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

이 근본적인 구분은 곧바로 최후의 심판이 지닌 참된 의미로 이어진다. 최후의 심판은 그대의 생각 안에서 가장 위협적인 관념 가운데 하나다. 이는 그대가 최후의 심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다. 심판은 오직 분리 이후에야 생겨났으며, 그때 심판은 전체 계획 안에 세워질 수많은 배움의 도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분리가 수백만 년에 걸쳐 일어났듯이, 최후의 심판도 그와 비슷하게 긴 기간에, 어쩌면 그보다 더 긴 기간에 걸쳐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기적으로 크게 단축될 수 있다. 기적은 시간을 없애지는 않지만 단축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충분히 많은 사람이 참으로 기적적인 마음을 갖게 된다면, 이 단축 과정은 사실상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신속히 자유롭게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대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려면 그 갈등(사랑과 두려움 사이의 갈등)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최후의 심판은 흔히 하나님이 맡아서 하는 절차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 최후의 심판은 나의 도움을 받아 나의 형제들이 맡아서 할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그대가 벌이 마땅하다고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벌을 내리는 일이라기보다는 최종적인 치유다. 벌은 바른 마음 상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며, 최후의 심판의 목표는 그대에게 바른 마음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올바른 평가의 과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는 다만 모든 사람이 마침내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이해하게 되리라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렇게 이해한 뒤에야 선택하는 능력이 이성적으로 인도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분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자유로운 의지와 갇힌 의지 사이의 흔들림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자유를 향한 첫걸음은 거짓을 참에서 가려내는 일을 동반한다. 이는 건설적인 의미에서의 분리 과정이며, 묵시(Apocalypse)의 참된 의미를 반영한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이 창조한 것을 보고 그것이 좋다는 것을 알았듯이, 모든 사람은 마침내 자기 자신의 창조물을 바라보고 오직 좋은 것만을 간직하기로 선택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마음은 자신의 창조물이 지닌 가치 때문에 그 창조물을 사랑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다.

동시에 마음은 자신의 그릇된 창조물을 필연적으로 인정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 그릇된 창조물은 믿음이 없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말이 두려움을 주는 것은 그 심판이 하나님에게 투사되었기 때문일 뿐 아니라, "최후"라는 말이 죽음과 연관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뒤집힌 지각의 두드러진 예다. 최후의 심판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이 실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이 아주 분명해진다.

두려움 속에 사는 사람은 누구도 참으로 살아 있지 않다. 그대 자신의 최후의 심판은 그대 자신을 향할 수 없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창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최후의 심판을 그대가 만든 모든 것에 언제든 의미 있게 적용해, 오직 창조적이고 좋은 것만을 기억에 간직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바른 마음 상태가 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의 목적은 오직 그대에게 최후의 심판을 이루도록 "시간을 주는" 데 있다. 그 심판은 그대 자신의 완전한 창조물에 대한 그대 자신의 완전한 심판이다. 그대가 간직하는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것이 될 때, 두려움이 그대와 함께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이것이 속죄 안에서 그대가 맡은 역할이다.