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악몽 아닌 행복한 꿈

이 세상이 환각임을 그대가 깨닫는다면 어떻겠는가? 그대가 그것을 스스로 지어냈다는 것을 참으로 이해한다면 어떻겠는가? 그 안에서 걸어 다니며 죄짓고 죽고 공격하고 살해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전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가 깨닫는다면 어떻겠는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대가 보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대가 이 세상을 보겠는가?

환각은 그 정체를 알아볼 때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치유이며 해결책이다. 환각을 믿지 말라. 그러면 사라진다.

그리고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그대가 그 환각을 지어냈음을 알아보는 것뿐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에게 주었던 힘을 다시 자신에게 거두어들이면, 그대는 그것들에서 풀려난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환각은 목적을 섬기며, 그 목적이 더는 붙들리지 않을 때 사라진다. 그러므로 물음은 결코 그대가 그것들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언제나 그대가 그것들이 섬기는 그 목적을 원하는가이다.

이 세상은 저마다 다르고 저마다 다른 가치를 지닌 수많은 목적을 내놓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목적들은 모두 같다. 다시 말하지만 등급은 없다. 그저 등급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가치의 위계일 뿐이다.

가능한 목적은 오직 둘뿐이다. 하나는 죄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함이다.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대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그대가 보는 것을 결정한다. 그대가 보는 것은 그저 그대가 목표에 이르기로 택한 방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환각은 광기라는 목표를 이루는 데 쓰인다. 그것들은 안에서 밖으로 투사된 바깥세상이 죄에 맞추어져 죄의 실재성을 증언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수단이다.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여전히 참이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없는 것 위에 모든 투사가 이루어진다. 그 "아무것도 없는 것"이 지닌 의미는 모두 투사가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것은 지각될 수 없다. 그리고 의미는 언제나 안을 들여다보아 자신을 찾은 뒤에야 밖을 내다본다. 그러므로 그대가 바깥세상에 부여하는 모든 의미는 그대가 안에서 본 시야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대가 조금이라도 보았는지, 아니면 그저 등을 돌려 판단했을 뿐인지를 반영한다.

인식(vision)은 성령이 그대의 악몽을 행복한 꿈으로 옮기는 수단이다. 곧 성령이 상상된 죄의 온갖 두려운 결과를 보여 주는 그대의 사나운 환각을, 그것들을 대신할 고요하고 안심이 되는 광경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 부드러운 광경과 소리는 기쁘게 바라보이고 즐겁게 들린다. 이 광경과 소리는 에고의 목적이 그대의 겁에 질린 자각에 가져다준 온갖 무서운 광경과 비명 소리를 대신하는 성령의 대체물이다.

이 광경과 소리는 죄에서 물러서며, 그대를 두렵게 하는 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과 그대가 저지른 오류들이 바로잡힐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두렵게 보였던 것을 바라보다가 그것이 사랑스러움과 평화의 광경으로 바뀌는 것을 볼 때, 폭력과 죽음의 장면을 바라보다가 그것이 열린 하늘 아래 정원의 고요한 풍경으로, 결코 마르지 않는 춤추는 시냇물을 따라 맑고 생명을 주는 물이 즐겁게 흐르는 풍경으로 바뀌는 것을 지켜볼 때 — 누가 그대에게 인식(vision)이라는 선물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인식(vision) 이후에, 그다음에 와야 할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다만 이것을 한순간만 생각해 보라. 그대는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에게 준 거룩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보아야 할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는 결코 생각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