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상숭배 아닌 사랑
1) 평화의 방주
평화의 방주는 둘씩 짝을 지어 들어가지만,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이 그 두 사람과 함께 들어간다. 모든 거룩한 관계는 이제 성령의 목적을 함께 나누는 만큼, 성령의 계획 안에서 자신의 특별한 역할을 배우려고 이곳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이 목적이 이루어짐에 따라, 죄가 들어올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이 일어난다.
그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두려움 없이 들어가 잠시 쉬며, 갇혀 있던 것을 잊고 자유를 기억한다. 그가 그대 없이 어떻게 들어가서 쉬고 기억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그곳에 있지 않으면 그는 완전하지 않다. 그리고 그가 그곳에서 기억하는 것은 바로 그의 완성이다.
이것이 그대에게 주어진 목적이다. 형제에 대한 그대의 용서가 그대들 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쉬려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모든 두 사람의 손에 새로운 세상 전체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쉬는 동안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들 위에 빛난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칙을 기억하며, 나머지 모든 것을 잊고 오직 그 법칙이 자신들과 모든 형제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기만을 갈망한다.
이것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대는 그 두 사람 없이 쉴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그대를 밖에 남겨 두고 나 자신의 일부를 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도 그들 중 한 사람을 밖에 남겨 둘 수 없다.
그대가 시간 안에 있는 동안, 평화로 가는 길이 열리기 전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 그토록 많은데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는지 그대는 궁금할 수 있다. 아마 이것이 그대에게는 불가능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대의 구원을 위해 효과가 없는 계획을 세웠을 리가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대가 그의 계획을 그대가 이루려는 유일한 역할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대의 노력 없이도 성령이 그대를 위해 마련해 주지 않을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성령은 그대보다 앞서 나아가 그대의 길을 곧게 하고, 그대가 걸려 넘어질 돌도, 그대의 길을 막을 장애물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도 그대에게 거부되지 않을 것이다. 겉보기의 어려움은 그대가 그곳에 이르기도 전에 하나도 남김없이 녹아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이루려는 그 유일한 목적을 제외한 모든 것에 마음 쓰지 않은 채,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 목적이 그대에게 주어졌던 것처럼, 그 목적의 성취도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의 보증은 모든 장애물에 맞서 지켜질 것이다. 그 보증은 우연이 아니라 확실함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근거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보다 더 확실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거룩한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지닌 확신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의 법칙 밖에 붙들려 있던 것에 그 법칙을 되돌려주고, 잃어버린 것을 찾는 자신의 역할을 발견한다.
무언가는 오직 시간 안에서만 잃어질 수 있으며, 결코 영원히 잃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의 부분들은 시간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며, 하나가 될 때마다 시간의 끝이 더 가까이 다가온다.
2) 영원의 전령
하나가 되는 기적 하나하나는 영원의 위대한 전령이다. 하나로 통합되고 확실한 단일한 목적을 지닌 이는 누구도 두려워할 수 없다. 이런 사람과 목적을 나누는 이는 누구든 반드시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
영원의 전령 하나하나는 죄와 두려움의 끝을 노래한다. 각각의 전령은 시간을 훨씬 넘어서는 것을 시간 안에서 말한다. 함께 높여진 두 음성은 모든 이의 마음에게 하나로 뛰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하나의 심장박동 안에서 사랑의 하나 됨이 선포되고 맞아들여진다.
하나님의 아들의 하나 됨을 함께 붙들 힘을 지닌 그대의 거룩한 관계에 평화가 있기를. 그대들은 모두를 위해 서로에게 주며, 그대들의 선물 안에서 모두가 기뻐하게 된다. 그대가 주는 선물을 누가 그대에게 주었는지 잊지 말라. 그리고 이것을 잊지 않음으로써, 그대는 누가 그에게 그 선물을 주어 그대에게 주게 했는지 기억하게 될 것이다.
형제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에고만이 그렇게 하지만,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단지 에고가 상대를 자신을 위해 원한다는 것뿐이며, 그러므로 에고는 형제를 너무 낮게 평가한다. 가늠할 수 없는 것은 분명 평가될 수 없다.
그대의 판단 너머 너무나 멀리 있어 보이지도 않는 것을 판단하려는 무의미한 시도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을 그대는 알아보는가? 그대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결코 그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대신 그것이 오기를 인내로 기다리라. 그대가 형제를 위해 오직 평화만을 원할 때, 그의 가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그대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형제를 위해 원하는 것을 그대는 받을 것이다.
그대에게 평화를 내주는 이의 가치를 그대가 어떻게 가늠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의 선물 외에 그대가 무엇을 원하겠는가? 그 사람의 가치는 그의 아버지가 세운 것이며, 그대는 형제를 통해 그의 아버지의 선물을 받으면서 그 가치를 알아볼 것이다. 형제 안에 있는 것은 그대의 감사하는 인식(vision) 안에서 너무나 밝게 빛나, 그대는 그저 그를 사랑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를 판단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서도 판단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고집할 이가 누구이겠는가? 그런 고집은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인식(vision)이냐 판단이냐가 그대의 선택이지, 둘 다일 수는 결코 없다.
형제의 육체는 그에게 쓸모없는 만큼이나 그대에게도 쓸모가 없다. 육체가 오직 성령이 가르치는 대로만 쓰일 때, 그 육체에는 아무런 역할도 없다. 마음은 소통하는 데 육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를 보는 시력은 거룩한 관계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어떤 쓸모도 없다. 그리고 그대가 형제를 그렇게 바라보는 동안에는, 수단과 목적이 하나로 맞추어지지 않은 것이다.
하나로 충분한데 어째서 이것을 이루는 데 그토록 많은 거룩한 순간이 필요하겠는가? 거룩한 순간은 오직 하나뿐이다. 황금빛처럼 시간을 관통해 흐르는 영원의 그 작은 숨결은 언제나 같으며, 그 앞에도 그 뒤에도 아무것도 없다.
그대는 거룩한 순간 하나하나를 시간 속의 서로 다른 지점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까지 담았던 모든 것, 앞으로 담게 될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과거는 그것에서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않으며, 미래도 더는 아무것도 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모든 것이 있다. 여기에 그대의 관계의 사랑스러움이 있으며, 수단과 목적은 이미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그대가 언젠가 형제에게 내줄 완전한 믿음이 이미 그대에게 내주어져 있다. 여기에 그대들이 서로에게 줄 한없는 용서가 이미 주어져 있으며, 그대가 앞으로 바라보게 될 그리스도의 얼굴이 이미 보여져 있다.
이런 선물을 주는 이를 그대가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이 선물을 다른 어떤 것과 바꾸겠는가? 이 선물은 하나님의 법칙을 그대의 기억으로 되돌려준다. 그리고 그저 그 법칙들을 기억함으로써, 그대를 고통과 죽음의 포로로 붙들어 둔 법칙들은 잊혀야만 한다.
이것은 형제의 육체가 그대에게 내주는 선물이 아니다. 그 선물을 감추는 베일은 그도 함께 감춘다. 그가 바로 그 선물이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대도 마찬가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들 둘 다 안에서 그 선물을 보는 이가 그대들 둘 모두를 위해 그것을 내주고 받아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 그리고 그의 인식(vision)을 통해 그대는 그 선물을 보게 될 것이며, 그의 이해를 통해 그것을 알아보고 그대 자신의 것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위안을 받으라. 그리고 성령이 사랑으로, 그리고 자신이 보는 것에 대한 완전한 확신으로 그대를 지켜보고 있음을 느끼라.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알며, 우주가 그의 온화한 손안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있다는 아버지의 확신을 함께 나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확신을 함께 나누려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이기에, 우주의 창조주가 우주를 그에게 내주고 그 우주가 안전하게 있음을 알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아버지가 아는 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확신이 잘못 놓였을 리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의 의미는 오직 창조주와의 관계 안에만 있다. 만약 그 의미가 다른 곳에 있다면 그것은 우연에 근거할 것이지만, 다른 곳이란 없다. 그리고 그 참된 관계는 온전히 사랑이며 영원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 거룩하지 않은 관계를 지어냈다.
그의 참된 관계는 완전한 합일과 끊이지 않는 연속성의 관계다. 그가 지어낸 관계는 부분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조각조각 부서져 있고,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그의 아버지가 창조한 관계는 온전히 참나(Self)를 아우르고 참나를 확장한다. 그가 지어낸 관계는 온전히 자기 파괴적이고 자기 제한적이다.
3) 성령의 성전은 관계
거룩한 관계와 거룩하지 않은 관계 둘 다를 경험하는 것보다 이 대조를 더 잘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거룩한 관계는 사랑에 근거하며, 고요하고 흔들림 없이 그 위에 머문다. 육체는 그 관계에 끼어들지 않는다. 육체가 들어오는 어떤 관계든 그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우상숭배에 근거한다.
사랑은 알려지고, 완전히 이해되고, 나누어지기를 바란다. 사랑에는 비밀이 없으며, 따로 떼어 감추려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사랑은 눈을 뜨고 고요히 햇빛 속을 걸으며, 웃음으로 반기고 오해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고 명백한 진실함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우상은 나누지 않는다. 그것들은 받아들이지만 결코 되돌려 주지 않는다. 그것들은 사랑받을 수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것들이 들어가는 어떤 관계든 그 의미를 잃는다.
우상은 은밀함 속에 살며, 햇빛을 미워하고 육체의 어둠 속에서 행복해한다.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숨기고 자신의 비밀도 함께 감추어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에게는 어떤 관계도 없다. 그곳에는 다른 누구도 맞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누구에게도 미소 짓지 않으며, 자신에게 미소 짓는 이들도 보지 못한다.
사랑에는 신비를 어둡게 감추고 햇빛으로부터 숨기는 어두운 성전이 없다. 사랑은 힘이 아니라 관계를 추구한다. 육체는 관계를 통해 힘을 추구하려고 에고가 선택한 무기다. 그리고 에고의 관계는 거룩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에고는 그 관계가 무엇인지조차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오직 자신의 우상이 번성하게 하는 봉헌물을 위해서만 그 관계를 원한다. 나머지는 그저 내던져 버린다. 나머지가 내줄 수 있는 모든 것이 무가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머물 곳이 없는 에고는 자신의 우상을 놓아 둘 육체를 최대한 많이 모아, 그것들을 자기 자신을 위한 성전으로 세우려 한다.
성령의 성전은 육체가 아니라 관계다. 육체는 고립된 어둠의 티끌이며, 숨겨진 밀실이고, 무의미한 신비의 작은 자리이며, 세심하게 보호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감추고 있지 않은 의미 없는 울타리다.
육체 안에서 거룩하지 않은 관계는 실재로부터 달아나, 자신을 살아 있게 할 부스러기를 찾는다. 이곳으로 그것은 자신의 형제들을 끌고 와, 그 형제들을 자신의 우상숭배 안에 붙들어 둔다. 이곳에서 그것은 "안전"하다. 이곳에는 사랑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사랑이 결코 있을 수 없는 곳에 자신의 성전을 짓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이가,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그 얼굴을 볼 수 없는 그곳을 자신의 거처로 선택하겠는가? 그대는 육체를 성령의 성전으로 만들 수 없으며, 육체는 결코 사랑의 자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육체는 우상숭배자의 거처이며, 사랑을 단죄하는 자리다. 이곳에서 사랑은 두려운 것이 되고 소망은 버려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숭배받는 우상조차 신비에 싸여 있으며, 자신을 숭배하는 이들로부터 떼어져 있다. 이것은 어떤 관계도, 어떤 되돌려줌도 없는 데 바쳐진 성전이다. 이곳에는 경외 속에서 지각되고 경건함으로 떠받들어지는 분리의 "신비"가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이곳에서 그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진다.
그러나 그대가 깨닫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그대가 형제 안에서 두려워하며 보려 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그대에게 두려운 존재로,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자는 언제나 사랑을 두려워할 것이다.
사랑이 다가오는 것만큼 우상숭배자들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그들에게 다가가면 사랑은 반드시 육체를 못 본 체 지나친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의 성전의 견고해 보이던 기초가 흔들리고 느슨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두려움 속에서 물러난다.
형제여, 그대는 그들과 함께 떨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은 다만 탈출의 전령일 뿐이다. 이 어둠의 자리는 그대의 거처가 아니다.
그대의 성전은 위협받지 않는다. 그대는 더 이상 우상숭배자가 아니다. 성령의 목적은 그대의 육체가 아니라 그대의 관계 안에 안전하게 있다.
그대는 육체에서 벗어났다. 그대가 있는 곳에 육체는 들어올 수 없다. 성령이 그곳에 자신의 성전을 세웠기 때문이다.
관계에는 등급이 없다. 그것들은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거룩하지 않은 관계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고립의 상태이며, 자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룩하지 않게 만든다는 그 미친 관념이 가능해 보이던 그 순간, 그대의 모든 관계가 무의미해졌다. 그 거룩하지 않은 순간에 시간이 태어났고, 그 미친 관념을 담아 그것에 실재라는 환영을 부여하기 위해 육체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관념은 시간 안에서 잠시 함께 유지되다가 사라지는 거처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 실재에 맞서는 이 미친 관념을 한순간이 아니고서야 무엇이 담아낼 수 있었겠는가?
우상은 사라져야 하며, 떠나면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우상이 힘이 있어 보이는 그 거룩하지 않은 순간은 눈송이만큼이나 연약하지만, 눈송이의 사랑스러움은 없다. 이것이 거룩한 순간의 영원한 축복과 그 무한한 자애를 대신해 그대가 원하는 대체물인가? 그토록 강해 보이고, 그토록 뼈아프게 오해되며, 그토록 거짓된 매력에 투자된 거룩하지 않은 관계의 악의를, 그대는 평화와 이해를 내주는 거룩한 순간보다 더 선호하는가?
그렇다면 육체를 내려놓고 고요히 그것을 초월하여, 그대가 참으로 원하는 것을 맞이하러 일어서라. 그리고 성령의 거룩한 성전에서, 그대가 깨어나 벗어난 것을 되돌아보지 말라. 환영을 초월하여 그것들을 저 멀리 뒤에 남겨 둔 마음을 어떤 환영도 끌어당길 수 없기 때문이다.
거룩한 관계는 하나님의 아들이 실재 안에서 아버지와 맺고 있는 참된 관계를 반영한다. 성령은 그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확신 속에서 그 관계 안에 머문다. 그 관계의 견고한 기초는 진리가 영원히 떠받치며, 사랑은 자신의 것에게 내주는 온화한 미소와 다정한 축복으로 그 관계 위에 빛난다.
이곳에서 거룩하지 않은 순간은 기쁘게 안전한 귀환의 거룩한 순간과 맞바뀐다. 여기에 참된 관계로 가는 길이 부드럽게 열려 있으며, 그대들은 그 길을 함께 걸으며 육체를 감사히 뒤에 남겨 두고 영원한 팔(Arms) 안에서 쉰다.
사랑의 팔(Arms)은 그대를 받아들이려고 열려 있으며, 그대에게 영원한 평화를 준다.
육체는 에고의 우상이며, 살이 된 죄에 대한 믿음이 바깥으로 투사된 것이다. 이 육체는 마음 둘레에 살로 된 벽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어 내어, 마음을 공간과 시간의 작은 한 자리에 가두고, 죽음에 매인 채, 자신의 주인을 기리며 탄식하고 슬퍼하다 죽을 한순간만을 준다.
그리고 이 거룩하지 않은 순간은 생명처럼 보인다 — 절망의 한순간, 물 한 방울 없이 망각 위에 불안정하게 놓인 메마른 모래의 작은 섬. 이곳에 하나님의 아들이 잠시 들러, 죽음의 우상에게 자신의 헌신을 바치고 나서 지나쳐 간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살아 있다기보다는 죽어 있다. 그러나 그가 우상숭배와 사랑 사이에서 다시 선택하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 그에게는 이 순간을 육체에 조공을 바치는 데 쓸지, 아니면 자신이 육체로부터 자유를 받게 할지 선택할 능력이 주어져 있다. 이곳에서 그는 이전에 자신이 선택했던 거룩하지 않은 순간을 대신하도록 자신에게 내주어진 거룩한 순간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는 관계가 자신의 파멸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임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을 배우고 있는 그대는 여전히 두려울 수 있지만, 그대는 옴짝달싹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거룩한 순간은 거룩하지 않아 보이는 그 대응물보다 그대에게 더 큰 가치를 지니며, 그대는 자신이 참으로 원하는 것이 오직 하나뿐임을 배웠다.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 혼란스러울 수는 있어도, 낙담할 때는 결코 아니다.
그대에게는 참된 관계가 있으며, 그것은 의미가 있다. 그 관계는 같은 것들이 서로 닮은 만큼이나 하나님과의 그대의 참된 관계를 닮았다.
우상숭배는 지나갔으며 무의미하다. 어쩌면 그대는 아직 형제를 조금은 두려워할 수 있고,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그림자가 그대에게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육체 너머의 하나의 참된 관계를 받은 이들에게 그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에서 오래도록 붙들려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스스로에게서 오래도록 감추어 두고,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자신의 자각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