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희생 없는 결백의 선물
1) 벌과 희생의 해소
또 하나의 요점이 완전히 분명해져야만, 기적과 여전히 연결된 남은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다. 십자가형이 속죄를 세운 것이 아니라, 부활이 속죄를 세웠다.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이 점을 오해해 왔다.
결핍에 대한 믿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런 잘못을 저지를 수 없을 것이다. 십자가형을 뒤집힌 관점에서 보면,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한 아들이 선했다는 이유로 고통받도록 허락했고 심지어 부추기기까지 한 것처럼 보인다. 투사에서 비롯된 이 특히 불행한 해석은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몹시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이런 반종교적인 관념은 많은 종교 안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잠시 멈추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그토록 분명히 밝힌 바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있을 법한 일인가?
언제나 그렇듯 최선의 방어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어떤 관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준 틀 전체를 뒤집어야 한다면, 그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이 절차는 작은 적용에서도 고통스럽고, 더 넓은 규모에서는 참으로 비극적이다.
박해는 흔히, 하나님 자신이 구원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박해했다는 끔찍한 잘못된 지각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그 말 자체가 무의미하다. 이 잘못된 지각을 극복하기가 특히 어려웠다. 그 잘못 자체는 다른 어떤 잘못보다 바로잡기 어렵지 않은데도, 많은 사람이 그 잘못이 방어 수단으로서 지니는 두드러진 가치를 보고 그 잘못을 내려놓기를 꺼려 왔기 때문이다.
더 온건한 형태로는, 어떤 부모가 "이건 너보다 내가 더 아프다"라고 말하며 아이를 때리고도 스스로 떳떳하다고 느낀다. 그대는 우리 아버지가 정말로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고 믿을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전부 몰아내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므로, 우리는 이런 종류의 그 무엇도 그대의 마음에 남아 있지 않도록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나는 그대가 나빴기 때문에 "벌받은" 것이 아니다. 속죄가 가르치는 온전히 자비로운 가르침은 이런 종류의 왜곡이 조금이라도 스며들면 사라져 버린다.
"원수 갚는 일은 나에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가 말씀하신다"는 말은, 자기 자신의 "악한" 과거를 하나님에게 떠넘기는 잘못된 지각이다.
그 "악한" 과거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그 악한 과거를 창조하지 않았고 유지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보복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마음(Mind)은 그런 식으로 창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대의 "악한" 행위를 그대에게 불리하게 담아 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악한 행위를 나에게 불리하게 담아 둘 가능성이 있겠는가? 이런 가정이 얼마나 완전히 불가능한지, 그리고 그 가정이 얼마나 전적으로 투사에서 비롯되는지 반드시 분명히 알아 두라.
이런 종류의 잘못은, 하나님이 아담을 거부하고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았다는 믿음을 비롯한 수많은 관련된 잘못의 원인이다. 이는 또한 그대가 이따금 내가 그대를 잘못 이끌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왜곡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말을 쓰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그럼에도 원한다면 언제든 상징을 뒤틀 수는 있다.
희생이라는 관념은 하나님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희생은 오직 두려움에서 비롯되며, 겁에 질린 사람들은 잔인해질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희생하는 것은, 하늘에 있는 그대의 아버지가 자비로운 것처럼 그대도 자비로워야 한다는 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이것이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깨닫기가 어려웠다.
좋은 교사는 결코 자신의 학생을 위협하지 않는다. 위협하는 것은 곧 공격하는 것이며, 이는 교사가 주는 것을 거부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 결과는 배움의 실패다.
2) 어린양의 결백함
나는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정확하게 불려 왔다. 그러나 그 어린양을 피로 물든 모습으로 나타내는 사람들은 그 상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올바로 이해하면, 이는 나의 결백함을 말하는 매우 단순한 상징이다.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눕는다는 것은, 힘과 결백함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본래 평화롭게 함께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는 말도 같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순결한 마음은 진리를 알며, 진리를 아는 것이 그 마음의 힘이다. 순결한 마음은 파괴를 결백함과 혼동하지 않는다. 결백함을 나약함이 아니라 힘과 연결 짓기 때문이다.
결백함은 그 무엇도 희생할 수 없다. 결백한 마음은 모든 것을 지니고 있고 오직 자신의 온전함을 지키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결백한 마음은 투사할 수 없다.
결백한 마음은 다만 다른 마음들을 공경할 수 있을 뿐이다. 공경이야말로 참으로 사랑받는 자가 자신과 같은 다른 이들에게 건네는 자연스러운 인사이기 때문이다.
어린양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은, 결백함, 곧 은총의 상태가 속죄의 의미를 완전히 또렷하게 드러내는 상태라는 뜻에서 그러하다.
속죄는 전적으로 모호하지 않다. 속죄는 빛 안에 존재하므로 완전히 또렷하다. 오직 속죄를 어둠으로 감싸려는 시도만이 보기를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속죄를 가려 왔다.
속죄 자체는 오직 진리만을 발한다. 그러므로 속죄는 해로움 없음을 그대로 보여 주며 오직 축복만을 내린다. 만약 속죄가 완전한 결백함이 아닌 다른 무엇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백함은 지혜다. 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백함은 참인 모든 것은 완전히 알고 있다.
부활은 그 무엇도 진리를 무너뜨릴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빛이 어둠의 형태들을 없애듯, 선함은 그 어떤 형태의 악도 견뎌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속죄는 완전한 가르침이다. 이는 내가 가르친 다른 모든 가르침이 참임을 보여 주는 최종적인 증명이다. 그대가 지금 이 하나의 일반적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더 작은 수많은 가르침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대가 그 진리를 믿는다면 그대는 모든 잘못에서 풀려난다.
하나님의 결백함은 하나님의 아들이 지닌 마음의 참된 상태다. 이 상태에서 그대의 마음은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은 상징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있는 그대로 앎으로써, 그대는 다음을 깨닫는다. 완전함 외에는 아무것도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제단에 유일하게 걸맞은 선물은 희생이 아니라 속죄다. 결백한 사람들의 이해가 곧 진리다. 그래서 그들의 제단은 참으로 빛난다.
3) 전면적 결백함
이 과정에서 언급되는 기본 개념들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말한 바 있다. 어떤 근본적인 개념들은 대립 개념의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 없다.
빛과 어둠, 또는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동시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런 것들은 전부 참이거나 전부 거짓이다.
그대의 생각이 종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것은, 둘 중 하나에 굳게 헌신하기 전까지는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어둠이나 아무것도 아닌 것에 굳게 헌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얼마간의 빛과 얼마간의 무언가를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진리를 완전히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백함은 부분적인 속성이 아니다. 결백함은 전면적일 때에야 비로소 실재한다. 부분적으로만 결백한 사람은 때로 상당히 어리석어 보이기 쉽다. 그런 사람들의 결백함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관점이 될 때에야 비로소 결백함은 지혜가 된다.
결백한, 곧 참된 지각은 그대가 결코 잘못 지각하지 않고 언제나 참되게 본다는 것을 뜻한다. 더 간단히 말하면, 이는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결코 보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본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무엇을 할지 확신이 없을 때, 그대는 그 사람이 바른 마음 상태에 있지 않다는 그대의 믿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증언은 기적에 바탕을 둔 기준 틀이라 하기 어렵다. 이는 또한 기적의 힘을 부인하는 참담한 결과를 낳는다.
기적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지각한다. 오직 진리만이 존재한다면, 바른 마음의 봄은 완전함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나는 오직 하나님이 창조한 것, 또는 그대가 그와 같은 뜻으로 창조한 것만이 참으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결백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전부다. 결백한 사람들은 왜곡된 지각으로 고통받지 않는다.
그대는 하나님의 뜻을 두려워한다. 이는 그대가 하나님이 자신을 닮게 창조한 자신의 마음을 그릇되게 창조하는 데 써 왔기 때문이다. 마음은 오직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고 믿을 때만 그릇되게 창조할 수 있다. "갇힌" 마음이 자유롭지 않은 것은, 갇힌 마음이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히거나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갇힌 마음은 제한되어 있고, 의지는 자기 자신을 주장할 자유가 없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마음, 또는 하나의 뜻이 되는 것이다. 아들됨(Sonship)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하나일 때, 그 완전한 조화가 곧 천국이다.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는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그 무엇도 맞설 수 없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창조주를 기억한다. 분리의 느낌은 모두 사라진다.
하나님의 아들은 거룩한 삼위일체의 일부이지만, 삼위일체 자체는 하나다. 그 차원들 안에는 아무런 혼동이 없다. 그 차원들이 하나의 마음(Mind)과 하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 단일한 목적이 완전한 통합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평화를 세운다.
그러나 이런 봄은 오직 참으로 결백한 사람만이 지각할 수 있다. 결백한 사람들의 마음이 청결하기에, 결백한 사람들은 참된 지각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는 대신 참된 지각 자체를 방어한다. 속죄의 가르침을 이해하기에 그들에게는 공격하려는 바람이 없으며, 그래서 그들은 참되게 본다. 이것이 성경이 "그가 나타나실 때(또는 지각될 때) 우리는 그와 같이 될 것인데, 이는 우리가 그를 있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 뜻하는 바다.
왜곡을 바로잡는 방법은 왜곡에 대한 믿음을 거두어들이고, 오직 참된 것에만 그 믿음을 두는 것이다. 그대는 거짓을 참으로 만들 수 없다. 그대가 지각하는 모든 것 안에서 참인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그것이 그대에게 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진리는 모든 잘못을 이겨 내며, 잘못과 공허함 속에 사는 사람들은 결코 지속되는 위안을 찾을 수 없다.
그대가 참되게 지각한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 안에서와 다른 사람들 안에서 동시에 잘못된 지각을 없애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에, 그대는 그들에게 그들의 진리에 대한 그대의 받아들임을 건네준다. 그럼으로써 그들도 스스로 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 이끌어 내는 치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