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상은 그대 자신에 대한 판단
1) 조정이라는 왜곡
죄에 대한 믿음은 하나의 조정이다. 그리고 조정이란 변화이며, 지각의 전환이거나, 전에는 그랬던 것이 다르게 되었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조정은 왜곡이며, 그 왜곡을 실재에 맞서 지키기 위해 방어를 불러온다.
앎에는 어떤 조정도 필요하지 않으며, 사실 어떤 전환이나 변화가 일어나면 앎은 사라진다. 조정은 앎을 즉시 단순한 지각으로, 즉 확신이 사라지고 의심이 들어온 보는 방식으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이 손상된 상태에는 조정이 필요하다. 그 상태가 참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위해 오직 자신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진리에, 누가 조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떤 종류의 조정이든 조정은 에고에게서 나온다. 모든 관계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려면 조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 에고의 고정된 믿음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간섭이 없는 직접적인 관계는 언제나 위험한 것으로 여겨진다. 에고는 스스로 임명한 모든 관계의 중재자로서,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온갖 조정을 가한다. 그리고 그 조정들을 서로 만나려는 이들 사이에 끼워 넣어, 이들을 갈라놓고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 치밀한 간섭이 그대가 거룩한 관계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기 어렵게 만든다.
거룩한 이들은 진리를 간섭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로 그 진리 안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알아보고, 자신이 보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진리에 맞추거나 그것을 자신에게 맞추려 하지 않고, 그것을 곧바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 먼저 정하지 않은 채, 이미 자기 안에 있었음을 본다.
그들의 바라봄은 그저 질문을 던지는 일일 뿐이며, 그들에게 답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보는 것이다.
2) 나는 무엇인가
그대는 세상을 만들고 나서 그것에 자신을 맞추고, 그것을 자신에게 맞춘다. 그리고 그대의 지각 안에서 그대 자신과 그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 지각이 둘 다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질문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답이 필요하다. 그대는 자신이 만든 것이 마음에 드는가? — 살인과 공격의 세상, 그 안에서 그대는 홀로 겁에 질린 채 끊임없는 위험을 뚫고 조심스럽게 길을 헤쳐 나간다. 기껏해야 죽음이 그대를 덮쳐 그대가 사라지기까지 조금 더 기다려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대가 이 세상을 지어냈다. 이 세상은 그대가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그림이다. 살인자는 겁에 질려 있으며, 죽이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조정으로 두렵게 만든 세상에 스스로를 맞추려는 이들의 두려운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면의 슬픔으로부터 슬픔에 잠긴 채 밖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그 슬픔을 본다.
그대는 세상이 실제로 어떠한지, 행복한 눈으로 보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한 적이 없는가? 그대가 보는 세상은 그대 자신에 대한 판단일 뿐이다. 세상은 애초에 그곳에 있지도 않다. 그러나 판단이 그것에 선고를 내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며, 그것을 실재로 만든다. 그대가 보는 세상은 바로 이런 것이다 — 그대 자신에 대한 판단이며, 그대가 만든 것이다.
에고는 그대 자신에 대한 이 병든 그림을 세심하게 보존한다. 그 그림은 에고의 형상이며 에고가 사랑하는 것이고, 세상 속 그대 바깥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대가 이 그림이 바깥에 있으며 그대를 좌지우지한다고 믿는 한, 그대는 이 세상에 맞추어야만 한다.
이 세상은 무자비하며, 만약 정말로 그대 바깥에 있다면 그대는 참으로 두려워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무자비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대였으며, 이제 그 무자비함이 그대를 마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바로잡을 수 있다.
거룩한 관계 안에서 누가 오래도록 거룩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에고가 바라보는 세상이 에고 자신을 닮았듯이, 거룩한 이들이 보는 세상은 그들과 하나다. 거룩한 이들이 보는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그 안에서 자신의 결백함을 보기 때문이다. 거룩한 이들은 세상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 주지 않았고, 자신의 명령에 맞추려고 조정하지도 않았다.
거룩한 이들은 부드럽게 세상에게 물으며 속삭였다. "너는 무엇이냐?" 그리고 모든 지각을 지켜보는 성령이 답했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세상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말라. 세상은 죄를 믿지만, 그대가 보는 대로 그것을 만든 그 믿음은 그대 바깥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광기에 맞추게 만들려 하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 안에는 낯선 이가 있으니, 그 낯선 이는 부주의하게 진리의 거처로 헤매어 들어왔고 다시 헤매어 나갈 것이다. 그는 목적 없이 왔으나, 성령이 내주었고 그대가 받아들인 그 빛나는 빛 앞에서는 머물지 못할 것이다. 그곳에서는 그 낯선 이가 머물 곳을 잃고 그대는 반가이 맞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 덧없는 낯선 이에게 "나는 무엇인가"라고 묻지 말라. 그 낯선 이는 온 우주에서 알지 못하는 유일한 존재다. 그러나 그대가 묻는 것은 바로 그이며, 그대가 맞추려는 것은 바로 그의 답이다.
이 하나의 사나운 생각은 오만함에 있어서는 사납지만 너무나 작고 무의미해서 진리의 우주를 아무도 모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이 생각이 그대의 안내자가 된다. 그대는 우주의 의미를 묻기 위해 그것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보는 진리의 우주 전체에서 유일하게 눈먼 것인 그 사나운 생각에게, 그대는 이렇게 묻는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판단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에게 판단을 구하는 이가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대가 그렇게 했다면, 그대는 그 답을 믿고 그것이 마치 진리인 양 거기에 맞추려 하겠는가? 그대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 사나운 생각이 그대에게 준 답이며, 그대는 그 답을 참되게 만들려고 세상을 조정할 힘을 그 생각에게 주었다.
그대는 이 한 줄기 광기에게 그대의 거룩하지 않은 관계의 의미를 물었고, 그 미친 답에 따라 관계를 조정했다. 그것이 그대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을 축복하려고 기쁨으로 그를 만났으며, 그가 그대에게 내밀어 준 그 모든 행복에 그에게 감사했는가? 그대는 형제를 하나님이 그대에게 준 영원한 선물로 알아보았는가? 그대는 서로를 축복하려고 그대들 둘 다 안에서 빛나는 거룩함을 보았는가?
서로 안의 거룩함을 보고 서로를 축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대의 거룩한 관계의 목적이다. 그 목적을 이룰 방법을, 그 관계를 여전히 거룩하지 않게 만들려는 그 하나의 생각에게 묻지 말라. 그 사나운 생각에게 수단과 목적을 조정할 힘을 주지 말라.
3) 죄수에서 낙원으로
여러 해 동안 무거운 사슬에 묶여 굶주리고 야위었으며, 지치고 기진맥진한 채 너무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눈을 내리떠 빛을 기억하지 못하는 죄수들은, 자유로워지는 그 순간에 기쁨으로 벌떡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자유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대는 흙먼지 속에서 힘없이 더듬거리다가 형제의 손을 찾았으나, 그것을 놓아야 할지 아니면 그토록 오래 잊혔던 생명을 붙잡아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손에 힘을 더하고, 그대의 자유의 의미가 담겨 있는 그 강한 동반자를 향해 눈을 들라.
그 강한 동반자는 그대 곁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거룩함은 손상되지 않은 채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그가 그대 곁에 있으니, 오늘 그대는 그와 함께 낙원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평화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대를 위한, 그리고 그대들 각자가 서로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나의 뜻이다. 여기에는 오직 거룩함과 한계 없는 하나 됨만이 있다. 천국이란 곧바르고 완전하며 두려움의 베일이 씌워지지 않은 합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하나이며, 완전한 온유함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 여기서는 우리 사이에 어떤 분리가 있다는 생각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분리 안에서 죄수였던 그대들이 이제 낙원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는 그대들과, 나의 친구들과, 나의 형제들과, 나의 참나(Self)와 하나가 되고자 한다.
그대가 형제에게 준 선물은 우리의 하나 됨이 곧 오리라는 확신을 나에게 주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을 나와 나누고, 그것이 정당함을 알라.
완전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는 것은, 사랑이 죄를 알지 못하고 남을 자기 자신처럼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면을 자비로 바라보는데, 그 내면이 바깥에서 무엇을 두려워할 수 있겠는가?
결백한 이는 안전을 보고, 마음이 순수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을 보며, 아들이 자신을 아버지에게로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들이 있고자 하는 곳이 아니라면 다른 어디로 가겠는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거룩하게 창조했고 그렇게 지켜 온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이제 그대들은 각자 서로를 아버지에게로 이끌 것이다. 그대의 형제 안에는 그대의 불멸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빛이 있다. 그를 죄 없는 이로 보라. 그러면 그대 안에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4) 죄에 힘 주지 않음
그대가 힘을 주지 않는 한 아무것도 그대를 해칠 수 없다. 그러나 그대는 이 세상의 법칙이 준다는 것을 해석하는 방식대로 힘을 준다. 즉 그대는 줄수록 잃는다. 힘을 주는 일은 애초에 그대에게 달려 있지 않다.
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하나님이 주고 성령이 다시 일깨우는 것이다. 성령은 그대가 줄수록 얻는다는 것을 안다.
성령은 죄에 힘을 주지 않으며, 그러므로 그것에는 아무 힘이 없다. 이 세상이 보는 죄의 결과 — 질병과 죽음과 불행과 고통 — 에도 마찬가지다. 이런 것들은 일어난 적이 없다. 성령이 죄의 결과를 보지 않으며, 죄의 겉보기 근원에 아무 힘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령은 그대를 죄의 결과들에서 자유롭게 지켜 준다. 그대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 환영도 없기에, 성령은 그저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내주는데, 하나님은 참된 모든 것을 이미 주었고 받았다. 참되지 않은 것은 그가 받은 적도 준 적도 없다.
죄는 천국에 자리가 없다. 천국에서는 죄의 결과가 낯선 것이며, 그 근원이 들어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결과도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그대가 형제를 죄 없는 이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안에 천국이 있다. 대신 그 안에서 죄를 본다면, 천국은 그대에게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를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대의 것이 그에게서 그대에게로 빛난다.
그대의 구원자는 그대에게 오직 사랑만을 주지만, 그대가 그에게서 무엇을 받을지는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대의 모든 잘못을 못 본 체 지나치는 일은 그에게 달려 있으며, 바로 거기에 그 자신의 구원이 있다. 그리고 그대의 구원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다른 법칙을 세우고 그 법칙에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것을 강요할 힘을 준 마음들 안에서 하나님의 법칙을 다시 일깨우는 일이다. 그대의 미친 법칙은 그대가 잘못을 저지르도록 보장하려고 만들어졌다. 또한 그 결과를 그대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결과들에 그대를 지배할 힘을 주도록 보장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광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그대는 광기로부터의 그대의 구원자 안에서 바로 이 광기를 보려 하는가? 그는 그대만큼이나 이 광기에서 자유로우며, 그대가 그 안에서 보는 자유 안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의 자유를 본다. 그대들은 이것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준 것은 하나님의 법칙을, 오직 하나님의 법칙만을 따른다. 그리고 그 법칙을 따르는 이들이 다른 어떤 근원의 결과로 고통받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자유를 선택하는 이들은 오직 자유의 결과만을 경험할 것이다.
자유를 선택하는 이들의 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그들은 그 힘을 오직 하나님이 그들과 나누라고 준 것에만 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준 것만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들은 오직 이것만을 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힘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의 자유는 세워지고 유지된다. 그 자유는 가두려는, 그리고 갇히려는 모든 유혹을 뚫고 지켜진다.
자유가 무엇인지는 자유를 배운 이들에게 물어야 한다. 독수리가 어떻게 날아오르는지 참새에게 묻지 말라. 작은 날개를 지닌 이들은 그대와 나눌 힘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 없는 이들은 자신이 받은 대로 준다. 그렇다면 형제 안에 있는 죄 없음의 힘을 보고, 그대가 그에게 내주었던 죄로부터의 해방의 힘을 그와 나누라.
겉보기에 홀로 이 땅을 걷는 것처럼 보이는 각 사람에게는 구원자가 주어져 있다. 그 구원자의 특별한 역할은 여기서 그 사람을 풀어 주고, 그렇게 하여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분리의 세상에서는 모두가 똑같음에도 각자 따로 지명된다. 그러나 자신들이 모두 똑같다는 것을 아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구원자를 죄 없는 이로 볼 준비가 되었을 때 자신의 구원자를 찾는다.
그 계획은 그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그대는 자신이 배우도록 주어진 그 부분 외에는 어떤 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나머지를 아는 이가 그대의 도움 없이도 그 나머지를 처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나머지를 다루는 데 그대의 역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그대의 역할 안에 전체가 담겨 있으며, 그대의 역할이 없이는 어떤 역할도 완전하지 않고, 그대의 역할 없이는 전체도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