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마지막 물음

1) 네 물음

그러나 죄를 믿는 이는 오직 다음 물음들만을 스스로에게 물으면 된다. 이 물음들을 그가 결정해야만, 그를 위해 나머지가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나를 지배하는 세상 대신 내가 다스리는 세상을 원하는가? 나는 무력한 대신 내가 힘 있는 세상을 원하는가?

나는 적이 없고 죄를 지을 수 없는 세상을 원하는가? 그리고 나는 진리이기에 내가 부인했던 것을 보기를 원하는가? 그대는 이미 앞의 세 물음에는 답했을 수도 있지만, 아직 마지막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물음은 여전히 두렵게 느껴지고 다른 물음들과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은 그대에게 그것들이 모두 같다고 확언할 것이다. 우리는 올해가 같은 것들의 같음을 강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마지막 물음은 실로 그대가 결정해야 할 마지막 물음인데도, 나머지 물음들에서는 그대에게 이미 사라진 위협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상상된 차이는, 진리가 그대가 아직 찾아낼 수도 있는 그 적일지 모른다는 그대의 믿음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여기가 죄를 찾고 힘을 받아들이지 않을 마지막 남은 희망처럼 보이는 곳이다. 죄냐 진리냐, 무력함이냐 힘이냐 하는 선택은 곧 공격이냐 치유냐를 선택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 치유는 힘에서 오고, 공격은 무력함에서 온다. 그대가 공격하는 이를 그대는 치유하고 싶어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대가 치유되기를 바라는 이는 그대가 공격에서 보호받기로 선택한 바로 그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결정이 상대를 육체의 눈으로 바라볼지, 아니면 상대가 인식(vision)을 통해 그대에게 드러나게 할지를 선택하는 것 말고 무엇이겠는가? 이 결정이 어떻게 그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그대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대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선택이어야 한다. 이것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에 관한 과정이다.

2) 결정에 진심을 더함

그대가 여전히 답하지 않은 채 남겨 둔 그 마지막 물음에 대한 그대의 답을 신중히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대의 이성이 그대에게, 그 마지막 물음에 답이 있어야만 하며 다른 세 물음 안에서 이미 답해졌다고 말하게 하라.

그러면 그대가 어떤 형태로든 죄의 결과를 바라볼 때,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뿐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 이것이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인가? 나는 이것을 원하는가? 이것이 그대의 유일한 결정이며, 일어나는 일에 대한 조건이다.

이 결정은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와는 상관이 없지만, 왜 일어나는지와는 상관이 있다. 그대에게는 이것을 다스릴 힘이 있다. 그리고 그대가 적이 없고 무력하지 않은 세상을 보기로 선택한다면, 그런 세상을 보는 수단이 그대에게 주어질 것이다.

어째서 이 마지막 물음이 그토록 중요한가? 이성이 그대에게 그 이유를 말해 줄 것이다. 마지막 물음은 다른 세 물음과 같지만, 다만 시간에서만 다르다. 다른 물음들은 내려졌다가 다시 취소되고 다시 내려질 수 있는 결정들이다. 그러나 진리는 변함없으며, 흔들림이 불가능한 상태를 암시한다.

그대는 그대가 다스리되 그대를 다스리지는 않는 세상을 원하다가 마음을 바꿀 수 있다. 그대는 자신의 무력함을 힘과 맞바꾸기를 원하다가, 죄의 작은 반짝임이 그대를 유혹하면서 그 원함을 잃을 수 있다. 그리고 그대는 죄 없는 세상을 보기를 원하다가, "적"이 그대를 유혹해 육체의 눈을 쓰게 하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바꾸게 할 수 있다.

내용상 모든 물음은 같다. 각각의 물음은 그대가 죄의 세상을 성령이 보는 것과 맞바꿀 의향이 있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죄의 세상이 부인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바라보는 이들은 실재 세계를 부인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물음은 실재 세계를 보려는 그대의 원함에 변함없음을 바라는 소망을 더해, 그 원함이 그대가 지닌 유일한 원함이 되게 한다. 마지막 물음에 "그렇다"라고 답함으로써, 그대는 이미 내린 나머지 모든 결정에 진심을 더한다. 오직 그때에만 그대는 다시 마음을 바꿀 선택지를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것이 바로 다시 마음을 바꾸는 일일 때, 나머지 물음들은 온전히 답해진다. 나머지 물음들이 답해졌다고 그대가 어째서 확신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답해졌다면, 그것들이 그토록 자주 물어질 필요가 있었겠는가?

마지막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그 답은 "그렇다"이면서 동시에 "아니다"이다. 그대는 "그렇다"가 반드시 "아니다가 아니다"를 뜻한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그렇다"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3) 행복의 변함없음

누구도 자신의 행복에 반해 결정하지 않지만,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행복을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 지금은 이것 지금은 저것, 그리고 이제는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은 붙잡을 수 없는 그림자로 본다면, 그는 실로 그것에 반해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붙잡을 수 없는 행복, 혹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바뀌는 형태의 행복은 아무 의미도 없는 환영이다.

행복은 변함없어야 한다. 변덕스러운 것에 대한 원함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지기 때문이다. 기쁨은 변함없는 인식(vision)을 통하지 않고서는 지각될 수 없다. 그리고 변함없는 인식(vision)은 오직 변함없음을 원하는 이들에게만 주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원함의 힘은, 자신을 무력하다고 보는 이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로 남는다. 그대가 원하는 것을 원하라. 그러면 그대는 그것을 바라보며 실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풀어 주거나 죽일 힘을 지니지 않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어떤 생각도 생각하는 이의 마음을 떠나거나 그에게 아무 영향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날 수 없다.

그렇다면 생각은 위험한가? 육체에게는, 그렇다! 죽이는 것처럼 보이는 생각은 생각하는 이에게 자신이 죽임당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 생각하는 이는 자신이 배운 것 때문에 "죽는다." 그 생각하는 이는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변함없는 것보다 변덕스러운 것을 더 소중히 여겼다는 최종 증거다.

그 생각하는 이는 분명 자신이 행복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행복이 진리이기에 원한 것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변함없어야 하는 것으로서 원한 것도 아니었다. 기쁨의 변함없음은 그대의 이해와는 전혀 낯선 조건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 변함없음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 변함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원하게 될 것이다. 행복의 변함없음에는 예외가 없다 — 어떤 종류의 변화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지닌 사랑만큼이나 흔들림이 없다. 자신의 창조주가 아는 것 안에서 확신하듯 자신의 인식(vision) 안에서 확신하는 행복은 모든 것을 바라보며 그 모두가 같음을 본다.

행복은 덧없는 것을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자기 자신과 같기를 바라며, 그렇게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행복의 변함없음을 어지럽힐 힘이 없다. 행복 자신의 원함은 흔들릴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은 나머지 세 물음에 마지막 물음이 필요함을 보는 이들에게 확실하게 찾아오는데, 이는 판단하지 않고 치유하기로 선택하는 이들에게 평화가 반드시 찾아오는 것과 같다.

이성은 그대에게, 행복을 변덕스럽게 청할 수는 없다고 말해 줄 것이다. 그대가 원하는 것을 그대가 받고 행복이 변함없는 것이라면, 그대는 행복을 한 번만 청하면 언제나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을 언제나 지니고 있지 않다면, 행복이 행복인 이상, 그대는 그것을 청하지 않은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줄 힘이 있다고 믿는 무언가에게 그것을 청하기 때문이다. 그 청하는 이는 무엇을, 어디서, 누구에게 청하는지에 있어 틀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청할 것이다.

원함은 하나의 요청이며, 청함이고, 하나님 자신이 결코 답하기를 거부하지 않는 그 누군가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청하는 이가 참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미 내주었다. 그러나 그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도 내줄 수 없다. 그가 확신하지 못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내줌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행복인 그대, 하나님의 뜻만큼 강력한 뜻, 그대의 환영 속에서도 잃어지지 않는 그 힘을 지닌 그대여, 그대가 왜 아직 그 마지막 물음에 어떻게 답할지 결정하지 못했는지 신중히 생각해 보라. 나머지 물음들에 대한 그대의 답은 그대가 이미 부분적으로 온전한 정신이 되도록 도왔다. 그러나 정말로 그대가 완전히 온전한 정신이 되기를 바라는지 묻는 것은 바로 그 마지막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