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희생이 아니라 해방
1) 육체 가치의 믿음
우리는 평화를 없애 버리려는 그대의 욕구라는 장애물을 평화가 먼저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죄책감의 매력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평화가 원해지지 않는다. 평화가 건너가야 할, 첫 번째 장애물과 밀접히 연관된 두 번째 장애물은 육체가 주는 것에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다. 여기서 죄책감의 매력이 육체 안에서 드러나고 그 안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육체의 가치가 바로 평화가 그대에게서 빼앗아 갈 것이라고 그대가 생각하는 그 가치다. 그것이 바로 평화가 그대에게서 앗아 가 그대를 집 없는 신세로 만들 것이라고 그대가 믿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그대는 평화에게 머물 곳을 내주지 않으려 한다. 그대는 이 "희생"이 치르기에 너무 크고, 그대에게 요구하기에는 너무 과하다고 느낀다.
이 희생은 희생인가, 아니면 해방인가? 육체 안에 구원이 있다는 그대의 기이한 믿음을 정당화할 만큼, 육체가 그대에게 실제로 준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죽음에 대한 믿음임을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여기에 속죄를 살인으로 보는 지각의 초점이 있다.
여기에 사랑이 곧 두려움이라는 관념의 근원이 있다. 성령의 전령은 육체를 훨씬 넘어서 보내지며, 마음을 불러 거룩한 친교 안에서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하려 한다. 그 소식이 바로 내가 그대를 위해 성령의 전령들에게 준 소식이다. 육체를 보는 것은 오직 두려움의 전령뿐이다. 그들은 고통받을 수 있는 것을 찾기 때문이다.
고통받을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나는 일이 희생인가? 성령은 그대에게 육체의 쾌락에 대한 희망을 희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육체에는 애초에 쾌락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도 그대에게 가져다줄 수 없다. 고통이야말로 성령이 요구하는 유일한 "희생"이며, 그는 바로 이것을 없애려 한다. 평화는 그대에게서 오직 영원한 것을 향해서만 확장되며, 그대 안의 영원한 것으로부터 뻗어 나온다. 평화는 그 나머지 모든 것을 가로질러 흐른다.
두 번째 장애물도 첫 번째 장애물보다 더 견고하지 않다. 그대는 평화를 없애 버리기도, 제한하기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평화와 평화가 나아가는 길 사이에 가로놓으려는 이 장애물들은, 그대의 뜻과 그 성취 사이에 그대 스스로 세운 장벽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대는 두려움의 잔치가 아니라 친교를 원한다. 그대는 죄책감의 고통이 아니라 구원을 원한다. 그리고 그대는 작은 진흙 덩어리가 아니라 그대의 아버지가 그대의 집이 되기를 원한다.
그대의 거룩한 관계 안에 그대 아버지의 아들이 있다. 그는 아버지와도, 자기 자신과도 친교를 잃지 않았다. 그대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로 동의했을 때, 그대는 이것이 사실임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대가도 없으며, 오히려 대가로부터의 해방이 있을 뿐이다.
그대는 자신의 환영을 위해 매우 값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그 대가로 얻은 것 중 무엇도 그대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천국은 희생될 수 없고 그대에게 희생이 요구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은가? 그대는 우리의 합일 앞에 어떤 장애물도 놓을 수 없다. 그대의 거룩한 관계 안에 나는 이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장애물을 함께 넘어설 것이다. 우리는 문밖이 아니라 문 안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지친 세상을 축복하려는 평화가 지나가도록, 그 문은 안에서부터 얼마나 쉽게 열리는가! 그대가 이미 무한한 것과 하나가 되었는데, 우리가 함께 장벽을 지나쳐 걷는 일이 어려울 수 있겠는가? 죄책감의 끝을 내주는 일은 그대의 손에 달려 있다.
2) 용서와 희생 내주기
그대는 이제 와서 형제에게서 죄책감을 찾으려 멈추어 서겠는가? 내가 그대에게 죄책감의 끝의 상징이 되게 하고, 그대가 나를 보듯 형제를 바라보라. 하나님의 아들이 저질렀다고 그대가 생각하는 모든 죄를 나에게 용서하라. 그러면 그대의 용서의 빛 안에서 그 형제는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고, 결코 존재한 적 없던 것을 잊을 것이다.
나는 그대의 용서를 구한다. 그대가 죄가 있다면 나도 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죄책감을 넘어서고 세상을 이겼다면, 그대는 나와 함께 있었다.
내가 그대에게 상징하는 것을 그대는 자기 자신 안에서 본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대는 나에게서 죄책감의 상징을 보겠는가, 아니면 죄책감의 끝을 보겠는가? 그대의 거룩한 관계로부터 진리가 진리를 선포하고, 사랑이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구원은 그대가 나의 아버지와 나에게 내준 그 집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된 고요한 친교 안에 함께 있다.
오, 신실한 이들이여, 그대 안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거룩한 합일로 오라! 그리고 평화에게 천국이라는 집을 내준 데 대한 감사로 그대에게 주어지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 놓지 말라. 죄책감의 끝을 알리는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내보내라.
그러면 온 세상이 응답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죄의 끝을 증언하며 죄의 힘이 영원히 사라졌음을 보여 줄 때, 그대의 행복을 생각하라. 죄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는데, 죄책감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죽음을 대변하던 위대한 옹호자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데, 죽음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의 환영을 나에게 용서하고,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벌에서 나를 풀어 주라. 그렇게 그대의 형제에게 자유를 가르쳐 나를 풀어 줌으로써, 그대는 내가 가르친 자유를 배울 것이다. 나는 그대의 거룩한 관계 안에 있지만, 그대는 자유를 가로막으려고 스스로 세운 장애물 뒤에 나를 가두어 그대에게 이르는 내 길을 막으려 한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 있는 이를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이 안에서, 우리가 이미 하나 된 우리의 친교가 새로운 지각의 초점이 되어, 그대 안에 담긴 빛을 온 세상에 가져다줄 수 있다.
그대의 작은 역할은 오직 희생이라는 관념 전체를 성령에게 내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대신 성령이 주는 평화를, 그 확장을 붙들어 두어 그대의 인식을 제한할 그런 한계 없이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성령이 주는 것이 지닌 무한한 힘을 그대가 가지려 하고 그 힘을 하나님의 아들을 해방하는 데 쓰려 한다면, 성령이 주는 것은 반드시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없애 버리려는 것은 이 평화가 아니며, 이 평화를 지니고 있으면서 성령이 주는 것을 제한할 수는 없다. 평화가 머물 곳이 없다면, 그대도 나도 머물 곳이 없다. 그리고 우리의 집인 그도 우리와 함께 머물 곳이 없다.
이것이 그대의 바람인가? 그대는 영원히 평화를 찾아 떠도는 방랑자로 남으려 하는가? 그대는 평화와 행복에 대한 희망을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에 걸려 하는가?
3) 육체는 수단일 뿐
영원한 것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정당하다. 영원한 것은 언제나 친절하고, 그 인내가 무한하며, 온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대에게 평화를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 안에서 이미 평화로운 것, 자신처럼 불멸하는 것과만 하나가 될 수 있다.
육체는 그대에게 평화도 혼란도, 기쁨도 고통도 가져다줄 수 없다. 그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것에는 그 자체의 목적이 없으며, 오직 그것에 주어진 목적만이 있을 뿐이다. 육체는 그대가 그것에 부여하는 목표에 이르는 수단이 무엇이든, 바로 그것처럼 보일 것이다.
평화와 죄책감은 둘 다 마음의 상태이며, 얻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상태들은 평화와 죄책감을 불러내는 감정의 거처이며, 따라서 그 감정과 서로 맞는다. 그러나 그대와 맞는 것이 어느 쪽인지 생각해 보라. 여기에 그대의 선택이 있으며, 그 선택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 선택에 담긴 모든 것이 함께 따라올 것이며, 그대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그 선택과 분리될 수 없다.
육체는 겉보기에 믿음을 크게 배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육체 안에 환멸과 불신의 씨앗이 있지만, 육체의 배신은 오직 그대가 육체에게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할 때뿐이다. 그대의 잘못이 낙담과 환멸의, 그리고 그대를 저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보복성 공격의 합당한 근거가 될 수 있는가?
그대의 오류를 불신에 대한 정당화로 삼지 말라. 그대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무엇이 신뢰할 만한지에 대해 잘못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잘못을 바로잡으면 그대에게 믿음의 근거가 생길 것이다.
육체를 통해 쾌락을 구하면서 고통을 발견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에고는 이 관계를 죄의 증거로 보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실제로 전혀 징벌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한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며, 그 동일시가 곧 고통을 불러들이는 초대다. 그 동일시는 두려움을 불러들여 그대의 목적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죄책감의 매력도 그와 함께 들어올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두려움이 육체에게 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고통스럽다.
두려움은 모든 환영의 고통을 함께 나눌 것이며, 쾌락이라는 환영은 고통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것이 필연적이지 않은가? 두려움의 명령 아래 육체는 죄책감을 좇으며, 죄책감에 대한 매력이 자신의 존재라는 환영 전체를 유지시키는 주인을 섬긴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고통의 매력이다. 이 지각에 지배당한 육체는 고통의 하인이 되어, 충실하게 고통을 좇으며 고통이 곧 쾌락이라는 관념에 복종한다. 육체에 대한 에고의 막대한 투자 전체의 밑바탕에는 바로 이 관념이 있다.
그리고 에고가 감추어 두면서도 먹고 사는 것이 바로 이 미친 관계다. 에고는 그대에게 육체의 쾌락이 곧 행복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스스로에게는 "그것은 죽음이다"라고 속삭인다.
4) 주는 이, 받는 이
육체가 어째서 그대에게 무언가여야 하는가? 육체를 이루는 재료가 소중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육체에는 분명히 어떤 느낌도 없다. 그것은 그대가 원하는 느낌을 그대에게 전달할 뿐이다.
여느 통신 매체와 마찬가지로 육체는 주어진 소식을 받고 보낼 뿐이다. 그것은 그 소식에 대해 아무 느낌도 없다. 그 소식에 담긴 모든 느낌은 보내는 이와 받는 이가 부여한 것이다.
에고와 성령 둘 다 이것(느낌은 보내는 이와 받는 이가 부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여기서 보내는 이와 받는 이가 같은 존재라는 것도 둘 다 알고 있다. 성령은 이것을 기쁘게 그대에게 말해 준다. 에고는 이것을 감춘다. 그대가 이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 소식을 스스로에게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누가 증오와 공격의 소식을 보내려 하겠는가? 누가 자기 자신을 고발하고 죄를 씌우고 단죄하려 하겠는가? 에고의 소식은 언제나 그대에게서 멀리 떠나보내진다. 이는 그대의 공격과 죄책감의 소식으로 고통받는 것은 그대가 아닌 다른 누군가일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설령 그대가 고통받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더 많이 고통받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위대한 기만자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평화의 "원수"로서 그대에게 증오의 소식을 모두 내보내 스스로 자유로워지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로워지는 일이 가능하다고 그대를 설득하려고, 에고는 육체에게 남을 공격함으로써 고통을 찾으라고 명하며, 그 고통을 쾌락이라 부르고 공격으로부터의 자유라며 그대에게 내민다. 에고의 광기에 귀 기울이지 말고, 불가능한 것이 참되다고 믿지 말라.
에고가 육체를 죄라는 목표에 바쳤으며,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자신의 모든 믿음을 육체에 두고 있음을 잊지 말라. 에고의 애처로운 제자들은 에고의 지배를 엄숙히 기념하며 끊임없이 육체를 찬양한다. 죄책감의 매력에 굴복하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믿지 않는 이는 하나도 없다.
누구나 육체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며, 그 육체 없이는 죽을 것이라 여기면서도 그 육체 안에서 죽음 또한 똑같이 피할 수 없다고 여긴다. 에고의 제자들에게는 자신이 스스로를 죽음에 바쳤다는 것을 깨달을 능력이 주어져 있지 않다. 자유가 에고의 제자들에게 주어졌지만 그들은 자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주어진 것이 참으로 주어진 것이 되려면 받아들여지기도 해야 한다.
성령 또한 통신 매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서 받아, 아들에게 그 소식을 전한다. 에고와 마찬가지로 성령도 보내는 이이자 받는 이다. 그를 통해 보내진 것은 오는 길에 자기 자신을 찾으며, 찾던 것을 발견한 채 그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에고도 자신이 찾던 죽음을 발견하여, 죽음을 그대에게 되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