올 수 없었으며, 결코 "다른 무언가"에게는 올 수 없었다. 그리스도가 들어간 곳에는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결코 따로 떨어진 이들 안에서는 거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아기는 반드시 자신의 오래된 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는 새로워 보이지만 자신만큼이나 오래된 작은 새내기로서, 그대 관계의 거룩함에 의존해 살아간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자격 없는 이에게 맡기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라. 그 아들의 일부인 것 말고는 그와 하나로 이어지기에 합당한 것이 없다. 그의 일부가 아닌 그 무엇도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가 된 이들에게는 소통이 되돌려져 있어야만 한다. 육체를 통해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하나로 이었는가? 이성은 그대에게, 그들이 육체가 아닌 인식(vision)을 통해 서로를 보았고 육체가 말하지 못하는 언어로 소통했음이 틀림없다고 말해 줄 것이다.
그들을 부드럽게 하나로 이끈 것이 두려운 광경이나 소리였을 리도 없다. 오히려 각자는 상대 안에서 자신의 참나(Self)가 안전하고 평화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완벽한 안식처를 보았다. 각자의 이성은 이렇게 말해 주었으며, 이것이 진리였기에 각자는 이를 믿었다.
여기에 그대가 만들 수 있는 첫 번째 직접적인 지각이 있다. 그대는 지각보다 오래된, 그러면서도 단 한순간에 다시 태어난 자각을 통해 이 지각을 만든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에게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순간이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 생각해 보라 — 그대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그 "다른 무언가"가 환영이라는 알아봄 말이다. 그리고 진리가 즉시 찾아와 그대의 참나(Self)가 있어야 할 곳을 보여 주었다.
진리를 불러내는 것은 바로 환영을 부인하는 것이다. 환영을 부인하는 것은 두려움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힘을 쓰지 못하는 그 거룩한 집으로 사랑이 감사하며 들어온다. 사랑이 들어오도록 하나가 된 그대와 자신이 하나임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닮은 것에게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에게로 온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리기 때문이다. 거룩한 관계만큼 그를 닮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대들을 하나로 이끄는 것이 그를 그대에게로 이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다정함과 부드러운 결백함이 공격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리스도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그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서로를 그리스도가 선택한 거처로 바라보는 것은 실로 옳다. 여기서 그대들은 그와,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뜻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대를 위한 그대 아버지의 뜻이며, 그의 뜻과 함께하는 그대의 뜻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이끌리는 이는 하나님에게도 이끌리며, 이는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저마다의 거룩한 관계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확실하다. 저마다의 거룩한 관계는 땅이 천국으로 바뀌면서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위해 마련된 거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