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오래된 노래의 기억
1) 황금빛 원
들으라. 그리고 우리가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을 그대가 기억하는지 생각해 보려 하라. 들으라 — 그대는 아마도 완전히 잊히지는 않은 어떤 오래된 상태의 실마리를 붙잡을 것이다. 희미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이름을 잊은 지 오래된 노래와도 같고, 그대가 그 노래를 들었던 상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런 것 말이다.
그 노래 전체는 그대와 함께 남아 있었지만, 그저 한 가닥 선율의 실마리일 뿐, 어떤 사람이나 장소나 특정한 무엇에도 매여 있지 않다. 그러나 그대는 이 작은 조각만으로도, 그 노래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 노래를 들었던 그 자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듣던 이들을 그대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기억한다.
음표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 음표들을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가 그 소중함을 기억한다면 울게 될 그 무언가를 부드럽게 일깨워 주는 것으로 간직해 왔다.
그대는 기억할 수 있지만 두려워한다. 그 뒤로 배운 세상을 잃게 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배운 세상 안의 그 무엇도 그 노래의 절반만큼도 소중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들으라.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알았고 그 뒤로 스스로 소중히 여기도록 배운 그 어떤 선율보다도 더 소중히 여겼던 그 오래된 노래를 그대가 기억하는지 보라.
육체 너머, 해와 별들 너머, 그대가 보는 모든 것 너머에, 그러면서도 어쩐지 낯익은 그곳에, 그대가 바라보면 크고 빛나는 원 안으로 뻗어 나가는 황금빛의 호가 있다.
그리고 그 원 전체가 그대의 눈앞에서 빛으로 가득 찬다. 원의 가장자리는 사라지고, 그 안에 있는 것은 더는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다.
그 빛은 확장되어 모든 것을 뒤덮으며, 끊김도 한계도 없이 영원히 빛나면서 무한히 뻗어 나간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완전한 연속성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다.
또한 그 바깥에 무언가가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빛이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대가 잘 아는 하나님의 아들의 인식(vision)이다. 이것이 자신의 아버지를 아는 이의 봄이다. 이것이 그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억이다. 그대는 이 전체의 한 부분이며, 그 모든 것을 안에 지니고, 모든 것이 그대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모든 것과 하나로 이어져 있다.
이 기억을 그대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인식(vision)을 받아들이고, 육체를 받아들이지 말라. 그대는 그 오래된 노래를 알고 있으며,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여전히 자신의 아버지에게 부르는 이 오래된 사랑의 찬가만큼 그대에게 소중한 것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보지 못하던 이들이 볼 수 있다. 그들이 자신의 창조주를 기려 부르는 바로 그 노래가 그들 자신도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든 그 보지 못함은 이 노래의 기억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인식(vision)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노래로 기리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할 것이다.
기적이란 바로 이 기억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이 기억이 깃들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한 사람 안의 빛은 모두 안에서 이 기억을 깨운다. 그리고 그대가 형제 안에서 그것을 볼 때, 그대는 모두를 위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2) 작은 기꺼움
이 과정을 배우는 데 그대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 우리는 거듭 말해 왔다. 그 작은 기꺼움은 그대의 관계 전체가 기쁨으로 바뀌는 데 필요한 것과 같은 작은 기꺼움이며, 성령에게 내주면 그가 그 대가로 모든 것을 그대에게 내주는 그 작은 선물이며, 구원이 딛고 서는 바로 그 지극히 작은 것이며, 십자가 처형을 부활로 바꾸는 그 작디작은 마음의 변화다.
그리고 그 작은 기꺼움은 참이기에, 반드시 완전히 이해될 만큼 단순하다. 거부될 수는 있어도 모호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대가 지금 그것에 반해 선택한다면, 그것이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이 작은 대가가 그대의 판단으로는 평화를 위해 치르기에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인식(vision)과 행복,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죄로부터의 완전한 벗어남 — 이 모든 것이 그대에게 주어지기 위해 그대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다. 다만 이렇게 말하라. 그러나 어떤 유보도 없이 진심으로 말하라.
구원의 힘이 바로 이 말에 있기 때문이다 — 나는 내가 보는 것에 책임이 있다. 나는 내가 경험하는 감정을 선택하며, 내가 이루려는 목표를 결정한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나는 스스로 청했으며, 내가 청한 대로 받는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 앞에서 그대가 무력하다고 더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다만 그대가 잘못 생각했음을 인정하라. 그러면 그대의 잘못이 낳은 모든 결과가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저 자신 바깥의 사건들에 떠밀릴 뿐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아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가 우연이나 사고로 자신을 발견한 것처럼 보이는 모든 상황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의 결정하는 힘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의 우주 안에서는 어떤 우연도 어떤 사고도 있을 수 없으며, 그 우주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고통받으라. 그러면 그대는 죄를 자신의 목표로 정한 것이다. 행복하라. 그러면 그대는 그대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해야 하는 이에게 결정하는 힘을 내준 것이다.
이것이 그대가 성령에게 내주는 그 작은 선물이며, 이것조차도 그는 그대 자신에게 내주라고 그대에게 내준 것이다. 이 선물을 통해 그대의 구원자를 풀어 줄 힘이 그대에게 주어지고, 그는 구원을 그대에게 내줄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이 작은 봉헌을 아까워하지 말라. 그것을 거두면, 그대는 지금 보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계속 지니게 된다. 그것을 내주면,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이 이 봉헌과 함께 떠나간다. 이토록 적은 것으로 이토록 많은 것이 주어진 적은 없었다.
거룩한 순간 안에서 이 교환이 이루어지고 유지된다. 여기에서 그대가 원하지 않는 세상이 그대가 원하는 그 하나로 바뀐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대가 원하는 그 하나는 그대가 원하기에 그대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그대의 원함이 지닌 그 힘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대는 그 힘의 강함을 받아들여야지 그 약함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대는 세상을 만들 만큼 강한 것이라면 그 세상을 놓아 버릴 수도 있으며,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기꺼이 보려 한다면 바로잡음도 받아들일 수 있음을 지각해야 한다.
그대가 보는 세상은 그저 그대가 옳았다는 것을 증언하는 무기력한 증인일 뿐이다. 이 증인은 미쳐 있다. 그대는 이 증인에게 증언하는 법을 가르쳤고, 이 증인이 그대에게 증언을 되돌려 주자 그대는 그 증언을 듣고 이 증인이 본 것이 참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대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한 것이다.
이것(스스로 증인을 가르쳤다는 사실)만 보라. 그러면 그대의 "봄"이 딛고 선 그 추론이 얼마나 순환적인지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대가 그대 자신과 형제에게 준 그대의 선물이었다. 그러니 그 선물이 형제에게서 거두어져 진리로 대체되기를 기꺼워하라.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그대가 바라볼 때, 그것을 그대 자신 안에서도 보도록 그대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대는 아마 이 작은 봉헌을 내주어야 할 필요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필요가 무엇인지 더 가까이 들여다보라.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 그 봉헌 안에서 분리와 구원을 통째로 맞바꾸는 것을 보라.
3) 미친 관념의 해소
에고의 전부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그 아들의 뜻 없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관념이다. 그러므로 그 아들의 뜻과 갈라질 수 없는 창조주의 뜻도 없이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관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뜻을 대신하는 것, 즉 영원히 그러해야 할 것에 맞선 미친 반역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무력하게 만들 힘을 지녔으며, 그렇게 해서 그 힘을 자신을 위해 빼앗아 하나님이 그를 위해 뜻한 것 없이 자신을 남겨 둘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미친 관념이 바로 그대가 자신의 제단 위에 모셔 두고 숭배하는 그 관념이다. 그리고 이 관념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그대의 믿음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관념에 그대의 믿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 미친 관념에 대한 그대의 믿음과 신뢰는 실로 강하다. 성령은 그대에게 거룩함에 대한 믿음과, 거룩함을 볼 인식(vision)을 아주 쉽게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성령의 선물들이 있어야 할 제단을 비워 놓지 않았다. 그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대는 다른 무언가에게 바치는 우상을 세워 두었다. 무엇이 일어나야 하는지 그대에게 말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이 다른 "뜻"에 그대는 실재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뜻과 다르게 보여 주는 것은 그러므로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대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진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뿐이다. 그대의 이해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만들거나 행하라고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그대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진리가 들어오게 하는 것뿐이다. 그저 스스로 일어날 일을 그대가 방해하는 것을 멈추는 것뿐이며, 그저 그대가 내주었다고 생각한 그 현존을 다시 알아보는 것뿐이다.
한순간만이라도, 그대의 제단 위에 놓아둔 것들을 치워 그 제단을 비워 두려 하라. 그러면 그 제단에 참으로 있는 것을 그대는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거룩한 순간은 창조의 순간이 아니라 알아봄의 순간이다. 알아봄은 인식(vision)과 유보된 판단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만 안을 들여다보고, 추론과 판단과는 전혀 무관하게 뚜렷이 보이는 그대로 그곳에 있어야 할 것을 볼 수 있다.
되돌림은 그대의 과제가 아니지만, 반기느냐 아니냐는 그대에게 달려 있다. 믿음과 원함은 함께 간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소망적 사고가 에고가 원하는 것을 다루어 그것을 실현시키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원함의 힘이, 그러므로 믿음의 힘이 자신의 목표를 실재하고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 주는 예는 없다.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은 광기의 목표에 들어맞도록 실재를 조정하는 데로 이어진다. 죄라는 목표는 자신의 목적을 정당화하려고 두려운 세상에 대한 지각을 유도한다.
그대가 원하는 것을 그대는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실재성이 거짓이라면, 그대는 그것을 실재하게 만들려고 스스로 끌어들인 그 모든 조정을 알아차리지 못함으로써 그것을 떠받칠 것이다.
인식(vision)이 거부될 때, 원인과 결과의 혼동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이제 목적은 결과의 원인을 계속 흐려 두고 결과가 원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된다. 이렇게 결과가 겉보기에 독립적으로 보이므로, 결과는 스스로 홀로 서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또한 결과는, 그것을 만든 이가 그 결과가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사건과 감정의 원인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으로도 여겨질 수 있게 된다.
앞서 우리는 그대가 자신의 창조주를 스스로 만들어 내어, 그의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하는 욕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바로 그 욕구다. 아들은 결과이며, 그는 자신의 원인을 부인하려 한다. 그래서 그는 마치 원인인 것처럼, 실재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인다. 원인 없이는 어떤 것도 결과를 가질 수 없으며, 이 둘을 혼동하는 것은 그저 둘 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그대가 자신이 보는 세상을 스스로 만들었음을 알아보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음을 알아보는 것만큼이나 필요하다. 그 둘은 같은 오류다.
그대의 창조주가 창조하지 않은 것은 그 무엇도 그대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대가 스스로 만든 것이 그대가 보고 느끼는 것을 그대에게 말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럴 능력을 믿는다면, 그대는 자신의 창조주를 부인하고 스스로를 창조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대가 만든 세상이 뜻하는 대로 그대를 만들 힘을 지녔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아들과 아버지를, 결과와 근원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의 창조물은 그의 아버지의 창조물과 같다. 그러나 그 창조물들을 창조하면서도 아들은 자신이 근원에서 독립되어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 근원과의 하나 됨이 바로 그의 창조 행위의 근원이다. 이것을 벗어나서는 그는 창조할 힘이 없으며, 그가 만드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가 만든 것은 창조 안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며, 전적으로 만든 이의 광기에 달려 있고, 그 광기를 정당화하는 데 쓰일 수 없다.
그대의 형제는 자신이 그대와 함께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는 창조를 부인한다. 그대와 함께 그는 자신이 만든 세상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그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진실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그대들 둘 다를 창조했으며, 그대들을 함께 하나로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증명하는" 것을 보라. 그러면 그대는 자신의 실재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와 형제 사이를 가로막아 서로에게서, 그리고 그대의 아버지에게서 갈라놓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그대가 은밀히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라. 그러면 해방의 순간이 그대에게 찾아온다. 그 근원이 드러났기에 그 모든 결과는 사라진다.
그대를 가두어 두는 것은 바로 그 세상이 자신의 근원에서 독립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대를 창조했고 그대가 결코 떠난 적이 없는 그 근원에서 그대가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