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수단과 목적의 일치
1) 수단은 목적을 보장
우리는 수단과 목적의 불일치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으며, 그대의 거룩한 관계가 그대에게 오직 기쁨만을 가져다주려면 수단과 목적이 먼저 일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성령의 목표를 이루는 수단이 그의 목적과 같은 근원에서 나온다고도 말했다.
이 과정은 너무나 단순하고 직접적이어서, 그 안에는 일관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겉보기의 불일치, 즉 그대가 다른 부분보다 더 어렵게 느끼는 부분들은 단지 수단과 목적이 여전히 어긋나 있는 영역을 가리키는 표시일 뿐이다.
그리고 이 불일치가 큰 불편함을 낳는다. 이 불편함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이 과정은 그대에게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적게 요구하면서도 더 많이 내줄 수 있는 과정은 상상하기 어렵다.
죄에서 거룩함으로 관계가 갑자기 바뀐 뒤에 따라오는 그 불편한 기간은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대가 여전히 그것을 겪고 있는 정도만큼, 그대는 목적을 바꾼 이에게 수단을 맡기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목표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그 수단을 받아들일 마음도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일관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자. 목적은 수단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대가 목적을 원한다면 그 수단도 원할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것을 무엇보다도 원하지만, 그것을 얻는 수단은 배우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진실할 수 있겠는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성령이 요구하는 것은 실로 적다. 그는 그 수단까지 내주는 데도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수단은 목표에 부차적이다. 그대가 망설이는 것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그대를 두렵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러지 않으면 그대는 수단이 어렵다고 믿는 오류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수단이 그저 그대에게 주어지는 것일 뿐이라면 어떻게 어려울 수 있겠는가? 수단은 목표를 보장하며, 목표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 수단들을 좀 더 가까이 살펴보기 전에 이것을 기억하라. 그대가 수단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목적을 향한 그대의 바람이 흔들린 것이다. 목표에 이를 수 있다면, 그 목표에 이르는 수단도 가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인식이 아니라 판단
형제를 죄 없는 이로 보면서 동시에 그를 육체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야말로 거룩함이라는 목표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가? 거룩함은 단지 죄의 결과가 걷힘으로써 언제나 참이었던 것이 인식되는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죄 없는 육체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룩함은 긍정적인 것이고 육체는 그저 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악되지도 않지만 죄 없지도 않다. 실제로 아무것도 아닌 육체에는 그리스도의 속성도 에고의 속성도 의미 있게 부여될 수 없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오류일 수밖에 없다. 둘 다 그 속성들이 있을 수 없는 자리에 육체를 두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 다 진리를 위해 되돌려져야 한다.
육체는 에고가 거룩하지 않은 관계를 실재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쓰는 수단이다. 거룩하지 않은 순간은 육체의 시간이다. 그러나 이곳의 목적은 죄다. 이 목적은 환영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래서 형제를 육체로 보는 환영은 거룩하지 않음이라는 목적과 완전히 맞아떨어진다.
이 일관성 때문에, 목적이 소중히 여겨지는 동안 수단은 의문시되지 않는다. 봄은 바람에 맞추어진다. 시야는 언제나 욕구에 부차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가 육체를 본다면, 그대는 인식(vision)이 아니라 판단을 선택한 것이다. 인식(vision)은 관계와 마찬가지로 등급이 없다. 그대는 보거나 보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형제의 육체를 보는 이는 그에게 판단을 내린 것이며, 그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은 실제로 형제를 죄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형제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죄의 어둠 속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직 그 어둠 속에서만 상상될 수 있으며, 바로 이곳에서 그대가 그에 대해 품은 환영들이 그의 실재와 나란히 놓이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환영과 실재가 분리된 채 유지된다.
이곳에서는 환영이 결코 진리로 이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진리로부터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 어둠 속에서, 그대 형제의 실재는 죽기 직전 죄의 대의를 섬기며 다른 육체들과 거룩하지 않은 관계를 맺는 육체로 상상된다.
이 헛된 상상과 인식(vision)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이 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에 있다. 둘 다 그저 수단일 뿐이며, 각각은 자신이 쓰이는 목적에 맞게 적합하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의 목적을 섬길 수 없다. 각각은 목적의 선택이며, 그 목적을 위해 쓰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의도된 목적 없이는 무의미하며, 그 의도에서 떼어 낸 별개의 것으로도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목표가 소중히 여겨지기에 수단이 실재처럼 보인다. 그리고 목표가 죄가 아니라면 판단에는 아무 가치가 없다. 육체는 판단을 통하지 않고서는 바라볼 수 없다. 육체를 본다는 것은 그대에게 인식(vision)이 없다는 표시이며, 성령이 자신의 목적을 섬기라고 그대에게 내준 수단을 거부했다는 표시다.
거룩한 관계가 어떻게 죄의 수단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겠는가? 판단은 그대가 스스로에게 가르친 것이고, 인식(vision)은 그대의 가르침을 되돌리려는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그의 인식(vision)은 죄를 바라볼 수 없기에 육체를 볼 수 없다. 그렇게 그 인식(vision)은 그대를 실재로 이끈다.
그대의 거룩한 형제, 그를 보는 것이 그대의 해방인 그 형제는 환영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그를 보려 하지 말라. 그에 대한 그대의 상상이 그곳에서는 실재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를 가리려고 눈을 감았다. 육체를 보는 것이 그대의 목적이었다. 이 목적이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동안에는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될 것이고, 그래서 그대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물음은 "육체 없이 어떻게 형제를 볼 수 있는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나는 참으로 그를 죄 없는 이로 보기를 원하는가?"라고만 물으라. 그리고 이렇게 물으면서, 그의 죄 없음이 곧 두려움으로부터 그대가 벗어나는 길임을 잊지 말라.
3) 청하기만 하면
구원은 성령의 목표다. 그 목표의 수단은 인식(vision)이다. 보는 이가 바라보는 것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으며, 그가 보는 것에는 단죄가 없다. 그리고 그가 보는 것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가 보는 것은 그에게 보도록 주어진 것이며, 그의 봄을 가능하게 한 그 인식(vision)도 마찬가지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vision)은 처음에는 언뜻언뜻 그대에게 다가올 것이나, 그 정도로도 형제를 죄 없는 이로 보는 이에게 무엇이 주어지는지 보여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대가 다른 무언가를 원함으로써 진리를 잃었던 것처럼, 그대의 원함을 통해 진리는 그대에게 되돌려진다. 그 "다른 무언가"를 소중히 여김으로써 그대가 닫아 버린 그 거룩한 자리를 열라. 그러면 결코 잃어진 적 없던 것이 고요히 돌아올 것이다. 그 거룩한 것은 그대를 위해 간직되어 있었다.
판단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인식(vision)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 판단이 온전히 되돌려지기를 원하라. 그러면 그 판단의 되돌림은 그대를 위해 이루어진다.
그대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가? 그대의 의심을 확실함과 기꺼이 맞바꾸지 않겠는가? 그대는 비참함에서 기꺼이 벗어나 다시 기쁨을 배우고 싶지 않은가?
그대의 거룩한 관계는 이 모든 것을 그대에게 내준다. 그 관계가 그대에게 주어졌던 대로, 그 관계의 결과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그 거룩한 목적이 그대가 만든 것이 아니듯, 그 행복한 결말이 그대의 것이 되게 하는 수단도 그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청하기만 하면 그대의 것이 되는 것을 기뻐하라. 그대가 수단이나 목적 중 어느 것도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형제를 죄 없는 이로 보려는 그대에게 그저 주어진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주어져 있으며, 그 선물을 받아들이려는 그대의 원함만을 기다리고 있다.
인식(vision)은 보기를 청하는 이들에게 값없이 주어진다. 그대 형제의 죄 없음은 빛나는 빛 속에서 그대에게 주어져 있다. 이는 그대가 성령의 인식(vision)으로 그 죄 없음을 바라보고 그와 함께 기뻐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참된 원함과 목적의 진실함으로 평화를 청하는 모든 이에게 평화가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성령과 그 원함을 나누고,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령과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진다.
4) 판단은 장난감
그러므로 형제를 죄 없는 이로 보려는 마음을 가지라. 그러면 그리스도가 그대의 인식(vision) 앞에 떠올라 그대에게 기쁨을 줄 것이다. 그리고 형제를 자신의 모습에 대한 환영에 붙들어 두는 형제의 육체에는 아무 가치도 두지 말라.
자신의 죄 없음을 보는 것은 그대뿐 아니라 형제의 원함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대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축복하라. 그대가 그에 대해 만들어 낸 것을 그 안에서 보지 말라.
성령은 하나님이 뜻하고 그대에게 내준 것이 그대의 것이 되리라고 보증한다. 이것이 지금 그대의 목적이며, 그것을 그대의 것으로 만드는 인식(vision)이 이미 주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대에게는 육체를 보지 않게 하는 인식(vision)이 있다. 그리고 형제를 바라볼 때, 그대는 그대 아버지의 제단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제단은 천국만큼 거룩하고, 순수한 광채로 빛나며, 그대가 그 위에 놓아둔 빛나는 백합으로 반짝인다.
이보다 더 소중히 여길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대는 어째서 육체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더 나은 거처, 더 안전한 은신처라고 생각하는가? 어째서 그대는 진리보다 그것을 바라보기를 더 원하는가? 파괴의 도구를 어떻게 더 선호하여, 성령이 그대와 함께 거하려고 내주는 그 거룩한 거처를 대신하는 것으로 선택할 수 있겠는가?
육체는 약함과 상처받기 쉬움과 힘의 상실을 나타내는 표시다. 그런 구원자가 그대를 도울 수 있겠는가? 그대는 고통과 도움이 필요한 처지에서 도움조차 줄 수 없는 것에게 돌아서겠는가? 애처로울 만큼 하찮은 것이 힘을 구할 완벽한 선택이겠는가?
판단은 그대의 구원자를 약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힘이 필요한 것은 오히려 그대다. 인식(vision)이 풀지 못할 문제, 사건이나 상황, 곤혹스러움은 없다. 인식(vision)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해방된다.
이는 인식(vision)이 그대의 시력이 아니며, 그 시력을 지닌 이가 사랑하는 법칙들을 함께 가져오기 때문이다. 인식(vision)으로 바라본 모든 것은 그의 고요하고 확실한 시력이 가져오는 법칙에 따라 부드럽게 제자리를 찾는다.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의 결말은 언제나 확실하다. 그 결말은 그의 목적과 맞아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말은 조정되지 않은 본래 형태로 보이며, 그 목적을 이루기에 완벽하게 맞추어져 있다. 그의 온화한 시선 아래에서 파괴성은 이롭게 바뀌고, 죄는 축복으로 바뀐다.
육체의 눈이 바로잡을 힘을 가지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육체의 눈은 죄에 맞추어져 있어 어떤 형태로도 죄를 못 본 체 지나칠 수 없으며 모든 곳, 모든 것에서 죄를 본다. 그 눈을 통해 바라보면 모든 것이 그대 앞에서 단죄된 채 서 있을 것이다. 그대를 구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그대는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구원의 근원인 그대의 거룩한 관계는 의미를 빼앗기고, 그 가장 거룩한 목적은 이룰 수단을 잃게 될 것이다.
판단은 그저 장난감이며, 변덕이며, 그대의 상상 속에서 죽음이라는 헛된 놀이를 하는 무의미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인식(vision)은 모든 것을 바로잡아, 모든 것을 천국의 법칙이 지닌 자애로운 흐름 안으로 부드럽게 데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